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스승과 제자(1)
태수는 가슴속 깊이 송 비서의 말을 새겼다.
그래서 한일권과 한청호의 비밀에 절대 끼어들지 않았다.
한청호가 남긴 치부책의 존재를 알았어도, 절대 궁금해하지 않았다.
한일권의 수상한 점을 눈치챘어도, 절대 들춰 보지 않았다.
‘나는 오래 살아남았다. 그 대신 뼈저린 후회가 남았다.’
가족들이 한일권의 손에 죽어 가는 걸 몰랐다.
경찰 조사 결과를, 의사의 진단 결과를 곧이곧대로 믿었던 게 잘못이었다.
‘그래도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 가증스러운 연기를 믿었다.’
-태수야, 네가 없었으면 난 진즉에 무너졌다. 내 곁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맙다.
-나도 술만 보면 그 녀석 생각이 나. 죽은 홀쭉이가 그립다.
-한수의 아이 태명이 태양이었다며? 한수 부부 납골당에 인형을 넣어 주고 온 참이다. 태양 모양의 인형 말이야.
무려 45년을 동고동락했던 동갑내기 비서와 상사였다.
물론 태수는 그룹 내에서 일을 하고, 경영은 잘 못하는 한일권은 밖으로 나돌아 뇌물을 뿌리며 놀러 다녔다.
‘송 비서님은 알고 계셨다. 한청호가 어떤 자인지, 한일권이 어떤 놈인지.’
그래서 몰래 그런 조언을 해 줬을 테지.
“강태수 씨, 당신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었던 게 하나 있습니다. 당신은 왜 한청호와 맞서는 겁니까? 무모한 싸움을 시작한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중요한 건 이유가 아닙니다. 현재 입장이지.”
“아······!”
송 비서는 바로 납득했다.
“당신이 한청호와 맞서는 입장이라면 전 분명 쓸모가 있을 겁니다.”
송 비서 역시 자신의 현재 입장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내 쓸모를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송 비서는 태수를 보며 똑바로 말했다.
“그러니··· 강태수 씨가 제 목숨을 사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는 여전히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오랫동안 한청호가 데리고 다녔을 것이다.
‘버려지기엔 너무나 아까운 남자였지.’
그는 유능한 사람이었다.
‘송 비서님, 전생과 달리 사우디 장관의 돈 가방 배달을 맡게 되셨군요. 제가 금산의 장준용을 이용해 한청호를 들쑤신 탓일 겁니다.’
덕분에 송 비서의 죽음이 앞당겨진 모양이다.
‘한청호가 조급해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칼리드의 손에 잡혀 죽을 일은 없었을 텐데. 하지만 아직 죽을 때는 아닌 듯합니다. 마침 제가 이곳에 있었으니까요.’
태수는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똑똑하기에 그는 살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마치 호수 위에 떠 있는 우아한 백조처럼 겉으로는 태연하게.
“당신은 한청호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습니다. 아마 목숨을 위협받고 있겠죠.”
“당신은 정말로 한청호를 제대로 알고 있었군요.”
“한청호를 잘 알죠. 하지만 송 비서님만큼 한청호를 제대로 알지는 못합니다.”
“그는··· 추악하고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 아들 한일권도 송 비서님만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는··· 가증스럽고 잔인한 사람입니다.”
송 비서는 진저리쳤다.
송 비서의 반응은 예전에도 같았다.
다만 태수 앞에서 극히 내색하지 않으려고 자제했을 뿐이다.
“강태수 씨, 당신은 내가 왜 이러는지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알고 있겠죠.”
“네, 그래서 이렇게 당신 앞에 나타난 겁니다.”
한청호 부자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 회사 경영에 온 힘을 쏟았던 태수.
태수는 비서 탈을 뒤집어쓴 총수에 가깝지만 송 비서는 말 그대로 수행 비서였다.
아니 비서 탈을 쓴 뒤처리 심부름꾼에 가까웠다.
그만큼 한청호의 더러운 비밀을 많이 알고 있다는 뜻이다.
“제가 강태수 씨가 원하는 것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살려 주십시오.”
“괜찮겠습니까?”
“벼랑 끝이 다가오는 걸 보면서도 가야만 했던 제 심정을 이해하신다면 부디 제게 손 내밀어 주십시오. 당신의 손을 잡고 탈출하고 싶습니다.”
송 비서님이라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그는 언제나 탈출을 꿈꾸던 남자였으니까.
전생에선 끝내 한청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번엔 다르길 바란다.
“당신을 그곳에서 탈출시켜 드리겠습니다. 저를 위해 두 가지 일만 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무엇이든 기꺼이 하겠습니다.”
어느새 칼리드의 부하가 송 비서를 묶었던 끈을 풀어 주었다.
송 비서가 묶였던 곳을 주무르며 물었다.
“가족들이 한국에 있습니다. 그들도 함께 한청호의 손에서 탈출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마침 사우디로 올 구실도 있지 않습니까? 사막.”
“아!”
송 비서는 똑똑했다.
단번에 태수의 말을 알아차렸다.
“절 사막에서 실종 처리할 작정이군요.”
“실종된 남편과 아버지를 찾기 위해 가족들이 먼 타국으로 오는 건 아무도 막지 못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제 가족들은 무사히 한청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그들과 함께 멀리 가서 사십시오. 한청호가 아무리 대단해도 그 정도 힘은 없을 겁니다.”
태수가 살길을 열어 주겠다고 말한다.
송 비서가 허리를 굽혀 감사 인사를 전했다.
“호의를 베풀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아직 제 쓸모를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제 목숨값을 아직 치르지 못한 겁니다.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태수는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한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
“첫째, 이대로 사라져서 한청호를 엿 먹이는 겁니다.”
송 비서도 안다.
제 존재가 한청호에게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오랫동안 충성을 다한 운전기사와 별다를 것 없다.
제게 위협이 된다 싶으면 단번에 꼬리를 잘라 내듯 버릴 것이다.
“별로 타격이 없을 겁니다. 제가 지금 사라진다고 한청호가 눈이나 깜짝하겠습니까?”
묵직하게 타격이 오도록 만들면 그만이다.
“사우디 재경부 장관 댁에 돈 가방을 나르셨다고 했죠?”
“네, 그렇긴 합니다만.”
“한청호가 먼 사우디까지 돈 심부름을 보냈을 때엔 가방 하나만 내어 주진 않았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총 세 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사우디 건설부 장관 댁엔 아주 작은 선물로 보냅시다. 한 손 사이즈의 아담한 돈다발 선물 상자로 말입니다.”
“네? 아!”
송 비서는 갑자기 태수의 뜻을 깨닫고 크게 웃었다.
“일부러 사우디 건설부 장관에겐 푼돈만 보낼 겁니까?”
“역시. 제 뜻을 짐작하셨군요.”
송 비서는 예전부터 태수와 뜻이 잘 통했다.
“좋은 이간책이에요. 한청호가 제대로 엿 먹겠군요. 시원하게. 하하하.”
송 비서는 완전히 한청호에게서 마음이 떠난 모양이었다.
이런 말을 듣고도 옛 상관을 걱정하기는커녕 속 시원해하는 것을 보면.
송 비서가 신나서 혼자 다다다 말한다.
“한청호는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반드시 따낼 요량으로 두 장관에게 사이좋게 하나씩 커다란 돈 가방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재경부 장관에게는 커다란 돈 가방이 갔는데, 건설부 장관에게는 고작 푼돈이 든 선물 박스가 들어가지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건설부 장관은 어떤 생각이 들까요?”
“무척 괘씸해하겠죠.”
건설부 장관은 초대 국왕의 4남이다.
현 국왕의 동생으로 다음 국왕으로 가장 유력한 남자다.
그런데 그보다 동생을 더 높이 우대한다.
안 그래도 질투심 많고, 열등감 많은 남자는 동생을 꺼리게 될 것이다.
제 직책에 비해 동생이 재경부 장관이란 더 좋은 직책을 차지하고 있으니 더욱 속이 안 좋을 것이다.
“주베일 산업항을 담당하는 자신보다 재경부 장관을 더 중시한 꼴이니까요.”
“게다가 한청호가 재경부 장관을 택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 동생에게 샘이 나지 않겠습니까?”
“둘 사이가 벌어지겠군요.”
짝.
혼자 다다다 말하던 송 비서가 신이 나서 박수를 쳤다.
“완벽한 이간책입니다. 분열은 그렇게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죠. 훌륭합니다.”
태수를 칭찬했던 그 옛날의 송 비서와 똑같다.
“그런데 이건 목숨값을 치르기엔 너무 가벼운 대가 같은데요? 그냥 건설부 장관에 작은 선물 상자 하나를 보내는 것뿐이잖아요.”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잖습니까. 사우디 장관들의 분열이 시작되는 건데요.”
송 비서는 태수를 마치 제 후계자처럼 아꼈다.
그러니 송 비서는 아낌없이 태수에게 가르침을 내렸고, 태수에게 많은 조언을 베풀어 줬다.
‘제가 그 은혜를 지금 여기서 갚습니다. 하지만 까닭 없는 호의는 부담스러울 테니 이런 작은 제안을 건네는 겁니다. 당신이 안전하게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태수의 계획이 마음에 든 송 비서는 웃는다.
태수도 같이 웃었다.
“그럼 제가 두 번째로 할 일은 무엇입니까? 분명 무척 어려운 일일 테죠?”
“송 비서님이 폭탄을 하나 준비해 주셔야겠습니다.”
한청호의 비밀을 아주 많이 알고 있는 송 비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폭탄이요?”
“한청호가 저지른 잘못, 증거를 잔뜩 모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꼭 한국에 들어가지 않아도 가능하겠죠?”
“물론입니다. 그거라면 미리 준비해 둔 게 있습니다.”
송 비서는 몰래 숨겨 둔 장부를 떠올렸다.
“제가 사막에서 실종됐단 소리를 전할 때 가족들에게 몰래 귀띔할 수 있을까요? 그때 그걸 이곳으로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엄청난 폭탄이 터질 것이다.
“이것으로 목숨값으로 두 가지 대가를 모두 치르셨습니다.”
“아니······!”
송 비서는 입을 떡 벌렸다.
목숨값을 지불하여 스스로 쓸모를 증명하라기에 아주 어려운 부탁을 할 줄 알았다.
필요하다면 다시 한청호 곁에 가서 스파이 노릇이라도 할 각오였으니까.
하지만 태수는 그냥 그를 놓아주겠다고 한다.
“이제 송 비서님은 완전히 한청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한청호는 꿈에도 모를 거다.
죽었다고 알려진 송 비서가 얼마나 제대로 폭탄을 터뜨리는지.
“송 비서님은 한청호가 마련해 준 돈으로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사십시오.”
“네?”
달러로 가득 찬 트렁크가 재경부 장관에게 하나 배달됐다.
아주 작은 푼돈이 든 선물 상자가 건설부 장관에게 배달될 것이다.
그럼 나머지 두 트렁크는?
“트렁크 두 개면 어디를 가더라도 고생하진 않을 겁니다.”
“돈 가방까지 저한테 주신다는 겁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강태수 씨.”
송 비서는 알 수 없는 복잡한 마음에 그만 울컥했다.
평생 온 힘을 다해 도왔던 상관은 그를 버리는데, 생전 처음 보는 남자는 그에게 이렇게 은혜를 베푼다.
“제가 언제고 이 은혜를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송 비서는 다짐했다.
‘한청호의 치부책, 이 사람에게 넘기겠다.’
한청호의 더러운 일을 처리하면서 몰래 모아 놓은 또 다른 치부책은 송 비서에게도 있었다.
‘이건 한청호도 모르는 또 다른 폭탄이다.’
전생에서 끝내 사용하지 못했던 송 비서의 무기가 세상에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대단한 자다. 이 정도라면 한청호와 겨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젊은데.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심상치 않다.
몸 곳곳에 오랫동안 세심하게 공들여 교육받은 태가 보인다.
‘어디서 이런 자가 뚝 떨어졌을까? 대체 누가 그를 이렇게 훌륭하게 키워 냈을까?’
전생에 송 비서는 5년 동안 달라붙어서 태수를 길러 냈다.
자신이 죽은 후까지 대비해, 태수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미리 마련해 두었다.
태수를 보는 송 비서의 눈이 깊어진다.
‘이 정도까지 완성형에 가깝게 공들여 키워진 자를 여태 본 적이 없었는데.’
그때 통역을 통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칼리드가 입을 열었다.
[한청호의 수하는 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