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79화 (79/230)

79. 대통령과 담판 짓다(3)

한청호의 말에 박정환이 펜을 내려놓는다.

“그러게 말이야. 내가 중화학 공업 육성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일을 이렇게 망쳤단 말이지.”

“각하,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청일 정유가 이렇게 끝나선 안 됩니다.”

한청호는 말했다.

“석유가 중동에만 나는 것도 아닙니다. 미국, 소련, 부루나이, 쿠웨이트, 베네수엘라, 아랍에미리트, 알제리, 나이지리아, 에콰도르, 앙골라까지. 청일이 반드시 뚫겠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청일 화학 김봉남이 일선에 나섰습니다. 그놈이라면 반드시 석유를 구해 올 겁니다.”

김봉남은 상대 약점을 파악해 구워삶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자이다.

“각 계열사 사장단을 전부 해외로 보내 교섭하는 중입니다. 석유 공급처를 뚫는 건 시간문제란 소리죠. 그러니 각하께서 그 시간을 눈감아 주십시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청일 정유를 살려야 한다.

“이참에 석유 공급처를 다변화하는 겁니다. 그럼 다음번 중동 전쟁이 나도 우리 청일 정유는 살 수 있습니다.”

“흐음.”

석유 공급처 다변화는 구미가 당긴다.

“고작 중동발 석유 파동 때문에 나라 가 휘청대서야 되겠습니까? 각하의 숙원이 이대로 무너져서야 되겠습니까?”

그건 안 될 말이다.

“청일 정유에 시간을 주십시오. 반드시 각하의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저 청일의 한청호입니다. 한 번만 믿어 주십시오.”

한청호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온다면 자신이 있다는 소리인데······.

마침내 박정환이 입을 뗀다.

“알았으니까 가 봐.”

한 번은 눈감아 주겠다는 뜻이다.

한청호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각하. 정말 감사합니다.”

한청호가 사과 박스 두 개를 박정환 앞으로 밀어 넣는다.

“분명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겨우 시간을 벌었다.

* * *

청와대에서 나온 한청호는 서둘러 차에 올랐다.

목을 갑갑하게 조였던 넥타이를 풀면서 박 비서에게 말했다.

“각 은행에 전화 돌려. 은행장과 약속을 잡아.”

오일 쇼크 때문에 청일 정유 적자가 어마어마하게 쌓이고 있다.

각 계열사에서 나오는 흑자를 처발라 간신히 버티고 있다.

이대로라면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도산하게 될 것이다.

“각하께서 묵인하시는 일이다. 안 나오는 놈에겐 그렇게 전해.”

“뭐라고 전할까요?”

“더러운 꼴 보게 될 거라고.”

한청호의 손엔 그놈들의 치부책이 있다.

청일 그룹에서 정보실을 따로 만들어 운영하는 이유다.

“청일 정유는 이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 * *

공항에 태수를 마중 나온 자가 있었다.

캡틴이었다.

사우디에서 한청호가 보낸 암살자들을 잡을 때 그와 좋은 인연을 맺었다.

“강태수 씨, 오랜만입니다.”

“캡틴도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강태수 씨 덕분에 2계급 특진했습니다. 말씀대로 훈장 종류가 달라졌거든요.”

차기범이 특별히 힘을 써 줬다는 뜻이다.

“차 실장님께선 잘 계시죠?”

“물론입니다. 차 실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갑시다.”

태수의 트렁크를 대신 받아 자동차 트렁크에 싣는 캡틴.

캡틴은 태수를 차에 태우며 웃었다.

“차 실장님께서 미리 대통령 각하께 말씀드려 약속을 잡았다고 합니다.”

“차 실장님께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저녁 식사를 함께하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부르릉.

캡틴과 태수를 태운 차가 출발했다.

* * *

서울 성북동의 고급 요정인 대운각(大雲閣).

7천여 평의 터와 40여 동의 건물을 보유한 그곳은 70년대의 대표적인 요정이었다.

그곳은 정치인, 기업인 등 유명 정재계 인물들이 주로 출입하여 은밀한 대화가 오가기로 유명했다.

“차 실장님께서 각하를 이곳에 모시고 오셨습니다. 들어가십시오.”

“감사합니다.”

문 앞까지 안내해 준 캡틴.

태수는 조용히 문 앞에 섰다.

그러자 요정의 접대부가 공손히 문을 열었다.

드르륵. 탁.

문이 열린 틈 사이로 태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식사와 함께 청주(淸酒)가 담긴 술잔을 들고 있던 박정환이 고개를 돌렸다.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강태수입니다.”

“기다리고 있었네.”

박정환이 대각선의 자리를 권한다.

태수는 성큼성큼 걸어가 자리에 털썩 앉았다.

“사우디 공사를 훌륭하게 끝냈더군.”

“전부 각하께서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신 덕분입니다.”

박정환이 태수를 물끄러미 본다.

“금산 유조선의 물로 내 얼굴에 금칠도 해 줬고, 사우디 공사를 내팽개친 놈들이 내 얼굴에 똥칠하는 것을 자네가 잘 수습해 줬지. 내가 이 공을 잊어서야 쓰겠나.”

박정환은 차기범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차기범에 서류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낸다.

태수 앞에 슥 밀어지는 서류 봉투.

“각하의 선물이네.”

열어 보니 삼원 건설 인수 합병과 관련된 문서들이었다.

“사인만 해. 그러면 마무리될 거야.”

“감사합니다, 각하.”

“그놈들이 하던 사업도 자네가 맡아.”

“그것까지도 주시는 겁니까?”

“그건 차 실장이 따로 챙겨 줬으니까 그런 줄 알아.”

태수가 차기범을 슬쩍 보았다.

차기범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건달 새끼들이 관급 공사를 그렇게 많이 해 먹었다지? 도로, 하천, 마을 회관, 아파트 공사까지. 전부 자네가 맡아서 완공시켜.”

관급 공사는 다들 침을 흘리는 좋은 일거리다.

따기 어려워서 그렇지 돈 떼일 일도 없고, 귀찮은 간섭도 없어서 꿀 떨어지는 일이다.

마침 포항 철강에서 의뢰한 학교 공사도 끝났다.

박철완이라면 신이 나서 공사에 달려들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장 내일부터라도 착수하지요.”

“자넨 그 시원시원한 대답이 참 마음에 들어. 한 잔 받지.”

박정환이 광택이 은은한 청자 술 주전자를 들어 태수의 잔을 채워 주었다.

“감사합니다.”

태수는 법도에 맞춰 단번에 술잔을 비웠다.

박정환이 흐뭇한 표정으로 태수를 보았다.

“이제 보니 술도 제법 하는군. 마시는 태가 좋아.”

“과찬이십니다.”

주도(酒道) 역시 제대로 교육받은 태수가 아닌가.

“나를 보자고 은밀히 청을 올린 이유가 뭔가?”

“각하께 드릴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태수가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사우디 국방부 장관 칼리드가 박정환에게 보낸 편지였다.

편지를 읽은 박정환의 표정이 부드러워진다.

첫 번째 편지는 감사와 치하가 듬뿍 담긴 우방국의 편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편지를 본 순간 박정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박정환이 편지를 읽다 말고 술상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는다.

눈빛이 사나워졌다.

“강태수, 자네는 이게 무엇인지 알고 있나?”

“모릅니다.”

“사우디 국방부 장관이 자네에게 이걸 보냈을 때 뭔가 언질이 없었나?”

“없었습니다. 전달을 잘하라고 당부하셨을 뿐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편지와 동봉된 찢어진 공책 한 장.

그곳엔 박정환의 치부가 들어 있었다.

‘한청호를 시켜 은밀히 행한 일을 사우디 국방부 장관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박정환의 치부가 사우디 왕실에 흘러갈 줄이야.

이 정도까지 구체적인 정보가 새려면 출처는 둘뿐이다.

‘돈 나른 놈, 아니면 돈 받은 놈.’

그런데 공책에 적힌 것은 능숙한 한글.

심지어 돈 받은 놈이 여럿 적혀 있다.

정보가 샌 출처가 점점 명확해진다.

‘한청호, 이 개새끼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군.’

박정환은 편지를 와락 구겼다.

차기범의 표정 역시 딱딱해졌다.

“각하, 무슨 일입니까?”

박정환이 손을 들어 차기범의 말을 막았다.

대신 태수를 돌아본다.

“편지에 이르길, 사우디 국방부 장관이 자네에게 선물을 줬다던데. 그게 뭐지?”

“이겁니다.”

태수가 품에서 문서를 또 꺼냈다.

문서 제목을 읽은 박정환이 눈을 크게 떴다.

“석유 공급 권리증?”

“예, 제가 개인적으로 사우디에서 공을 좀 세운 게 있어서 그걸 받아 왔습니다.”

“대단하군.”

무려 반년 동안 다섯 개 회사에 대해 석유 공급 제한을 풀어 주겠다는 권리증이었다.

심지어 사우디 국왕의 인장까지 받았다.

박정환이 턱을 쓸었다.

“만일 내가 자네였다면 차라리 석유를 달라고 했을 텐데.”

지금 석유 가격이 하늘을 높이 치솟고 있었다.

석유로 받아 왔으면 떼돈을 벌 시기가 아닌가.

“현재 중동 산유국이 석유 수출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도 그 제한으로 인해 어려움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에 보탬이 되고자 잔꾀를 썼습니다.”

개인의 영달보다 나라의 보탬이 되겠단 생각을 했다니, 말이 참 예쁘지 않은가.

박정환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작게 걸렸다.

“각하께서 심혈을 기울여 추진하는 중화학 공업 육성정책이 석유 파동 때문에 좌초될 수는 없잖습니까.”

박정환은 단번에 술잔을 비웠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이것을 각하께 바치고 싶습니다.”

“뭣이라?”

박정환이 깜짝 놀랐다.

“지금 석유 공급권을 나한테 바치겠다는 것인가? 반년 동안 제한 없이 석유를 공급받을 수 있는 권리를?”

“저 같은 일개 국민보다야 각하께서 훨씬 요긴하게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탐난다.

이것만 있으면 대한민국은 이 위기를 무리 없이 넘길 수 있을 것이다.

박정환의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은 다른 나라들이 좌초될 때 오히려 탄력을 받아 성장할 것이다.

“이 권리를 얻기 위해 재벌 총수들이 각하의 발밑에 납작 엎드릴 겁니다.”

“그깟 권리 없어도 그놈들은 내 발밑에서 머리를 못 든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빈손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것보다는 성의를 표시하며 조아리는 게 기분 좋지 않겠습니까?”

구미가 당긴다.

정치를 하는 데는 원래 돈이 많이 드는 법이다.

분명히 그놈들은 석유 공급권을 얻기 위해 사과 박스를 들고 달려올 것이다.

말 한마디 떨어지기 무섭게 박정환이 원하는 일을 해낼 것이고.

‘누구에게 이 권리를 줄까?’

박정환이 속으로 셈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각하, 그 권리증 밑에 쓰인 추신은 읽으셨습니까?”

“추신?”

박정환은 그제야 권리증 맨 밑에 적힌 추신을 확인했다.

<단, 청일 정유에는 석유 공급을 거절한다.>

박정환은 피식 웃었다.

“사우디 왕실에서 이번에 화가 단단히 났군.”

지난번 도로 공사 문제 때문에 사우디 왕실은 이만저만 화가 난 게 아니다.

일국의 대통령인 박정환에게 비공식적으로 항의 서한을 보냈을 정도다.

일개 회사 나부랭이인 청일에는 오죽했을까.

그것을 잘 아는 박정환이다.

“흐음, 청일 정유를 제외하고도 대한민국엔 다섯 개 이상의 정유 회사가 있다. 그놈들 전부 요즘 석유 구하기 어려워서 고생하고 있지.”

“그들에게 석유를 공급한다면 이 나라 경제도 숨통이 트일 것입니다.”

날로 치솟는 유가 때문에 경제가 위태로울 지경이다.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미친 듯이 오르고 있다.

석유에 의지하는 중화학 공업엔 적자가 날마다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이러니 민생 안정에도, 해외 수출에도, 국가 발전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각하께서 보시기에는 한청호가 각국을 돌며 석유를 받아 오는 게 경제 성장에 기여가 클까요, 아니면 이것을 제시하고 다섯 개 회사가 석유를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게 나라의 이득일까요?”

물어보나 마나다.

“좋다. 이 권리증을 잘 받으마. 이 나라 경제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박정환이 거절하지 못할 제안이었다.

“이걸 내게 바치고, 네가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이냐?”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

청탁이 있으니 이런 권리를 바치는 게 아닌가.

“태양 정유를 세우고 싶습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인가? 세우면 세우는 거지. 추진해 봐.”

“청일 정유가 폭삭 망한 자리에 간판을 떼서 바꾸고 싶습니다.”

석유 권리증만큼 묵직한 청탁이었다.

박정환은 크게 웃고 말았다.

아주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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