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80화 (80/230)

80. 금산 호텔 연회장에서(1)

청일 그룹 본사 회장실.

한청호는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왜 갑자기 대출을 막는 거야? 분명히 그때는 확답을 했잖아! 갑자기 말을 바꾸는 이유가 뭐야?”

-죄송합니다. 우리 은행도 이번 오일 쇼크 때문에 타격이 워낙 심한지라······.

“받을 돈은 다 받아먹고 이제 와서 입 닦겠다는 거야?”

-그 돈, 다시 토해 내겠습니다. 안 그래도 그 돈 먹고 탈 나게 생겼으니까요.

“이봐! 지금··· 야! 최상수!”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한청호는 화가 나서 전화기를 부서져라 끊었다.

“대체 이게 어쩐 일이야! 은행들이 하나같이 전부 대출을 막고 원금 회수를 독촉하니!”

청일은 지금 석유 공급이 막혔다.

지금 다른 계열사에서 나오는 돈을 끌어다가 청일 정유와 청일 석유 화학에 집어넣고 있다.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 도산하고도 남았다.

그때 박 비서가 회장실에 들어왔다.

“회장님, 장수 은행에서도 독촉 전화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알아! 채근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듣자 하니 위에서 무슨 언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끄러워! 네놈이 말하지 않아도 상황 돌아가는 꼴을 보면 그 정도는 나도 알아!”

한청호는 신경질적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비서실장 김정림에게 몇 통이나 전화를 넣었지만 받지 않는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있다.

“최무룡을 만나야겠다.”

어쩔 수 없이 한청호는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 * *

집으로 향하는 태수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오늘도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간다.

“저 왔습니다.”

“아니, 이게 누구야? 태수야, 잘 왔다.”

“태수야!”

부모님이 반가워하며 달려 나왔다.

태수는 어머니를 번쩍 안아 들었다.

“잘 지내셨어요?”

“그럼, 우리야 잘 지냈지. 태수야, 너는 살이 또 빠졌어.”

“안 빠졌어요. 똑같아요.”

“안 되겠다. 밥 먹자. 내가 우리 아들 살 좀 찌워서 보내야겠어.”

어머니는 또 밥 타령이다.

자식만 보면 맛있는 걸 먹이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다.

태수가 어찌 그 마음을 모를까.

“이건 선물이에요.”

“뭘 또 이런 걸 자꾸 사 와. 그냥 손 가볍게 와. 그래야 집에 오는 발걸음도 가벼워지지.”

“두 손이 무거워야 아들 마음은 더 가벼워지는 법이에요.”

한수가 슬쩍 밖으로 나온다.

“형 왔어?”

“어.”

“추운데 밖에서 그러지 말고 안에서 얘기해. 아랫목이 뜨끈해.”

“그러자.”

12월의 강원도는 엄청 춥다.

태수가 집으로 들어간다.

한수가 아랫목을 태수에게 양보했다.

“공사 끝나서 정산받았겠다. 석유로 돈 많이 벌어 온다더니 얼마나 벌었어?”

“1억 배럴.”

“푸흡!”

한수가 마시던 꿀물을 뿜었다.

태수를 보는 눈이 잘게 떨렸다.

“그, 그럼 그게 다 얼마야?”

“직접 계산해 봐. 너 그거 잘하잖아.”

“허··· 내가 그동안 암만 돈 잘 굴렸어도 형에 비하면 개미만도 못하네.”

한수가 분한 얼굴을 한다.

태수는 씩 웃었다.

“너도 투자 회사 제법 잘 굴린다며? 얼마나 벌었어?”

“쳇, 됐어. 그냥저냥 벌었어.”

“마이너스 안 내고 반년 동안 자산이 15%나 늘었으면 대단한 거야.”

석유 회사 주가가 오일 쇼크로 침몰한다는 것을 아는 이상 한수가 손해 볼 일은 없었다.

중동 전쟁이 발발하던 10월 이전에 투자금을 전부 회수했다.

“돈이 돈을 번 거지. 내가 잘한 게 아니야.”

“돈이 돈을 벌 수 있지만 아무나 돈을 벌지는 않아. 남의 돈 먹기가 어디 쉬운 줄 알아? 한수 네가 잘한 거야.”

장말동의 무기 판 돈이 한수의 투자 회사로 흘러간다.

이번엔 태수가 석유 판 돈도 한수의 투자 회사로 흘러갈 것이다.

“석유 팔고 있으니까 투자 회사 자금이 꽤 불어나겠다.”

“와, 요즘 시기에 석유 1억 배럴이라면 진짜 엄청나다.”

“이제 장말동 어르신의 돈은 적당히 세탁해서 돌려준다 생각하고, 형이 주는 돈으로 회사 굴려 봐. 망해도 되니까 너무 부담 갖지는 말고.”

“얼마나 줄 건데?”

“청일 정유 인수할 돈만 빼고. 남은 돈은 네가 알아서 적당히 투자해 봐.”

“청일 정유?”

한수가 입을 떡 벌린다.

“청일 그룹의 청일 정유를 인수한다고? 형이?”

“응.”

“그러고도 나한테 투자할 돈이 남아?”

“아마도?”

왜냐하면 청일 정유가 쫄딱 망한 다음에 헐값으로 가져올 거거든.

한청호가 피눈물 흘리면서 망한 다음에 실속은 내가 챙길 작정이야.

동생의 존경 어린 시선에 형의 어깨가 솟아오른다.

“형, 이번에 석유 파동으로 주가가 심상치 않아. 미국뿐만이 아니라 유럽과 일본, 한국까지 전부.”

중동에서 시작된 오일 쇼크 때문에 전 세계가 출렁거린다.

한수가 세운 미국 투자 회사 역시 그 흐름을 타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기업들은 석유를 기반으로 수익을 뽑아내고 있었잖아. 그런데 유가가 무섭게 치솟으니까 경영이 악화됐어. 주가는 폭락했고. 그러다 보니 마땅히 투자할 곳이 없어.”

한수의 고민이 이해가 간다.

하지만 투자할 곳이 석유 관련 사업만 있는 건 아니다.

“한수야, 시야를 돌려. 이 상황에서 타격받지 않는 곳은 없는지 새로운 투자처는 없는지. 투자 회사를 굴릴 때마다 늘 염두에 둬야 하는 일이야.”

“제조업 대신 농업 등등 찾아보고 있는데 영 마땅치 않아.”

그래도 열심히 머리를 굴린 모양이다.

“제조업 대신 다른 것에 눈을 돌리다 보니 벤처 기업이 눈에 들어오긴 했는데······.”

거기까지 눈을 돌렸다고?

“아직 투자하기엔 기반이 너무 약해.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자리 잡을 것 같아. 그걸 보기엔 성에 안 차.”

한수가 고민하는 이유였다.

‘힌트를 좀 줄까?’

한수의 안목이 빛을 발할 수 있으며 투자 수익도 제법 크게 올릴 수 있는 또 다른 분야가 있긴 하다.

“영화에 투자해 보면 어때?”

“영화?”

한수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영화라면 석유 파동에 흔들릴 이유가 없겠네.”

“게다가 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점점 문화 산업에 눈을 돌리고 있어.”

“괜찮은데? 한 번 작심하고 알아볼까?”

투자자가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감독을 비롯한 영화 팀이 영화를 만들고, 투자 배급사가 영화를 공급한다.

투자자는 영화 수익금에서 투자금을 회수한다.

한수가 말한 대로 돈이 돈을 낳는 곳이기도 하다.

“좋은 영화를 찾으면 제법 큰 수익을 한 번에 올릴 수 있어. 반면 망하기도 쉬우니까 신중하게 접근해 봐.”

영화는 안목이 필요하다.

잘만 만들면 세계적으로 대박을 치고, 성적이 부진하면 투자금도 못 건진다.

그렇게 쫄딱 망한 투자자가 한둘이며 대박 난 투자자가 한둘인가.

‘스티븐 맥스의 일화도 유명하지.’

그는 컴퓨터를 직접 만드는 회사를 세워 피치 1호란 이름의 컴퓨터를 팔았다.

이것으로 성공했는데, 피치 사의 대주주들이 스티븐 맥스를 쫓아냈다.

재기를 꿈꾸던 맥스는 픽스란 영화 회사를 인수하고, 컴퓨터 기술을 이용해 토이 스토어란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대박이 났다.

그 돈으로 자신을 쫓아낸 피치 사를 재인수하여 다시 회장이 되었다.

“형, 한국 영화에 투자할까? 아니면 할리우드 영화에?”

“네가 원하는 대로. 천천히 찾아보고 결정하자.”

회귀해서 좋은 점은 이런 때다.

‘난 어느 영화가 성공하고 실패할지 대충 아니까, 영 이상한 곳에 투자하겠다면 말리지, 뭐.’

돈을 많이 잃지는 않을 거다.

아마도.

한수가 혼자 멋대로 일을 치지만 않는다면.

그래서 태수는 슬쩍 한마디 덧붙였다.

“괜찮은 영화 시나리오를 찾으면 말해 줘. 같이 골라 보자. 한 사람 눈보다는 두 사람 눈이 낫지.”

“좋아, 그렇게 할게.”

* * *

종로의 초명은행 은행장실.

한청호가 최무룡을 만나러 왔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아직 우리 애들 풀려났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요.”

“내가 지금 각방으로 손쓰고 있어. 그러니까 청일 정유부터 좀 살자.”

최무룡은 콧방귀를 꼈다.

“형님이 각방으로 손쓰고 있는 건 은행장들이겠죠. 제가 눈멀고 귀 먼 줄 아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왜 찾아왔는지도 알겠구나.”

“돈 없다니까요.”

“무룡아, 너와 나 사이에 치사하게 이럴 거냐? 고작 이런 일로 나랑 틀어질 참이냐?”

최무룡이 음흉하게 웃는다.

“좋습니다. 돈이 그렇게 급하시다면 빌려 드리죠. 대신······.”

“대신?”

“나는 형님 덕에 삼원 건설을 잃었으니 형님이 건설을 챙겨 주시면 되겠네요.”

한청호의 눈이 쫙 찢어진다.

“지금 청일 건설을 달라는 소리냐?”

“청일 정유 살리려면 돈 필요하시다면서요. 청일 건설 주십시오.”

“진짜 이렇게 나올래?”

“청일 정유냐, 청일 건설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최무룡이 흐흐, 웃는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드리죠. 난 바빠서 이만 갑니다.”

한청호가 입을 꽉 다물었다.

이번엔 최무룡이 한청호를 지나쳐 은행장실을 나간다.

“아, 그리고 거 문 좀 살살 닫으쇼. 문짝 값 줄 것도 아니면서.”

얄미운 미소와 함께.

* * *

1973년 12월. 금산 조선 사업부가 금산 조선 중공업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울산에서 금산 조선소가 완공되었다.

대한민국 중공업 판도를 바꾸겠다는 금산 장준용의 야심 찬 포부였다.

<금산 조선 중공업 출범 기념 행사>

금산 호텔 연회장에서 개최된 이 행사엔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이 대거 몰렸다.

모두 금산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였다.

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태수도 금산 호텔에 도착했다.

“늦었군.”

강원도에서 서둘러 온다고 했는데, 쌓인 눈이 문제였다.

12월 강원도에선 걸핏하면 눈이 내리거나 도로가 빙판길이 되기 일쑤였다.

그런 까닭에 기념행사 시간에 맞추지 못했다.

행사는 이미 끝났고, 뒤풀이 축하 연회가 밤늦도록 이어지고 있었다.

태수는 옷매무새를 점검하며 걷는 속도를 높였다.

“금산 조선 중공업 축하 연회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초대장을 가져오셨습니까?”

연회장 입구에는 출입 통제를 담당한 웨이터가 있었다.

어중이떠중이가 모여들어 번잡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여기.”

태수는 초대장을 내밀었다.

웨이터가 초대장 안에 적힌 <태양 건설 강태수>와 인명부를 대조해 확인한다.

“입장하십시오.”

태수는 그렇게 연회장에 입장했다.

각 신문과 방송사에선 기자들이 나왔을 텐데 기자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금산 조선 중공업 기념행사가 끝나고 돌아간 모양이다.

‘그런데 기업의 중요 인물들은 한 명도 안 보이는군.’

홀에 남은 사람들은 위층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자리를 빛내기 위한 연예인, 문화 예술인, 사회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정치인이 몇 명 보이는데, 그다지 유명한 사람들은 없다.

중요한 사람들은 위층에 올라가 끼리끼리 모여 친목을 다지고 있을 터다.

태수는 음료를 나르는 종업원을 한 명 붙잡았다.

“금산의 회장님께 직접 축하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위층으로 올라가셨습니까?”

금산의 장준용을 만나려면 층마다 홀을 일일이 직접 뒤지는 것보다 종업원을 통해 안내받는 게 빠르다.

“아, 네, 그렇습니다. 기념행사가 끝나고 축하 연회로 이어지면서 다른 분들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가셨어요.”

역시.

“하지만 위층에 올라가려면 초대장이 필요한데요.”

“태양 건설의 강태수입니다.”

태수가 초대장을 보여 주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세요.”

“감사합니다.”

태수는 종업원을 따라 메인 홀에서 벗어나 3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상하다.

‘3층에 있는 사람들 나이대가 너무 젊다. 대부분 내 또래들이군.’

종업원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아무래도 종업원이 뭔가 착각한 모양이다.

금산의 회장님께 직접 축하 인사를 드린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자제들의 모임에 데려온 것이다.

‘내 나이가 젊어서 또래 자제들과 만나려고 온 줄 안 모양이군.’

상식적으로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고작 25살에 불과한 태수가 그룹 총수들과 만나리라고 누가 생각할까?

그들 자식들과 친분이 있어 연회에 참석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일 것이다.

‘이번 기회에 눈도장을 찍겠다며 다들 회장님께 직접 축하 인사를 드리겠다고 나올 수도 있겠지. 귀찮으니 적당히 안내하란 지시가 내려왔었나.’

그렇지만 태수가 애송이들과 어울려 친분을 다져서 무엇하겠나.

태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누군가가 태수에게 말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어디서 왔을까?”

태수가 아주 잘 아는 목소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