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대통령과 담판 짓다(1)
태수는 한복 입은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심부름.”
그는 여전히 장말동의 수하인 척 시치미를 뗀다.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한국 상황이 궁금했습니다.”
호의는 호의로, 악의는 악의로.
시치미는 시치미로 응해 주는 태수다.
‘안정우, 끝까지 정체를 숨길 작정이군. 그렇다면 나 역시 모른 척해 줘야지.’
태수는 처음부터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태수가 입사하기 전에 8.3 사채 동결 조치로 파산하여 사라진 장말동은 청일 그룹 문서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이자는 다르다.
‘내 손으로 직접 잡아 안기부에 보낸 한청호의 남자였는데. 처음엔 얼굴을 뒤덮은 화상이 없어서 못 알아봤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어.’
목소리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안정우.
혈통 깊은 독립 운동가 집안의 사람으로, 신분을 감춘 무기 상인의 실세다.
평생 음지에서 움직이며 친일 세력 척결에 앞장선 남자다.
‘인생은 참 알 수가 없어. 전생의 적과 이번엔 동맹이 되다니. 같이 한청호를 상대하기 위해서.’
태수의 행보에 따라 미래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
‘내가 장말동에게 8.3 사채 동결 조치를 알려 줬기에 파산했어야 할 장말동은 양지로 나와 장수 은행을 세웠다.’
전생과 달리 장말동은 살아남아 태수의 우군이 되어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중동 전쟁에서 화상을 크게 입었어야 할 남자는 이렇게 멀쩡하게 사우디에 왔다.’
전생에 8.3 사채 동결 조치로 그들은 자금 대부분을 잃었다.
그래서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중동 전쟁에 사활을 걸었다.
아예 휘하에 있던 부하들을 거느리고 용병으로 참전했던 것이다.
그 결과 같이 참전했던 부하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얼굴도 잃었다.
‘하지만 이번엔 사우디까지 무기 유통을 늘린 터라 용병으로 참전할 필요가 없었지. 더구나 휘하의 부하들은 내가 용역 회사를 차리도록 하여 사우디에 데려왔고.’
덕분에 도로 공사 인부로 잘 써먹고 있다.
안정우는 말했다.
“어르신이 전하라는 것이다.”
안정우는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장말동의 편지였다.
<우수 고객을 연결해 주어 매우 고맙네. 덕분에 큰돈을 벌었어.>
은밀하게 전쟁 준비한 터라 군수 물자를 독점했다.
언제나 독점은 짭짤한 법이다.
<석유 회사 주식 단기 투자로 용돈 짭짤하게 벌었어. 좋은 정보를 미리 알려 줘서 고맙다.>
최무룡을 잡기 위해서 짜고 친 고스톱이었다.
하지만 유럽 석유 회사는 그동안 정말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장말동은 제법 투자 수익을 보았다.
<최무룡을 궁지에 몰아넣는 데 성공했어. 침몰하는 배에 쥐새끼를 태웠지.>
반가운 소식이었다.
“잘됐군요. 최무룡이 걸려들다니.”
최무룡은 의심이 많은 인간이었다.
하지만 결국 제 의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놈은 제법 큰돈을 잃었어. 이번 전쟁으로 워낙 폭락에 폭락을 거듭하는 바람에 피해가 커. 은행까지 어려워질 정도라고 해.>
한청호의 돈줄이 될 최무룡이다.
최무룡이 쓰러지면 한청호도 휘청거릴 것이다.
“장말동 어르신이 냉큼 잡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은행이 어려워졌군요.”
안정우는 뜻밖에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
뜻밖이었다.
태수의 고개가 안정우를 향해 돌아갔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구사일생(九死一生). 운이 좋았다.”
단순히 운이 좋은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한수가 미국에서, 시장 바닥에서 뛰어다니며 판을 만들었다.
거기에 장말동이 움직였다.
정보 상인들이 바람을 잡고, 장말동이 주식 투자하는 것까지 보여 줬다.
“최무룡이 어떻게 빠져나왔습니까?”
“변수 때문에.”
대체 무슨 변수가 있었기에 침몰하는 배에서 빠져나올 정도란 말인가.
초명 은행이 휘청일 정도가 아니라 어려운 정도로 그치게 만든, 그 변수는 무엇인가.
“청일의 한청호.”
“한청호가 이번 일을 눈치챘단 말입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면 한청호가 어떻게 거기에 끼어든 겁니까?”
“급하게 달러가 많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이제 알겠다.
사우디 재경부 장관과 건설부 장관을 매수하려고.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내려고.
“초명 은행을 닦달해서 달러를 토해 내게 했군요.”
“그래.”
“초명 은행 최무룡이 달러를 순순히 주었습니까? 석유 회사 주식에 눈이 벌게져 있었을 텐데요.”
“청일 정유의 주식을 담보 잡혔다.”
태수와 금산의 장준용이 계획한 이간책이 최무룡을 살렸다.
은행이 어려워졌지만 숨은 붙어 있게 되었다.
* * *
청일 정유 사장실은 쑥대밭이 되었다.
청일 그룹 총수인 한청호 회장이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한청호 회장이 고함을 질렀다.
“석유 공급 계약은 왜 아직 소식이 없어! 리비아까지 갔다 왔다는 놈이 왜 빈손이야!”
“죄송합니다.”
“지금 석유가 없어서 공장이 멈추게 생긴 마당이야! 어떻게든 받아 와! 어디서든 구해 와!
“사장님, 지금 산유국이 단체로 석유 수출 금지를 천명한 탓에······.”
“그러니까 자네가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석유를 구해야 할 것 아닌가! 전 세계가 지금 똑같아! 석유 없다고 이 난린데, 손 놓고 있을 거야?
중동 전역을 돌았다.
그런데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 청일 정유엔 석유를 안 판다고 한다.
“뭣 하고 있어? 지금 한국에는 왜 돌아왔어? 사장 자리 내놓기 싫으면 당장 나가!
“······.”
청일 정유 사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뇌물을 갖다 바쳐도, 로비스트를 부추겨도 소용없다. 중동 산유국이 절대 청일 정유에는 석유를 안 판다는데 내가 다시 간들 무슨 의미가 있나.’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중동 산유국에 청일 정유가 단단히 찍힌 걸까.
청일 정유 사장은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미국과 소련 쪽을 알아봐야 하나? 브루나이를 뚫어 봐? 바레인조차 금산에만 석유를 팔겠다는데······.’
청일 정유 사장의 고심이 깊어진다.
“석유 공급 계약서 받아 오기 전까진 서울에 올 생각하지 마! 거기서 뼈를 묻는 한이 있더라도 석유 공급 계약서부터 가져와!”
“회장님, 어렵습니다. 제 힘으로는 도무지······.”
“듣기 싫어! 당장 공항으로 출발해!”
한청호가 뒷말은 듣지도 않고 청일 정유 사장실을 박차고 나왔다.
한청호의 뒤를 따라 박 비서가 나왔다.
“회장님, 청일 정유 주가가 연일 폭락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빨리 무슨 수를 써야 취해야 합니다.”
“칼리드, 이 퇴물이 중동 전쟁으로 날개를 달았구나.”
이빨 빠진 호랑이였던 자가 운이 좋아도 너무 좋다.
한청호는 이를 갈았다.
청일 정유가 위태롭다.
“초명 은행에 내가 지금 간다고 연락 넣어.”
최무룡을 만나야겠다.
* * *
안정우에게서 한국 상황을 전해 들었다.
태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청일 정유를 잡아먹을 생각인가.”
태수의 속을 꿰뚫고 있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왜 하필 청일 정유지? 한청호의 그룹 계열사들은 많고 많은데.”
“한청호가 중동의 일곱 개 산유국에서 석유를 구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사우디 국방부 장관인 칼리드가 실권을 틀어잡으면서 약속을 지켰다.
“역시, 자네 솜씨였군.”
“제가 중동 산유국, 그것도 일곱 개 나라 나 움직일 능력이 있다고 보십니까?”
시치미는 시치미로.
태수는 일부러 겸손을 떨었다.
“자업자득입니다. 한청호가 사우디의 높은 사람과 척을 졌다고 하더군요.”
“자네가 사우디 국방부 장관을 움직인 걸 알아. 나까지 속일 필요는 없어.”
정보 상인도 겸하는 안정우가 아닌가.
게다가 무기 상인으로 중동 전쟁에 깊숙이 발을 뻗은 자다.
이번 전쟁으로 보고 들은 게 꽤 된다.
‘예리한 남자군. 나와 사우디 국방부 장관 사이에 있었던 모종의 밀약을 알 수는 없었을 텐데.’
하지만 안정우는 단숨에 인과 관계를 눈치챘다.
‘무뚝뚝하면서도 강단이 있어. 군인과도 다르고 정치인과도 달라.’
전생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태수가 함정을 파서 그를 사로잡았을 뿐이다.
“청일 정유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기회를 잡고 싶은 건 모두 똑같은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청일 정유를 흔들어서 무엇하려고?”
“쫄딱 망하게 하려고요.”
목표가 확실하다.
마음에 든다.
안정우는 웃었다.
“자네는 무엇을 원하나? 앙갚음? 이권? 돈? 자존심?”
“모두 가질 생각입니다. 도와주실 겁니까?”
“글쎄.”
일부러 말을 흐리는 안정우.
그는 흥미로운 눈으로 태수를 보고 있었다.
“왜 우리와 동맹을 맺었지?”
한청호와 척졌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태수와 같은 적을 가졌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전 한청호의 청일 그룹을 박살 낼 생각입니다.”
“왜 하필 한청호의 청일 그룹인가?”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진짜 이유다.
“한청호와는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라고만 알아 두십시오. 지금쯤 제 뒷배가 누구신지 잘 아실 테니 긴말은 않겠습니다.”
안정우는 차마 모른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정보 상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태수에게 뒷배 따윈 없다.
미래 정보가 뒷배고, 전생의 원한이 이유다.
“두 번째, 저는 한청호와 같은 친일파가 득세하여 제 배만 불리는 것을 못 보겠습니다.”
이것은 안정우의 이유다.
태수가 그를 흔들기 위해 굳이 언급하는 명분이다.
“광복을 맞아 대한민국은 독립했죠. 하지만 친일 청산은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그래, 한청호는 친일에 앞장선 대가를 치러야 해.”
안정우가 기를 쓰고 음지에서 움직이는 이유, 그를 지탱하는 신념을 태수가 말한다.
안정우는 겉으론 태연한 기색을 가장했다.
하지만 그는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한청호와 맞서는 자네의 각오.”
태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청호와 맞섰다.
험로인 줄 알면서도 피해 돌아가지 않았다.
“인정하겠다.”
안정우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이 있다.”
“뭡니까?”
“내가 가진 청일 정유 주식, 11%를 모두 주겠다.”
안정우는 확신하고 있었다.
태수가 절대로 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리라.
태수는 청일 정유를 노리고 있으니까.
“대신 조건이 있다.”
“뭡니까?”
“내 딸의 후견인이 되어 주게.”
뜻밖의 조건이었다.
“혹시 결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이미 자네가 거절하지 않았나? 말 그대로 후견인이야.”
그는 딱 잘라 말했다.
“장말동은 너무 늙었어.”
태수는 피식 웃었다.
“모시는 어르신을 그렇게 이름으로 막 불러도 됩니까?”
안정우는 코웃음 쳤다.
“의뭉 떨지 말게. 자네가 모를 거란 생각은 안 하니까.”
“알고 계셨습니까?”
“그러니 내가 직접 자네를 만나러 온 거야.”
안정우는 태수를 똑바로 보았다.
“청일 정유를 먹고 싶다면 내 손을 잡게.”
안정우의 손에는 청일 정유 주식 11%가 있다.
“우리는 동맹이 아닌가.”
“내민 손은 거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동맹이니까요.”
태수는 안정우의 손을 꽉 잡았다.
하지만 뒷말은 달랐다.
“하지만 청일 정유의 주식은 필요 없습니다.”
태수의 손을 잡고 있는 안정우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어쩔 셈인가? 내 주식 없이는 청일 정유를 먹기 힘들 텐데?”
“거래 대상이 틀렸습니다.”
태수 역시 아버지였다.
그래서 받을 수 없었다.
“따님에게 필요한 건 후견인이 아닙니다. 아버지지.”
태수는 웃었다.
“무엇을 계획하는지 압니다. 그래서 따님 걱정에 절 찾아 사우디까지 오셨겠죠.”
안정우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위험한 일은 그만두십시오. 문세기를 만나서 들쑤시는 것도 그만하시죠.”
안정우는 박정환 대통령 암살을 계획하고 있었다.
1974년 8월 15일.
서울 국립 극장에서 열린 경축식을 이용해 암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암살은 실패하고, 박정환 대신 영부인이 피살된다.
주모자는 문세기.
하지만 배후에 이 남자가 있었다는 게 훗날 밝혀졌다.
“알고 있었나?”
“제 뒷배의 정보력이 대단하잖습니까. 그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으음.”
안정우는 눈을 감았다.
안보가 생명인 일이 계획 초기부터 들통났으니 추진하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할 것이다.
안정우는 감았던 눈을 떠 태수를 보았다.
“들통 난 계획은 폐기하지. 이번 정보값은 내 다른 것으로 갚겠네.”
어차피 이번 암살 계획은 실패한다.
위험을 일부러 자초할 필요는 없을 터다.
“하지만 후견인 제안은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군.”
“따님을 생각하신다면 이참에 위험한 일은 그만두시는 게 어떻습니까?”
딸이 마음에 걸리는 건 사실이지만 대업에 비할 바는 아니다.
“자네는 계속 사우디에 남아 공사를 계속할 건가? 이대로는 청일 정유를 제대로 흔들기 힘들 텐데.”
“안 그래도 한국에 들어가 보려던 참입니다.”
태수는 고개를 들어 한국 방향을 바라보았다.
“박정환을 만나 담판 지을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들려야 할 곳이 있다.
사우디 국방부 장관 칼리드를 만나 부탁할 일이 있다.
“전 나중에 따로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가시죠.”
태수는 씩 웃었다.
“한국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그러지.”
안정우는 등을 돌렸다.
‘확실히 만만치 않구나.’
확신했던 제안은 통하지 않았다.
반면 태수의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능성 없는 무모한 일을 무리하게 추진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재밌겠군.’
강태수가 한청호의 청일 정유를 어떻게 빼앗아 올지 기대가 된다.
몇 걸음 걷다 말고 안정우가 말했다.
여전히 등을 돌린 채였다.
“한청호는 최무룡을 찾아갈 거야.”
아마도 그럴 것이다.
“조만간 아주 재밌는 일이 벌어질 거야.”
“재밌는 일이요?”
“자네가 이번에 둘 사이를 제대로 이간질해 놓지 않았나?”
태수가 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안정우는 태수가 한 일이라고 못 박고 있었다.
‘내가 한청호와 최무룡 사이를 제대로 이간질해 놨다고?’
어쩌다 일이 그렇게 흘러갔는지 태수가 궁금할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