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국방부 장관 앞에서 전쟁을 논하다(4)
태수는 말했다.
[저는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맡길 바랍니다.]
칼리드가 흠칫한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말인가? 그건 아직 구상 단계라 구체적인 계획조차 잡히지 않은 일이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 년 후에 반드시 하게 될 공사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전생에서 75년에 공개 입찰을 공고했고, 76년에 공사를 착수한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낸 곳은 금산의 장준용이다.
그리고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심사한 것은 당시 사우디 국왕인 칼리드다.
지금 눈앞의 남자였다.
[나는 국방부 장관이다. 내 소관이 아닌 일이야. 그것만은 내가 어찌 확답할 수가 없구나.]
재경부 장관이 예산을 승인하고, 건설부 장관이 공사를 계획, 승인한다.
하지만 이 두 장관은 모두 칼리드의 정적이다.
칼리드가 아무리 힘을 써도 두 장관이 합심하여 막으려 할 것이다.
그렇기에 칼리드의 안색은 어두웠다.
반면 태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씩 웃었다.
[미래는 모르는 법이죠. 만일 그때가 와서 힘을 써 주실 수 있다면 그때 부탁드리겠습니다.]
칼리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힘이 닿는 데까지는 성심성의껏 돕겠다. 확답할 수 없는 일이라도 모른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장준용이 부탁한 일을 끝냈다.
사우디 국왕을 포섭하여 공사에 대한 답을 받았다.
물론 지금은 확답할 수 없는 일이라며 공언하진 못했지만 힘닿는 데까지 성심껏 돕겠다는 말은 받았다.
[태양 건설이 단독으로 맡기엔 너무 버거운 공사일 텐데······.]
[그것도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금산 건설이 함께할 테니까요.]
[금산? 혹시 물이 든 유조선을 항구에 띄웠다는 그자인가?]
금산의 장준용은 사우디에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유조선에 물을 가득 채워 와서 이름을 알렸다.
사우디 왕실에서도 몇 명은 금산이란 회사 이름을 알게 되었다.
칼리드도 그중 한 명이었다.
[맞습니다. 한국에서 조선소를 짓고, 정유 산업을 하고, 중장비를 팔고, 건설 공사도 하고 있습니다.]
[흐음.]
[언제 금산의 장준용, 그를 직접 만나실 일이 있으실 겁니다.]
[좋다.]
칼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태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건 개인적인 부탁입니다만······.]
[무엇인가? 무엇이든 말해 보게.]
칼리가 손을 흔들어 말을 재촉한다.
[지금 사우디 석유는 대부분 외국의 석유 회사가 채굴하느라 칼리드 님께서 입김을 불기 힘드실 것을 압니다. 하지만 만일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여 석유를 국유화하신다면······.]
태수는 눈을 빛냈다.
[그때는 청일 정유에 석유 공급을 완전히 끊어 주셨으면 합니다.]
칼리드도 매섭게 눈을 빛냈다.
[청일 정유라면, 한청호를 말하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그건 그대가 부탁하지 않아도 내 반드시 그리할 것이다. 감히 라흐만의 등에 칼을 꽂은 배신자가 아닌가.]
칼리드는 태수에게 말했었다.
-나는 언제나 받은 것 이상으로 갚는다.
-라흐만은 내 아들이다. 내 아들이 받은 것은 내가 받은 것과도 같다.
칼리드가 대놓고 이를 갈았다.
[내 아들을 배신한 대가는 톡톡히 받아 내야 한다. 몇 배의 앙갚음으로 되돌려 줄 것이다.]
칼리드가 태수를 보며 단언했다.
[청일 정유에겐 사우디 석유 단 1리터도 팔아 주지 않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약속할 수 있다.]
[감사합니다.]
[이번에 다른 산유국들과 한자리에 모인다면 그들에게도 말할 것이다. 절대 청일 정유에 석유를 팔지 말아 달라고.]
그럼 더할 나위가 없다.
‘중동 전쟁에서 석유를 되찾은 사우디 입김을 무시할 수 있는 산유국들이 몇이나 될까?’
아마도 드물 것이다.
청일 정유는 석유를 찾아 외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때였다.
시종이 다가와 칼리드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칼리드가 안색을 굳힌다.
[마침 배신자의 수족이 내 손에 들어왔구나.]
칼리드가 태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배신자 한청호의 비서가 재경부 장관의 집에 돈다발을 배달하고 돌아오다가 잡혔다는군.]
[그가 사우디에 왔습니까? 생각보다 행동이 빠르군요.]
태수는 짐작했다.
금산의 장준용이 제대로 도발한 모양이라고.
몸이 달아 돈을 뿌려 대기 시작한 한청호가 비서를 움직인 모양이다.
[재경부 장관 집에서 나오는 것을 내 수하가 잡아 왔다네. 외국인이 심히 수상한 짓을 하기에 간첩인 줄 알았다고 하지 뭔가?]
[그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우리 집 지하실에 묶여 있다.]
[칼리드 님은 그를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배신자 한청호의 수하다. 재경부 장관과 손을 잡고 그 집을 드나들며 수작 부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러한 자를 내가 몸 성히 보내 주면 되겠는가?]
칼리드는 비릿하게 웃었다.
[사우디의 사막은 무서운 곳이라네. 길 모르는 자가 함부로 들어섰다가는 시체조차 건지기 어렵지.]
한청호의 비서는 이번에 죽음을 면치 못하겠구나.
‘그런데 지금 한청호가 보낸 비서라면 송 비서님인가, 아니면 박 비서인가?’
박 비서라면 굳이 말 나눌 생각도 없다.
하지만 송 비서님이라면 다르다.
태수가 조용히 허리를 굽혀 청했다.
[먼저 제가 그자를 한번 만나 봐도 되겠습니까?]
칼리드는 물끄러미 태수를 보았다.
태수의 의도는 모른다.
하지만 칼리드는 태수를 믿었다.
[좋다. 그대를 그자에게 데려다주마.]
[만일 필요하다면 제가 그자의 목숨을 대신 사도 되겠습니까?]
칼리드는 수염을 슬쩍 만졌다.
[흐음, 그건 그자를 만나 본 후에 결정하지.]
태수는 칼리드를 따라 저택 지하실로 향했다.
* * *
촤악.
칼리드의 수하 중 한 명이 물을 뿌렸다.
지하실 의자에 묶인 채 기절했던 송 비서가 물벼락을 맞았다.
떠지지 않는 눈을 들어 눈앞을 보았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송 비서님?”
“아, 아니. 당신은······!”
태수를 보고 송 비서가 깜짝 놀란다.
벌떡 일어나려 다가 의자에 꽁꽁 묶여 있다는 걸 깨달은 송 비서.
그가 태수 옆에 앉아 있는 칼리드를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저 사람은 사우디 국방부 장관······.”
“칼리드 님이십니다. 알고 계셨군요.”
“어째서 이자가 나를······.”
“사우디 재경부 장관님 댁에 다녀오셨다지요?”
송 비서가 흠칫했다.
“그, 그걸 어떻게 알았지?”
“송 비서님이 어떻게 잡혀 오셨는지 잊으셨습니까?”
사우디 재경부 장관집에 가서 돈을 전달하고 택시를 타서 호텔로 돌아왔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덮쳤다.
입을 감싼 손수건에서 역한 냄새를 맡고 정신을 차려 보니 눈앞에 사우디 국방부 장관 칼리드와 태수가 있다.
“인제 보니 사우디 국방부 장관께서 형제의 집을 염탐하고 계셨군.”
외국인이 재경부 장관 댁 앞에 어슬렁대다 들어갔다 나왔으니 간첩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잡고 보니 한청호의 비서였다.
“송 비서님이라면 재경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의 사이가 어떻다는 것쯤을 잘 알고 계실 테죠?”
물론이다.
하지만 송 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게다가 국방부 장관과 라흐만, 그리고 청일의 한청호 회장님의 사이가 어떻다는 것도 잘 알고 계실 테죠?”
모를 리가 있나.
배신으로 얽힌 원수 사이지.
그렇기에 송 비서는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나, 나를 어쩔 생각인가?”
“칼리드 님께선 당신을 사막에 데려다주겠답니다. 라흐만 님께 청일의 회장님이 한 짓을 되갚겠다는군요.”
죽는다는 소리다.
“안 돼! 내가 왜 그런 꼴을 당해야 해!”
사막에선 매년 엄청난 수의 실종자가 생기곤 한다.
그들 대부분은 시체조차 건지질 못한다.
송 비서는 창백하게 질렸다.
“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청일의 한청호 회장님 대신 돈 가방을 날랐을 때는 이 정도 각오는 하셨을 텐데요.”
송 비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도마뱀 꼬리 자르기인가? 강태수 손을 빌어 깨끗하게 날 잘라 내려 하는구나.’
차도살인(借刀殺人)은 한청호가 즐겨 쓰는 수법이다.
송 비서는 재빨리 외쳤다.
“살려 주십시오!”
목숨이 아까웠다.
운전기사처럼 비명횡사하기는 싫었다.
“난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내가 원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닙니다!”
송 비서는 필사적이었다.
이 중에 붙들 것이라곤 태수밖에 없다.
칼리드, 라흐만 그들의 부하들은 전부 가차 없이 자신을 죽일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저 사정해서 붙들 끈이라곤 태수뿐이었다.
“한청호, 그 인간이 돈 가방을 나르라고 할 때부터 이런 날이 오리라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가기는 싫습니다. 한 번만 날 살려 주시오!”
한국에 있는 처자식들이 생각났다.
언젠가 자신을 한강에 집어 던지겠노라 경고하던 한일권도, 악귀처럼 자신을 사지로 내몬 한청호도 떠올랐다.
“송 비서님, 살고 싶습니까?”
“살고 싶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빌겠습니다!”
“목숨은 구걸하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목숨값을 지불해야 하는 겁니다.”
“목숨값?”
송 비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실낱같은 희망이 보인다.
“송 비서님은 알고 계실 겁니다. 어떻게 자신의 목숨값을 지불해야 할지. 쓸모를 증명하십시오.”
송 비서의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죽기 전에 살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급박함이 머리 굴리는 속도를 더했다.
‘송 비서님, 오랜만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태수는 알고 있었다.
송 비서가 전생에 어떻게 죽었는지.
‘그는 한청호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청호는 그를 버렸지.’
한청호의 수족으로 오랜 세월 곁을 지켜 온 자였다.
하지만 태수가 입사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살아 있었다.
‘송 비서님, 내 비서 교육을 담당했던 선생님이셨지.’
태수가 한청호의 눈에 들어 교육을 받았을 때 태수를 가르쳐 준 사람이다.
그렇기에 송 비서가 어떤 사람인지 태수는 잘 알았다.
‘송 비서님은 늘 한청호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일부러 내 교육 선생을 자처했었어.’
태수가 교육을 거의 다 마쳤을 때 그는 쓸모를 다해서 버려졌다.
‘사인은 약물 과다 복용. 뜬금없는 죽음이었어.’
하지만 사람들은 다들 송 비서가 좌천된 이후 우울증을 앓아 왔다며 수군댔었다.
이미 오래전에 그런 소문을 은밀히 퍼뜨려 왔던 것이다.
한일권의 솜씨였다.
‘내가 알기로 송 비서님은 우울증 따윈 없었어. 오히려 좌천된 것에 감사했지.’
송 비서가 태수의 교육 담당을 자청하여 현직에서 물러났다.
그로 인해 승진하여 한청호 곁에서 총괄 비서를 수행하게 된 사람은 박 비서였다.
박 비서는 늘 태수를 못마땅해했지만 송 비서는 늘 태수를 자랑스러워했다.
‘내게 한청호의 치부책 존재를 알려 준 사람도 송 비서님이었어.’
태수에게 청일 그룹의 정보실 열람을 권한 것도 송 비서였다.
태수에게 끊임없이 정보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던 것도 송 비서였다.
그리고······.
‘내가 한일권의 목줄이 되길 바라며 길러지고 있다고 귀띔해 준 것도 송 비서님이었다.’
송 비서는 늘 태수에게 강조했다.
-한일권에게 바닥을 보이지 마라.
-속마음을 감춰라. 친구라는 허울을 쓴 채 절대로 비밀을 알려 주면 안 된다.
-한일권이 널 어려워하면 어려워할수록 넌 오래 살아남게 될 것이다.
-네 쓸모를 증명해라. 목숨은 구걸하는 게 아니다. 목숨값은 스스로 지불해야 하는 법이다.
송 비서는 태수를 많이 아꼈다.
그는 태수가 한일권과 한청호의 마수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그래서 태수를 뒤처리 비서가 아닌 비서를 빙자한 재벌 후계자로 키워 냈다.
-한일권을 대신하여 청일을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으로 만들 수 있는 자.
-한일권의 목줄이 되어 줄 자.
송 비서는 한청호에게 태수를 언제나 이렇게 소개했다.
태수의 목숨을 연장시킬 태수의 쓸모였다.
그런 송 비서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태수에게 남긴 말이 있었다.
-절대로 한청호 부자의 비밀에 관여하지 마라. 그럼 내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