83. 금산 호텔 연회장에서(4)
한청호가 건넨 것은 사진 뭉치였다.
송 비서의 처참하고 끔찍한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사진을 본 박정환이 눈썹이 크게 꿈틀댔다.
반응이 온다.
“사우디에 갔던 제 비서가 그리되었습니다. 가족들이 시신이라도 찾으러 가겠다고 간청하기에 제가 손을 써서 사우디로 보내 주었죠.”
“그래서 시신은 찾았나?”
“여태 못 찾았습니다. 사우디의 그 광활한 사막에서 시신 찾기가 어디 쉽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청일의 비서가 안 보인다.
늘 한청호를 따라다니는 똑똑하고 눈치 빠른 녀석이었는데 말이다.
박정환이 한청호 앞에 사진을 던졌다.
“내게 이런 걸 보여 주는 이유가 뭐야?”
“사진 속의 그 비서가 각하의 심부름을 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놈이 나른 심부름은 딱 한 번뿐입니다.”
박정환의 눈썹이 다시 한번 꿈틀댄다.
‘제대로 짚었다!’
한청호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박정환이 갑자기 마음을 돌린 이유를 찾기 위해 6시간이나 머리를 굴렸다.
자신과 얽힌 원한 관계, 이해관계부터 시작했다.
박정환과 틀어진 시기, 박정환의 마음이 변할 만한 이유 등등.
‘오랜 시간 동안 기억을 뒤지고 뒤진 끝에 나온 가정이었다.’
짚이는 건 세 가지 정도.
모른 척 하나씩 던져 볼 생각이었는데, 운 좋게 첫 미끼부터 박정환이 물었다.
“사진을 보십시오. 그놈은 아마도 모진 고문을 받았을 겁니다. 살기 위해 뭔 짓을 못하겠습니까?”
“죽을 때 죽더라도 입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되는 말이 있는 법이야.”
반응을 보니 확실하다.
이거였구나.
“사우디 왕실이 제게 억하심정이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걸 모를 리가 있나.
“사우디 왕실에서 청일 정유에 석유 공급을 막은 것만 봐도 아시잖습니까? 이건 모함이고, 누명입니다. 오해란 말씀입니다, 각하.”
라흐만과 얽힌 이야기는 쏙 뺐다.
그리고 진실처럼 적당히 각색하고, 적당히 하소연했다.
한청호의 특기였다.
“제가 사우디는 물론 일본 쪽에도 제대로 조치를 취해 놓겠습니다. 고작 한 건, 무마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자신 있나?”
“물론이지요. 저 한청호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다른 건 몰라도 은밀히 사람 움직이는 건 자신 있습니다.”
한청호가 잘하는 짓이다.
매수하고, 로비하고, 뇌물 먹이고, 사람 움직이는 것.
그제야 딱딱하게 굳었던 박정환의 표정이 조금 풀어진다.
한청호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각하, 살길을 열어 주십시오.”
한청호가 읍소한다.
“지금까지 이상의 충심으로 따르겠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저는 이 한 몸 다 바쳐 각하께 진심을 다해 충성해 왔습니다.”
군사 쿠데타 때부터 시작해 박정환이 정권을 확실하게 잡기까지.
한청호의 돈과 인맥이 큰 역할을 한 건 사실이다.
“각하께서 키워 준 은혜, 반드시 보답합니다. 각하께서 베푸신 은혜, 절대로 외면 못 합니다.”
마침내 박정환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크게 누그러져 있었다.
“청일 정유는 안 돼.”
“청일 정유를 살려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내놓겠습니다. 대신 다른 길을 터 주십시오.”
“무슨 길?”
됐다!
살았다!
한청호는 말했다.
“삼원 건설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된 걸 반성하는 의미로, 청일 건설로 각하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한청호의 승부수는 건설이었다.
최무룡이 한청호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청일 정유나, 청일 건설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한청호는 청일 정유를 버리는 대신 청일 건설로 일어설 작정이었다.
박정환을 꼬드길 목표도 확실히 정하고 왔다.
“반도 호텔과 국립 중앙 도서관 자리에 최고급 호텔을 올릴 계획이신 것을 압니다.”
샤를롯 호텔 서울.
일개 제과 기업을 재벌의 반열로 오르게 만든 결정적인 호텔이다.
최고급 호텔의 필요성 때문에 박정환이 국가 공유지를 내놓아 짓기로 했다.
지상 34층, 1,500개가 넘는 객실을 보유하여 단일 호텔로는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호텔이 된다.
이후 근처를 아울러 쇼핑 센터와 그룹 본사, 명품관 등이 이어져 샤를롯 타운을 이룰 곳이다.
한청호는 입지가 좋은 그곳을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샤를롯의 신군호가 지을 것이다. 샤를롯 제과 영업 정지를 풀어 주는 조건으로 일본보다 더 좋은 호텔을 지으라고 이미 말해 뒀다.”
벌써 호텔 설계도까지 나온 마당이다.
하지만 한청호는 굴하지 않았다.
이미 자리 잡은 청일 정유도 빼앗기는 마당에 아직 지어지지도 않은 호텔의 설계도를 빼앗는 것쯤이야.
“샤를롯은 제과 기업입니다. 더구나 주로 일본에 기반을 두고 장사한다고 한국에는 잘 오지도 않잖습니까.”
그건 사실이다.
샤를롯의 신군호는 일본에 본사를 두고 좀처럼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일본 시장이 한국 시장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었다.
샤를롯 호텔 설계도가 진즉에 나왔음에도 신군호는 지금까지 일본에 있다.
“샤를롯엔 제대로 된 건설 경험도, 실적도, 기술 노하우도 없습니다. 하지만 청일 건설은 다릅니다. 우리는 다리를 지었고, 도로를 깔았고, 빌딩을 올렸습니다.”
한청호는 자신 있었다.
“최고급 호텔을 지을 겁니다. 대한민국 최고를 넘어서 동양 최고, 아니 세계 최고의 호텔을 짓겠습니다. 청일 건설을 믿어 주십시오.”
각오와 홍보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과하면 자칫 강요로 비칠 수 있다.
“이제 곧 서독에서 1974 서독 월드컵이 열립니다.”
한청호가 일부러 화제를 돌린다.
박정환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 대표팀은 아시아 최초로 54년 스위스에서 열린 대회 본선에 처음 출전했지요. 하지만 최근 20년 동안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본선 진출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반면 북한은 어떻습니까?”
대한민국은 매번 처참한 패배를 기록하고 있었다.
박정환이 국제 사회에 나가서도 축구라면 쪽팔려서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다.
반면 북한은 1966년 잉글랜드 대회에서 엄청난 파란을 일으키며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세계가 다들 우리가 북한에 경제력에서 밀리고, 축구 실력에서도 밀리니 모든 것이 밀린다고 떠듭니다.”
박정환이라고 그것을 모를까.
박정환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때 한청호가 부드럽게 말했다.
“청일 그룹에서 축구 협회를 대대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경제적으로 탄탄하게 뒷받침을 하고, 축구 인재들을 키우겠습니다. 그러면 각하께서 국제 사회에 어깨 좀 펴시지 않겠습니까?”
큰돈이 들어가면 성과는 당연히 나오게 되어 있다.
박정환이 턱을 쓸었다.
“그러니 청일에 샤를롯에 주려 하셨던 호텔을 넘겨주십시오. 제가 축구 전용 구장을 짓고, 프로 축구 구단을 창설하고, 축구 국가 대표팀을 독려하죠. 각하의 체면을 세워 드리겠습니다.”
구미가 당긴다.
* * *
박태종은 모른 척 위스키를 마신다.
태수는 작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박태종이 싱긋 웃으며 위스키 잔을 든 손을 흔든다.
따가운 시선을 느낀 태수가 고개를 돌렸다.
한일권이었다.
“수준이 떨어져서 또래 모임은 사양한다더니, 여기서 혼자 놀고 있었네?”
유명 정재계 인사들에겐 태수 따윈 수준 떨어져서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나가던 차 실장이 불쌍해서 구해 주는 것 같던데, 그런 것치곤 아직 각하는 못 뵌 것 같다?”
애초에 차 실장이 왜 젊은 기업가 자제들이 머무는 홀에 왔는가.
분명히 밝힌 출두 이유조차 잊은 모양이다.
“쥐꼬리만 한 건설 사업한답시고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한일권은 피식 웃었다.
“그래 봐야 넌 안 돼. 가진 게 없거든. 우린 출발선부터가 너무 달라. 넌 밑바닥, 나는 저 하늘 위.”
한일권이 태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온다.
“개미가 암만 열심히 벌어 봐야 개미지.”
사람을 벌레 취급하는 건 여전하다.
“네 회사를 청일 그룹만큼 키우려면 100년은 걸릴 거야.”
태수 역시 피식 웃었다.
“남자의 질투는 추해. 그것도 능력 없이 속만 꼬인 놈의 질투는 더더욱 추악하지.”
한일권은 경영에 능력이 없다.
그건 태수가 직접 겪어 봐서 안다.
“내가 청일 이상의 재벌이 되는 게 빠를까, 아니면 네가 청일을 쫄딱 말아먹는 게 빠를까?”
태수는 청일을 대한민국 최고까지 키워 봤다.
그것도 저 능력 없는 놈팽이가 말아먹는 일까지 뒷수습하면서.
“우리 내기할까? 예상컨대 내기는 아주 박빙이 될 거야.”
태수가 청일 이상의 재벌이 되건, 청일이 쫄딱 말아먹어서 바닥으로 꺼지건.
이 세계의 룰이 재벌의 순위에 기반한다면 무조건 태수가 유리한 게 아닌가.
“넌 말아먹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며? 이거 벌써부터 긴장되는데?
안 그래도 한일권은 손대는 것마다 말아먹었다.
몇 개 말아먹고 나니 한청호가 한일권을 경영에서 완전히 밀어냈다.
멈칫.
뼈아픈 곳을 찔린 터라 제자리에 멈춰 선 한일권.
그가 미미하게 입꼬리를 떨었다.
한일권의 얼굴에서 웃음이 점차 사라져 간다.
태수가 일부러 아차, 한다.
“이런, 백수를 두고 괜한 소리를 했군. 말아먹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에게.”
한일권이 입술을 깨문다.
아직 경영엔 손도 못 대고 있는 한일권이다.
복귀는 기한 없이 미뤄지고 있었다.
“아버지 없으면 넌 뭐지? 호가호위(狐假虎威)하니까 재밌나?”
태수가 한일권을 향해 마주 걸어간다.
저벅저벅. 우뚝.
둘은 홀 가운데에서 마주 섰다.
“호랑이같이 네 뒤에 떡 버텨 줘야 할 네 아버지? 지금 저 방에서 구걸하고 있다.”
방금 한청호가 망신을 각오하면서도 억지로 저 방에 들어갔다.
제 스스로 청일 정유를 바치는 대가로 살려 달라고 목숨 구걸하려고.
“그런데 넌 여기서 시비나 걸고 있나? 한심한 놈이군.”
태수가 한일권을 내려다본다.
태수의 눈을 본 한일권.
“확 뽑고 싶어지는 눈깔을 갖고 있네? 주둥이도 그렇고.”
“부럽나?”
한일권은 히죽 웃는다.
“강태수, 지금 우리 아버지 걱정할 때가 아닌데. 당장 네 밤길부터 걱정해야 할 거야.”
“남 걱정하기 이전에 너나 잘해.”
한일권의 눈이 번뜩인다.
살인자의 눈이다.
‘날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군. 익숙한 눈이야.’
하지만 태수는 저 눈을 45년이나 똑바로 쳐다보고 살았다.
‘살인자가 살인자의 눈을 갖고 있는 건 당연하지.’
청일 병원 VIP룸에서 봤던 그 눈이다.
‘내가 받은 고통 이상으로 널 고통스럽게 만들어 주지. 차근차근 하나씩. 이번엔 내 차례다.’
한일권은 일부러 가증스럽게 웃는다.
“강태수, 너야말로 내 걱정할 시간에 네 가족 걱정부터 해 보지그래?”
가족을 들먹였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태수는 싸늘하게 웃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도 할 수 있다.”
태수의 눈이 매서웠다.
“넌 왜 나는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태수에게서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높은 곳에 오랫동안 군림해 온 자의 압박감이었다.
하지만 한일권은 이죽거렸다.
“해 봐. 하지도 못할 거면서 입으로는 뭔들 못해?”
지켜야 할 가족이라면 압도적으로 한일권이 유리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한일권이 어깨를 으쓱한다.
“보다시피 우리 아버지는 청일 그룹의 회장님이고, 어머니는 회장님 사모님, 그리고 내 여동생은······.”
한일권이 태수의 귓가에 작게 속삭인다.
아주 기쁘게 웃으면서.
“재산 상속이며 권력 다툼이며 귀찮아 죽겠는데, 네가 손을 대주면 나야 고맙지.”
여동생을 치워 달란 소리였다.
실제로 한일권은 여동생의 남편을 치워 버린 전적이 있다.
경영권이며 재산에 손도 대지 못하도록.
“내 말을 오해했군.”
태수는 위스키를 마시며 말했다.
“네가 그 꼴이 될 거란 소리였는데.”
본인이 대상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한일권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태수는 씩 웃었다.
“해 볼까? 너도 남한테 해 봐서 잘 알잖아. 어떻게 하면 되는지. 어떤 꼴이 되는지.”
한일권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마도 한일권으로서는 남에게 이런 종류의 협박을 하면 했지 협박을 받아 본 적은 없었을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