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76화 (76/230)

76. 그녀의 소원(2)

무희가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당신은 아이 생각이 없잖아요.]

그건 사실이었다.

태수는 아직 전생의 아이들을 잊지 못했다.

그 아이들이 마음에 걸려서, 눈에 밟혀서.

아직 다른 아이를 품에 안을 결심은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당신을 설득할 마음도 없어요. 실은 저도 자신이 없거든요. 외국인 아내라고, 외국인의 아이라고 손가락질받을까 봐 무서워요.]

국제결혼이 흔치 않을 때다.

사우디에선 더욱 그럴 것이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외국인 아이를 보는 시선은 더욱 곱지 않다.

[당신을 정말 많이 좋아하지만 우리의 끝은 정해져 있어요. 그래서 떠나기로 결심한 거예요.]

그녀의 턱을 타고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를 안고 있는 태수의 손등 위에 닿는다.

태수는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국제결혼, 외국인의 아이, 이런 문제라면 내 곁에서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봅시다. 당신도 나도 각오가 필요한 일이니까.]

그녀는 눈물 번진 눈으로 웃었다.

[당신도 알고 있군요. 우리의 사랑은 각오가 필요한 어려운 사랑이라는 거.]

[각오 없이, 결심 없이 이뤄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을 택했을 때 끝은 각오했어요. 내 사랑의 대가는 내가 치러야죠.]

[사랑의 대가라면 나도 함께 치르면 됩니다. 그게 무엇이든.]

[하지만 그 대가를 내 아이가 치르게 할 수는 없어요.]

사랑은 환상이다.

하지만 아이는 현실이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눈물을 쏟아 낸다.

[이런 제가 밉나요? 이해할 수 없으시겠죠?]

태수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뇨, 이해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바보 같죠? 열심히 고민해서 결국 이런 못난 결정을 내렸으니까요.]

[당신이 심사숙고해서 그렇게 결정했다면······.]

태수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난 당신의 결정을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무희가 태수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해 줄 줄 알았어요. 늘 제 뜻을 존중해 주시니까요.]

그녀가 눈물 젖은 눈을 감았다.

태수의 품은 따뜻했다.

[우리가 함께하는 마지막 시간이에요.]

-당신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그녀의 소원이었다.

* * *

사우디 공항의 화장실.

송 비서의 딸은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남자 양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송 비서의 아내가 깜짝 놀라 외쳤다.

“왜 남장을 했어? 예쁜 아이가 이게 무슨 꼴이니?”

“엄마, 조용히 해요. 외국 여자 둘이 나돌아다니다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하라고요.”

일부러 목소리를 굵게 내는 송 비서의 딸.

그녀가 엄마의 손을 잡고 트렁크를 끌었다.

“공항을 나가면 엄마는 이곳 아줌마 복장을 하고, 얼굴을 가릴 천을 써요.”

송 비서의 딸이 극도로 주위를 경계하며 걸음을 서두른다.

“여긴 히잡, 차도르, 아바야, 부르카 중에 어떤 것을 쓰는지 모르니까 현지 상인에게 추천받은 것으로 써요. 외국인이라는 것을 모르게.”

“왜 이렇게 겁을 내는 거니? 지금 네 아버지는 그런 끔찍한······.”

“아빠는 살아 있다고 말했잖아요. 아빠를 찾으려면 굉장히 어려울 거예요. 사막까지 뒤져야 할지도 몰라요.”

“어쩌려고 이래. 응?”

“먼저 아빠가 투숙했던 호텔에 가 볼 생각이에요. 아빠라면 동선을 남겨 놨을 거예요.”

그때였다.

목소리 굵은 남자가 영어로 물었다.

[한국에서 오셨습니까?]

[잘못 보셨어요. 우린 일본인이에요.]

송 비서의 딸은 시치미를 뗐다.

하지만 남자는 송 비서의 편지를 갖고 있었다.

한글 편지였다.

<엄마랑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이 사람을 따라 아빠가 있는 곳으로 와. 기다리고 있으마.>

송 비서가 남긴 암호를 확인했다.

그제야 송 비서의 딸은 허리를 굽혔다.

[잘 부탁드립니다.]

* * *

-당신을 위해 만들어 봤어요.

그녀는 이별 선물로 태수에게 손수건을 선물했다.

베두인족 옷감에 색실로 수를 놓았다.

태수는 손수건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여태 그녀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당신의 무희가>

그녀는 끝내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다.

태수의 마음속에 그녀는 영원히 아름다운 무희로 기억되리라.

“여기서 뭐 하십니까?”

송 비서였다.

태수는 만지작거리던 손수건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잠깐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상당히 심란한 표정이군요. 일이 많이 복잡하십니까?”

태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송 비서가 태수에게 여러 권의 공책을 건넸다.

한국에서 아내와 딸이 가져온 공책이었다.

“이게 뭡니까?”

“목숨값이죠. 한청호에게 던질 폭탄입니다.”

한청호의 비리를 적은 장부다.

몇 권이나 되는 장부는 청일 그룹 계열사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태수는 급하게 촤라락 책장을 넘기며 봤다.

“듬성듬성하군요.”

“그걸 한눈에 파악하셨습니까?”

송 비서가 뜨악한 얼굴로 태수를 본다.

태수가 전생에서 계열사 장부를 오죽 많이 봤겠나.

더구나 장부 작성하는 법이랑 장부 보는 법도 송 비서에게 직접 배웠다.

익숙한 장부, 익숙한 품목, 익숙한 배열이란 뜻이다.

“제가 관여한 것 중에서 문제 되는 부분만 따로 발췌해 적어 둔 겁니다.”

비리, 횡령, 뇌물, 탈세, 은닉.

장부는 주로 그런 부분들에 대해 적고 있었다.

태수는 장부를 넘겨보다가 이상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 이렇게 빨간색 엑스(X) 표시가 된 것들은 뭡니까? 자주 나오던데요.”

“아, 그거요? 한청호가 매매, 증여, 수여, 혹은 증거 인멸을 완료한 겁니다.”

송 비서는 한청호가 꼬리를 잘라 버린 일, 관련 증거 자료를 폐기한 것 등은 그렇게 표시해 두었다.

태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한청호가 틈틈이 증거를 인멸하는가 보군요.”

송 비서의 눈이 격하게 흔들린다.

태수는 눈치챘다.

“송 비서님이 인멸한 것도 꽤 되나 보죠?”

“···위에서 까라면 까야죠. 살려면 별수 있나요. 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요.”

그게 송 비서가 한청호 밑에서 28년이나 버틸 수 있는 비결이었다.

송 비서가 한숨을 푹 쉰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치켜든다.

“어쩔 수 없이 제 손을 떠난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제 손으로 폐기하게 되는 경우엔 따로 모아 놨어요. 그것도 제법 됩니다.”

그렇기에 만들어진 한청호의 치부책일 것이다.

“보아하니 한청호가 다른 사람을 시켜서 폐기한 증거도 꽤 되겠군요.”

“거기 세모 표시한 게 그러리라 짐작되는 일들입니다. 박 비서와 안 비서가 하는 걸 몰래 모아 놓은 거죠.”

세모 표시도 꽤 된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한청호에게 엿 먹일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하군요.”

한청호가 곳곳에 뇌물을 잔뜩 뿌려 놨다.

이 정도라면 위에서 눈감아 줄 것이 분명하다.

“역시 이걸로는 저와 제 가족의 목숨값을 사기엔 많이 부족하지요?”

“충분합니다. 제가 어떻게 써먹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니까요.”

부족할 텐데······.

송 비서는 태수를 물끄러미 보았다.

호의가 가득한 눈이었다.

“이대로 절 놔주신다고요?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가족들을 만났으니 이제 행복하게 사셔야죠. 족쇄는 풀렸습니다. 자유롭게 떠나셔도 좋습니다.”

이러니 떠날 수가 있나.

“강태수 씨 옆에서 조금 더 머물고 싶습니다.”

뜻밖이었다.

“아직 갚아야 할 은혜가 많습니다. 한청호를 박살 내는 데 한 힘 보태고 싶습니다.”

송 비서는 품에서 책 한 권을 더 꺼냈다.

태수에게 주려고 가져온 것이었다.

“이건 가장 큰 무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물건입니다.”

앞서 내놨던 장부들과는 차원이 다른 한청호의 치부책이다.

“이건······!”

태수가 눈을 부릅떴다.

책장을 넘기는 태수의 손길이 급하다.

태수는 마지막 한 장까지 전부 보고는 눈을 감았다.

“확실히. 한청호를 한 방에 보낼 수 있겠군요.”

“이걸 쓰면 당신도 위험합니다. 이건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되는 문서예요.”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걸 제대로 쓰려면 태수 역시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다.

하지만 그만큼 파괴력이 막강한 무기였다.

“신중하게 쓰겠습니다.”

기회를 노리고 판을 제대로 짜야 한다.

한청호만 골라서 진창에 빠뜨려야 한다.

‘아직은 이걸 쓸 때가 아니다.’

이걸 제대로 쓰려면 준비할 게 꽤 많아질 것 같다.

“딱 한 방. 그거면 됩니다.”

죽으려면 한청호만 죽어야지.

청일을 잡는다고 태수까지 얽혀선 안 될 일이다.

* * *

무희가 떠나고 태수는 공사에만 집중했다.

1973년 6월 22일.

한국에선 남해 대교가 개통되었다.

같은 날 사우디에선 태수의 카이바-알룰라 고속 도로 공사 단독 입찰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인 6월 23일.

박정환 대통령은 내정 불간섭, 남북 유엔 동시 가입 등을 제안한 ‘6.23 평화 통일 선언’을 발표했다.

같은 날 카이바-알룰라 고속 도로 공사 입찰이 마감되었다.

태수는 수월하게 카이바-알룰라 고속 도로 공사를 따게 되었다.

전생에선 2,405만 9천 달러의 공사였는데, 이번엔 3,500만 달러로 금액의 훌쩍 뛰었다.

라흐만의 선물이었다.

며칠 뒤 포항 철강에서 초대장이 날아왔다.

<부디 포항 철강 준공식에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 주지 않겠나?>

행사 예정일은 1973년 7월 3일.

포항 철강이 준공되어 우리나라 제철보국의 첫발을 내디딘다.

사우디 대사는 포항 철강 준공식 초대장을 받고 뛸 듯이 기뻐했다.

“만세! 드디어 사우디를 벗어날 수 있게 됐어!”

태수에게도 포항 철강 준공식 초대장이 도착했다.

하지만 태수는 공사를 이유로 참석을 정중히 거절했다.

사우디 대사의 심복인 2등 서기관 송창준에게 대사는 함께 귀국하자는 뜻을 전했다.

“죄송합니다. 전 사우디에 좀 더 남겠습니다. 공사를 도와 할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송창준은 귀국을 거절했다.

외무부에 사표를 내지 않고 남아서 태수의 도움이 되길 자처했다.

송창준과 홀쭉이는 송 비서의 가르침 아래에 착실하게 일을 익히고 있었다.

“제법이야. 확실히 이 두 사람 재능이 있어. 훌륭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송 비서의 칭찬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신문과 방송은 연일 중동 전쟁에 대해 떠들었다.

-1973년 10월 6일! 제4차 중동 전쟁이 발발했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손을 잡고 이스라엘을 향해 전면적인 기습 공격을 개시했다!

-유대교의 안식일인 ‘욤키푸르’의 날! 휴가 간 군인들로 인해 이스라엘 피해가 심각하다!

그리고 10월 17일.

서방 세계의 이스라엘 지원에 격분한 아랍의 일곱 개 산유국이 성명을 내걸었다.

전생엔 OPEC의 리비아, 이라크, 이란, 이집트, 시리아, 튀니지까지 총 여섯 개 국가였는데, 이번엔 사우디가 합세해 총 일곱 개국으로 바뀌었다.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서방 국가들에 대해 석유 수출 금지 조치를 내리겠다!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국가의 석유 회사를 전부 추방한다!

산유국들은 손을 잡고 서구 유럽의 석유 회사를 내쫓았다.

‘석유의 무기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 파장은 대단했다.

신문과 방송은 이를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유럽의 석유 회사 주가가 연일 폭락하고 있습니다!

-석유 회사 주가 폭락으로 인해 파생된 다른 석유 기반 산업 주식 역시 급락을 거듭합니다!

-산유국의 수입 금지 조치로 인해 석유 가격은 연일 폭등합니다!

세계 제1차 오일 쇼크가 터진 것이다.

전 세계가 중동 전쟁의 여파로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며칠 뒤. 1973년 10월 26일.

-중동 전쟁은 끝났다!

-이스라엘은 대반격으로 간신히 아랍 연합군을 격퇴했다!

이스라엘은 국가 안보의 취약점을 노출했고, 손실이 매우 컸다.

이스라엘을 지원했던 서방 세력들은 석유를 빼앗겼다.

그렇게 서방 국가들의 헐값 석유로 인한 자본주의 황금기는 막을 내렸다.

세계적인 대격변이 시작된 것이다.

그 변화를 타고 사우디 왕실 세력 구도 역시 대격변을 맞이했다.

<중동 전쟁을 통해 왕실 최고 실세로 급부상한 사우디 국방부 장관 칼리드, 그는 누구인가!>

중동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몸을 수그린 채 웅크리고 있던 거물이 기지개를 켰다.

재경부 장관과 건설부 장관의 세력 암투로 인한 분열을 수습하고, 그가 왕실을 장악했다.

그의 오른팔이던 국방부 방위군 사령관이던 압둘라는 승진하여 산업부 장관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칼리드의 아들인 라흐만은 병참 기지 건설 및 보급의 군공을 세워 동쪽 도시 개발 담당자로 승진했다.

[이게 다 자네 덕분이야. 압둘라가 산업부 장관, 라흐만이 동쪽 도시 개발 담당자가 되었으니 주베일 산업항 공사에 힘을 실을 수 있게 되었어.]

칼리드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청일 정유에는 석유 단 1리터도 팔지 않아. 중동 산유국 일곱 개 나라 전부.]

그로 인해 청일 그룹이 발칵 뒤집혔다.

금산의 장준용이 한청호 앞에서 금산은 사우디와 바레인에서 석유를 잘 받고 있어서 끄떡없다고 약 올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드디어 끝났군.”

12월 1일. 카이바-알룰라 고속 도로 공사를 착수했다.

12월 3일에 얌부-움라지 고속 도로 공사를 끝냈다.

라흐만과의 내기에서 태수가 승리했다.

이런저런 석유 정산을 모두 끝내자 태수 앞으로 떨어진 석유는 무려 6천만 배럴!

그런 태수 앞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잘 지냈나? 오랜만에 보는군.”

장말동의 집에서 본 한복 입은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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