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그녀의 소원(1)
태수의 발걸음이 우뚝 섰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부족 사람이 아닌데 어째서 전쟁이 났는데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태 이곳에 남았습니까?]
[귀인께선 모르셨군요. 지난번 싸움으로 내 아들, 그러니까 그녀의 남편으로 내정되었던 남자가 죽었어요.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이런 일이 생긴 거지요.]
베두인족의 싸움으로 족장의 아들이 죽었다.
태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부족끼리 맺은 맹약 때문에 그녀는 오도 가도 못하고 중간에 붕 떠 버리게 되었어요. 남편감을 다시 찾는 일도 전쟁이 끝난 후로 미뤄졌지요.]
전쟁이 문제였다.
[우리는 제안했어요. 전쟁이 끝나는 날, 그녀가 직접 남편감을 고르기로.]
설마······.
[하지만 그날 그녀가 택한 남자는 귀인이었죠. 그녀는 귀인을 향해 구애의 춤을 추고, 끈을 주었지요.]
그때 베두인족 사람들이 어째서 태수를 그리 놀렸는지도 이젠 알겠다.
난감해하는 태수에게서 끈을 돌려받던 족장이 떠올랐다.
족장의 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다들 그녀를 아내로 맞고 싶어 해요. 그녀는 젊고 아름답고 매력적이니까요. 그런데 그녀는 사막 전사들의 구애를 전부 거절했어요.]
[마을 남자들의 구애를 전부 거절했다면······.]
[그러니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귀인께서 그녀를 한번 설득해 주면 안 될까요?]
난감한 일이었다.
[예쁜 아이예요. 착하고, 똑똑한 아이랍니다. 좋은 여자, 좋은 아내가 될 아이지요.]
태수도 안다.
그녀는 좋은 여자다.
난감할 때 코를 찡그리는 게 귀여운 여자이기도 하다.
[그녀가 이렇게 돌아가는 게 안타까워요. 우리는 그녀가 우리 부족의 사람이 되어 주길 바라고 있어요.]
어느덧 그녀의 천막 앞에 도달했다.
족장의 부인은 태수에게 말했다.
[그녀는 귀인께는 꽤 호감이 있는 것 같더군요. 떠나지 말라고 한번 잡아 주시면 안 될까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족장의 부인이 무희를 불렀다.
그 소리를 듣고 무희가 천막 밖으로 나왔다.
태수를 보고 무희가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당신이 어떻게······!]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족장의 부인이 태수와 무희의 등을 떠밀었다.
부인이 직접 무희의 천막 문을 닫아 주었다.
그렇게 늦은 밤 천막 안엔 둘만 남았다.
[족장의 부인은 당신이 이 부족을 떠나지 않길 바랍니다.]
무희는 족장의 부인이 왜 태수를 이곳까지 데려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럼 다 들었겠군요.]
[들었습니다.]
[혹시 화가 나셨나요? 내가 당신이 없을 때 몰래 떠나려고 했잖아요.]
[당황했습니다. 왜 떠나려는 겁니까?]
[그건······.]
그녀가 코를 찡그린다.
귀여운 건 변함없지만 지금은 그런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태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마을 남자들의 구애를 전부 거절했다면서요.]
[당신을 두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고 싶진 않았어요.]
그녀가 태수의 손을 마주 잡는다.
태수의 손바닥에 그녀의 뺨을 댄다.
[떠나기 전에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기뻐요. 고마워요.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에요.]
[제가 가지 말라고 잡으면 남아 주시겠습니까?]
[정말이에요? 절 잡아 주신다고요?]
무희가 너무나 기뻐하며 활짝 웃는다.
태수의 품에 와락 달려들면서 태수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녀가 태수의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정말 고마워요. 당신의 그 마음, 절대 잊지 않겠어요.]
하지만 남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떠나기로 마음을 정한 겁니까?]
[네.]
그녀가 희미하게 웃는다.
[당신이 떠나고 깨달았어요. 당신을 두고 다른 남자에겐 갈 수 없었죠. 하지만 당신을 따라 먼 타국까지 갈 용기도 나지 않았어요.]
[그 말은······.]
[그래서 떠나는 거예요. 당신을 마음에 두고 몸은 이 마을에 의탁하는 것, 너무 염치없는 짓이잖아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부족끼리 맹약으로 인해 결혼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
하지만 부족 사람 중에서 남편감을 고르지 않은 이상, 이곳에 계속 남아 있긴 눈치가 보였을 것이다.
[짐은 다 쌌습니까?]
[네. 다 쌌어요.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려면 미리······.]
[어디 있습니까?]
[저기······.]
무희가 천막 한쪽 구석에 싸둔 짐을 가리켰다.
태수가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짐을 번쩍 들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옷 짐이었다.
[그럼 출발합시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곳에 남아 있기 눈치 보여서 떠나는 게 아닙니까? 그러니 나랑 갑시다.]
[이 밤에 어딜 가려고요?]
[내 숙소로.]
태수가 한 손엔 커다란 짐 보따리를 들고, 다른 손엔 무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희가 태수의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저는 고향으로 갈 거예요.]
[그럼 고향까지 내가 데려다드리죠. 하지만 지금은 나와 같이 갑시다.]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린다.
태수가 와락 그 손을 잡았다.
태수는 그녀를 데리고 천막을 나섰다.
천막 밖에는 베두인족 부인이 있었다.
[지금 이게······.]
[설득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녀는 이곳에 남을 수 없다고 하는군요.]
무희가 허리를 굽혀 족장의 부인에게 인사했다.
[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린 대로 저는 이만 떠날 생각이에요.]
[그에게 가는 건가요?]
태수는 무희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무희가 태수를 보며 생긋 웃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베두인족 말로 족장의 부인과 한참이나 대화를 나눈다.
족장의 부인이 안타까운 얼굴로 무희를 꽉 끌어안는다.
영어가 아니라서 태수는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나누는 걸까. 슬퍼 보이는 얼굴인데.’
늦은 시각임에도 주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무희와 작별 인사를 나눈다.
잠시 후 부족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무희는 태수의 차에 올랐다.
태수가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부르릉.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해 사막의 도로를 달렸다.
무희가 말했다.
[숙소 대신 먼저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어요.]
[이 밤에? 어디로 갈까요?]
[독수리 모양의 바위가 있는 곳에 가고 싶어요.]
그곳이라면 소원을 비는 바위가 있었다.
[소원을 하나 더 빌고 싶어요.]
[흠. 말하면 내가 들어줄 텐데.]
[알아요. 그래도 가고 싶어요. 우리의 추억이 가득한 그곳에 다시 가 보고 싶어요.]
[좋습니다.]
태수는 차를 몰아 그곳으로 향했다.
* * *
한청호의 서재.
한청호는 책상에 앉아 눈을 감았다.
책상 위에는 끔찍한 사진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부서진 시계가 하나 있었다.
피가 잔뜩 묻은 그것은 송 비서의 유품이었다.
다음 비행기로 돌아오겠다던 송 비서는 돌아오지 못했다.
“송 비서가 그렇게 갈 줄이야······.”
타자기로 친 짧은 서신.
<내 아들을 잘라 냈을 땐 네 수족을 잃을 각오도 했겠지.>
영어로 쓰였다.
발신인도 모른다.
하지만 한청호는 이걸 누가 보냈는지 잘 안다.
‘사우디 국방부 장관이 내게 억하심정이 많은가 본데.’
라흐만의 손을 끊어 내고 그를 배신했을 때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송 비서를 잃을 줄은 몰랐다.
그놈처럼 쓸 만한 놈은 흔치 않았다.
‘어쩔 수 없지. 한 편으로는 오히려 잘됐구나.’
안 그래도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께름칙하던 차였다.
죽을 날을 받아 놓은 놈이었는데, 이렇게 갈 줄이야.
‘됐다.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사람이야. 그놈만 한 놈이 또 없을까.’
청일 그룹 회장 비서가 되고 싶어서 안달 난 놈들이 어디 한둘이겠나.
이놈만 해도 그렇다.
“박 비서.”
“네.”
서재 책상 옆에는 박 비서가 서 있었다.
송 비서에 밀려서 오랫동안 한청호의 최측근 자리를 얻지 못했다.
때를 기다리며 이를 갈던 남자다.
“송 비서의 가족에게 위로금과 유품을 전달해.”
“알겠습니다.”
“사진은 한 장만 가져가.”
한청호는 책상 위에 있는 사진 중에서 하나를 들어 박 비서에게 주었다.
피투성이가 된 송 비서가 사막에 덩그러니 버려진 사진이었다.
“가족들이 시신은 찾아야 할 것 아냐.”
“알겠습니다.”
한청호의 서재가 닫혔다.
* * *
독수리 바위가 있는 곳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높은 데서 사막을 내려다보니 탁 트인 전경에 속이 시원했다.
태수는 바람을 맞으며 한참이나 사막과 별을 구경했다.
그녀는 지난번처럼 독수리 바위 앞에서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빌었다.
[무슨 소원을 빌었습니까?]
[비밀이에요.]
[무슨 비밀이 이렇게 많습니까?]
[지난번에 말하지 않아서 소원이 이뤄졌거든요.]
[흠. 그럼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독수리 바위가 소원을 전부 들어줄 테니까요.]
그녀가 태수의 품에 살며시 안겨 든다.
[지금 독수리 바위를 질투하시는 거예요?]
[설마 바위를 질투하겠습니까?]
[표정이 영 안 좋으신데요?]
[착각입니다.]
무희가 태수의 입술을 만지작거린다.
태수는 모른 척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입을 꾹 다물면 키스를 못하잖아요.]
무희가 웃으면서 태수의 입술을 삼켰다.
그녀의 키스가 계속되자 어쩔 수 없이 태수의 꾹 다문 입술이 풀렸다.
기분도 그만 스르르 풀렸다.
[내가 원하는 걸 말하면 들어준다고 하셨죠?]
[뭘 들어드릴까요?]
[오늘 밤 숙소로 돌아가지 말아요. 나와 함께 있어 줘요.]
[그거라면 얼마든지 들어드리죠.]
무희가 태수의 옷자락을 벗기며 말했다.
[오늘은 당신과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좋습니다.]
둘은 몸의 대화부터 시작했다.
* * *
송 비서의 집.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입니다.”
박 비서가 내민 유품과 사진을 보고 송 비서의 아내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송 비서의 딸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엄마 대신 그것을 받아들였다.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던 송 비서의 딸.
“사우디라고 했죠? 아빠가 실종된 곳이요.”
“네, 그렇습니다.”
“시신을 찾으러 가겠어요. 고마워요. 이런 걸 가져와 줘서. 회장님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박 비서가 돌아갔다.
송 비서의 딸은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재빨리 제 방으로 달려갔다.
손에는 송 비서의 시계를 든 채였다.
‘아빠는 죽지 않았어. 그러니까 이걸 전해 준 거야.’
송 비서는 언제나 신신당부했다.
-내가 너한테 숫자를 보낼 때는 서둘러라. 위험하다는 뜻이니까.
-아빠는 데리러 못 가. 그러니 네가 엄마를 데리고 도망쳐야 해.
아빠는 숫자를 보내왔다.
송 비서의 딸은 제 방의 옷장을 열었다.
옷장 속에는 비밀 공간이 있다.
아빠는 그곳에 금고를 하나 숨겨 두었다.
‘시계가 멈춘 시각은 10시 27분 53초. 102753.’
금고의 다이얼을 돌렸다.
철컥 소리와 함께 금고가 열렸다.
‘아빠가 가져오라는 게 이거구나!’
공책이 여러 권이다.
숨겨 둔 비상금과 귀중품, 그녀들을 위한 여권까지 들어 있다.
송 비서의 딸은 재빨리 그걸 꺼내었다.
“빨리. 빨리 급해. 서둘러야 해. 위험해.”
딸은 커다란 여행용 트렁크에 꺼낸 것을 담았다.
그 위에 옷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서둘러 엄마의 짐까지 챙겼다.
귀중품 위주로 꽉꽉 눌러 담았다.
“엄마! 빨리 일어나! 공항에 가야 해! 얼른!”
한시가 급하다.
그렇게 그들은 사우디로 향했다.
아버지가 준비한 한청호의 치부책을 가지고.
* * *
타닥타닥.
모닥불이 예쁘게 타오르고 있었다.
태수의 팔을 두르고 앉은 그녀가 모포를 잔뜩 끌어 올렸다.
사막의 밤은 아직도 추웠다.
태수는 그녀를 안고 모포를 함께 둘렀다.
맞닿은 살에서 온기가 전해진다.
그녀는 태수에게 기댄 채 말했다.
[정말 아름다운 밤이에요. 당신과 여기 다시 올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이곳이 그렇게 좋다면 다음에 또 함께 오죠.]
그녀는 행복하게 웃었다.
[당신이 절 잡을 줄은 몰랐어요. 이 밤에 짐 가방을 들고, 마을 사람들 앞에서 당신이 이렇게 제 손을 잡고.]
그녀가 태수의 손에 깍지를 낀다.
베두인족 마을을 나올 때 태수가 했던 것처럼 힘주어 잡았다.
[당신이 그렇게 박력 있게 나올 줄은 몰랐어요.]
[싫었습니까?]
[행복했어요.]
야반도주하는 연인들의 마음이 이럴까?
그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마구 뛰었다.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홍수처럼 터져 나왔으니까.
무희는 제 몸을 감싼 태수의 팔을 매만졌다.
[더 꽉 안아 주세요.]
[춥습니까?]
[아뇨, 당신이 끌어안아 주는 게 기뻐서요.]
태수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녀는 태수의 숨소리를 들으며 눈 감았다.
[당신의 여자가 되고 싶었어요.]
[마음을 나누고 몸을 나눴는데도 아직 부족합니까?]
그녀를 끌어안은 태수의 팔에 힘이 불끈 더해진다.
[당신을 좋아해요.]
그녀의 고백을 태수가 키스로 되돌려 줬다.
깊고 진한 키스였다.
[나도 당신을 좋아합니다.]
[아이를 갖고 싶어요.]
태수가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