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대통령과 담판 짓다(2)
종로의 초명 은행 은행장실.
최무룡은 한청호의 방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청일 정유가 위태로워. 도와주게.”
“제 코가 석 자인데요. 아무래도 힘들겠습니다.”
한청호는 불쾌한 기색을 숨겼다.
지금 아쉬운 건 자신이었다.
최무룡의 돈이 필요하다.
“부탁함세.”
“초명 은행이 요즘 어떤지 잘 아시죠?”
“유럽 석유 회사 주식을 사 모으다가 피해를 본 거 말인가?”
그것도 청일 정유 주식을 팔아서 마련한 돈으로.
박 비서에게 그 소식을 듣자마자 화가 난 한청호는 재떨이를 집어 던졌었다.
하지만 한청호는 최무룡 앞에서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알고 계신다면 얘기가 빠르겠군요. 저 돈 없습니다.”
“꿍쳐 놓은 돈이 제법 되는 거 다 아네. 청일 정유 주식을 좀 더 내놓지. 빌려주게.”
“흥!”
최무룡이 코웃음을 쳤다.
그가 한청호를 노려보며 입술을 씰룩였다.
“삼원 건설이 위험에 처했을 때도 그렇게 도와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뭐야?”
“저도 듣는 귀가 있습니다. 삼원 건설과 청일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딱 자르셨다고요?”
한청호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삼원 건설 건달 새끼들이 공사 내팽개치고 도망간 것 때문에 내가 곤욕을 치른 건 왜 입 닦아?”
“사우디 왕실에서 항의 좀 한 거요? 공사판이 전쟁터가 됐는데 어쩌란 겁니까?”
“네가 수하들 관리 못한 것을 왜 내 탓을 해? 그럴 거면 네가 사우디로 날아갔어야지!”
“청일 건설이 좀 도와줬으면 일이 이 지경까진 안 갔을 겁니다.”
최무룡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박정환이 삼원 건설을 공중분해 시켰습니다. 우리 애들은 중앙 정보국으로 전부 끌려갔고요. 그 사이좋던 놈들이 원수가 돼서 서로에게 이를 갑니다.”
원망스럽다.
한청호의 꼬드김으로 사우디 공사 입찰을 했던 게 후회스럽다.
“그놈들 지금 감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탈탈 털려서 저까지 잡혀갈 뻔했습니다. 그런데 뭐요?”
“그러게 누가 사우디에서까지 나쁜 짓 하래? 박정환이 그 말을 듣고 꼭지가 돈 걸 왜 내 탓을 해?”
최무룡이 마지막 인내심을 쥐어짰다.
“비자금 세탁한다고, 정치 자금 만든다고 고생한 놈들입니다. 빼내 주십시오.”
“지금은 안 돼.”
“진짜 이러깁니까?”
“지금 청일 정유가 무너지게 생겼어!”
최무룡은 등을 돌렸다.
“손님 나가신다! 배웅해라!”
“야, 최무룡! 너 진짜 이렇게 나올 거야?”
“대화는 우리 애들 꺼내 주고 난 다음에 다시 합시다.”
최무룡이 데리고 있던 수하들이 한청호에게 걸어온다.
한청호는 최무룡을 매섭게 노려보다 등을 돌렸다.
“잘 생각해. 내 손을 놓고도 초명 은행이 살 수 있을 줄 알아?”
“살펴 가십시오.”
“청일 정유가 쓰러지면 너 역시 멀쩡하진 못할 거다.”
쾅.
한청호는 초명 은행장실 문을 부서져라 닫았다.
* * *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칼리드 저택.
그곳 응접실에서 칼리드는 태수를 만나고 있었다.
[자네에게 고마워할 게 아주 많아.]
칼리드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태수 덕분에 칼리드는 정적들을 물리치고 권력을 틀어잡았다.
[도로 공사를 잘 끝낸 것에 더해, 병참 기지 건설 및 군수 물자 보급의 공을 인정받았다. 라흐만은 동쪽 도시 개발 담당자로 발령 날 것이다.]
[좋은 소식이군요.]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담당한다는 소리지.]
그뿐만이 아니다.
[내 동생 압둘라는 국방부 방위군 사령관에서 이번에 산업부 장관으로 발령이 났지.]
[축하드립니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에 힘을 쓸 수 있다는 소리야.]
칼리드는 착실하게 태수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청일 정유에 석유를 끊었네.]
[덕분에 청일 정유에서 중동 여러 나라를 전전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사우디까지 총 일곱 개 나라에서 확답을 받았지. 그 외 OPEC에 가입한 중소 산유국에도 연락을 돌렸어. 아마 내 뜻을 무시할 국가는 많지 않을 거야.]
한청호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겠군.
아주 좋은 소식이다.
[자네가 이번에 확보한 석유가 총 6천만 배럴이었지?]
[네, 그렇습니다.]
[내 특별히 국왕 폐하께 윤허를 받아 뒷자리를 채워 주려고 하네.]
칼리드는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1억 배럴.]
엄청난 양이다.
더구나 석 달 동안 석유 가격이 총 네 배 가까이 올랐다.
[정말 감사합니다.]
태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전 이번에 한청호의 청일 정유를 완전히 도산시킬 작정입니다.]
[하하하! 그거 정말 마음에 드는 계획이로군!]
한청호에게 이를 가는 칼리드가 아닌가.
기쁜 마음으로 태수의 계획을 반겼다.
[청일 정유를 도산시키고, 제가 태양 정유를 만들 생각입니다.]
[청일 정유를 헐값에 꿀꺽하겠다는 소리군.]
[맞습니다. 그러니 칼리드 님이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도와줄까?]
태수는 말했다.
[잠시 귀국하려고 합니다. 박정환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죠.]
짐작 가는 게 있다.
[박정환 대통령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들고 가고 싶다는 뜻이구나.]
[그렇습니다. 제 석유를 조금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바꾸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게 뭔가?]
[석유 공급 권리증입니다.]
사우디를 비롯해 총 일곱 개 중동 산유국은 이스라엘을 돕는 서방 세력들에 석유 수출 금지를 천명했다.
대한민국은 미국과 뜻을 같이하는 처지다.
그러니 당연히 석유 도입이 어려워졌다.
[석유 공급 권리증? 그게 어떤 뜻이지?]
[그 권리증을 가져오는 기업에는 석유 공급 제한을 풀어 주시길 바랍니다. 사우디에서만이라도.]
석유 공급 제한 덕분에 국내 원유 도입 가격이 벌써 세 배 가까이 올랐다.
박정환 대통령이 야심 차게 준비했던 중화학 육성 정책이 자칫 실패할 지경이다.
심지어 73년 3.2%에 달하던 물가상승률이 74년과 75년에 걸쳐서 연 25%로 폭등한다.
한국은 지금 석유를 구하려고 모두 안달이 나 있는 상태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태수가 가지고 있는 석유 1억 배럴이면 엄청난 돈을 만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돈을 일부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권리증을?
태수가 이걸 원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박정환 대통령과 한청호는 끈끈한 커넥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참에 둘 사이를 좀 흔들어 두고 싶어서 말입니다.]
칼리드는 태수의 뜻을 알아들었다.
[박정환이 나서서 죽어 가는 청일 정유를 도로 살려 놓을 것이란 뜻이군.]
[그가 청일 정유를 버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마음을 돌릴 이유가 필요한 법이죠.]
그런 이유라면 못 줄 것도 없지.
[좋다. 권리증이란 걸 내어 주겠다. 그걸 가져오는 자에겐 석유를 공급해 주지.]
하지만 조건이 붙었다.
[하지만 기간은 6개월, 다섯 개 회사만 허락하겠다. 더구나 석유를 들여와 다른 곳에 되파는 것이 발각되면 석유 공급을 중지하겠다.]
[감사합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칼리드에게도 국왕과 협상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이것을 한국으로 가지고 가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
태수가 여유롭게 웃을 수 있는 이유였다.
태수는 칼리드에게 허리를 굽혔다.
[한 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게 뭐지?]
[칼리드 님이 박정환에게 편지 한 통만 써 주시길 바랍니다.]
[편지?]
[사우디는 남한과 단독 수교를 맺고 있는 나라입니다. 박정환 대통령은 사우디와 든든한 우방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칼리드 님께서 박정환에게 선물을 하나 보내면 어떨까 해서 말입니다. 선물은 이것이면 족할 겁니다.]
태수는 품속에서 찢어진 공책 한 장을 건넸다.
한글로 쓰인 문서였다.
[이것이 무엇이지?]
[지난번에 잡았던 한청호의 비서가 토해 낸 물건입니다.]
칼리드가 큰 소리로 웃었다.
[박정환 대통령 손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 물건인가?]
[한청호가 식겁할 테지요.]
[왜 이것 한 장뿐인가? 나머지는 다 어디 가고?]
[애석하게도 이것 한 장뿐입니다.]
사실은 더 있다.
하지만 한 번에 전부 공개하면 득보다 실이 많다.
‘원래 바닥을 알 수 없어야 두려움이 생기는 법이지.’
박정환은 고민하게 될 것이다.
어디까지 문제가 생겼는지 이걸 어떻게 막을지.
‘이번엔 박정환을 흔들어 놓는 것으로 족해.’
한청호와 박정환의 끈끈한 사이에 틈을 벌리는 것이 목적이다.
정경유착은 그것만으로도 골치 아프니까.
[박정환이라면 예민하고, 포악한 성정을 갖고 있지. 그 물건만으로도 자네는 뜻을 이루게 될 것이야.]
예민하기 때문에 의심이 깊어지고, 포악하기 때문에 행동력이 강하다.
칼리드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한청호가 이번에 박정환의 미움을 좀 사겠는데?]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런 일이라면 기꺼이 해 주지. 편지 따윈 두 통이라도 써 줄 수 있어.]
칼리드가 허락했다.
[이왕 쓰는 김에 자네에게 준 권리도 문서로 만들어 주겠네. 사우디 왕실 인장을 받아 줄 테니 잠시만 기다려라.]
칼리드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응접실을 나갔다.
참으로 든든한 뒷모습이었다.
‘이제 한국으로 간다.’
박정환 대통령을 만날 시간이다.
* * *
청와대에 한청호가 찾아왔다.
사과 박스 두 상자를 직접 들고서.
비서실장 김정림이 난처하게 말했다.
“각하께서는 지금 무척 바쁘십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연말이라 일이 많습니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세요.”
“기다리겠습니다. 각하께서 만나만 주신다면 이대로 날이 새도 좋습니다.”
한청호는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품에서 두둑한 봉투를 김정림에게 내밀었다.
김정림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만큼은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각하께 말을 안 꺼내 본 줄 아십니까?”
박정환이 만나지 않겠다고 언질을 해 놨다는 뜻이다.
“부탁 좀 드립시다. 다른 건 안 바랍니다. 각하 얼굴 한 번만 뵐 수 있도록 해 주십시다. 설득은 내 알아서 하리다. 뒤탈 없이.”
한청호가 억지로 김정림의 손에 봉투를 쥐여 준다.
잠시 말이 없던 김정림.
그가 작게 말했다.
“지금 집무실에 계십니다. 전 모르는 일입니다. 일이 바빠서 이만.”
“감사합니다.”
김정림은 서둘러 복도를 지나갔다.
박정환이 알면 경을 칠 것이기에 김정림의 걸음은 빨랐다.
한청호는 그 길로 사과 박스를 들고 집무실로 달려갔다.
똑똑.
“들어와.”
문을 열고 한청호가 들어오는 게 아닌가.
박정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누가 자넬 들여보냈어?”
“각하, 도와주십시오.”
한청호가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그 모습을 박정환은 책상에 앉은 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청일 정유를 살려 주십시오.”
10분이 넘도록 침묵만이 흘렀다.
데엥-
집무실 괘종시계가 울었다.
마침내 박정환이 입을 열었다.
“청일 정유가 왜?”
“각하께서도 아시잖습니까? 중동 산유국에서 석유 수출 제한을 내 거는 바람에 발이 묶였습니다. 이 위기만 넘기면 됩니다.”
“지금 자네만 힘든가?”
다들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어떻게든 석유를 구해 오고 있다.
하지만 청일 정유만 무능하게 석유를 구하지 못한다.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가.
“사우디 왕실과 오해가 좀 있어서 그런 겁니다. 제가 다 해결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때까지 각하께서 절 좀 도와주십시오.”
박정환은 코웃음 쳤다.
“삼원 건설 공사 때문에 사우디 왕실에서 항의 서한이 왔을 때 자넨 어찌했지?”
나 몰라라 모른 척했다.
폭탄 떠넘기듯 관료들을 부추겨 청일의 방패막이로 세웠다.
그래서 곤란해진 건 박정환이었다.
박정환은 그것을 꼬집었다.
“자업자득이야. 자기가 뿌린 씨앗은 자기가 해결해야지.”
“각하, 그건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삼원 건설과 청일 정유를 같이 놓고 볼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사실 한청호와 삼원 건설은 관계가 없다.
박정환도 그걸 알기에 사과 박스를 받고 한청호의 모른 척을 묵인해 줬던 게 아닌가.
“자네 일은 자네가 알아서 해.”
박정환이 결재 서류에 눈을 돌린다.
한청호는 재빨리 다가간다.
“오해는 풀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각하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을 이렇게 허공에 버릴 셈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