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국방부 장관 앞에서 전쟁을 논하다(2)
사우디 수도 리야드.
송 비서는 택시에서 내려 호텔로 향했다.
드르륵. 드르륵.
그는 달러가 가득 든 여행용 트렁크 대신 빈 트렁크를 끌고 있었다.
‘사우디 재경부 장관에게 무사히 돈을 전달했다.’
생각보다 쉽게 거물을 만났다.
한청호가 달러를 가득 보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대문이 열렸다.
‘한국이나 사우디나 다 똑같군. 정치인들은 돈다발을 싸 들고 오면 버선발로 달려 나오는구나.’
솔직히 사우디 재경부 장관을 만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겠나.
하지만 달러가 가득 든 여행용 트렁크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낸다.
돈의 힘이다.
-자네 주인에게 가서 전해.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으라고. 내가 사우디 재경부 장관이라네, 하하하.
재경부 장관은 가슴을 두드리며 단언했다.
한청호가 봤으면 무척 좋아했을 광경이었다.
맡고 있는 직책이 재경부 장관이라서 그런가.
어찌나 돈다발을 좋아하던지.
-잠깐만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위조지폐인지는 확인하고 가야지.
그렇게 송 비서는 한참이나 응접실에서 위조지폐 감식이 끝나길 기다려야 했다.
‘욕심도 많을뿐더러 치밀하기까지 한 남자였어. 대놓고 내 앞에서 지폐 감별사를 불러다 하나하나 확인할 줄이야.’
송 비서는 재경부 장관의 행동을 떠올리며 부르르 떨었다.
진짜 달러 뭉치를 가지고 갔는데도, 반쯤 위조 지폐 유통자 취급을 받다 왔다.
‘한 명 만났는데도 기가 쪽 빨렸어. 이번엔 건설부 장관을 만나러 갈 차례구나.’
호텔로 돌아온 이유였다.
‘트렁크 하나씩 가지고 가길 잘했네. 재경부 장관이 나머지 트렁크도 봤으면 그 자리에서 전부 뺏겼겠어.’
그 욕심, 그 집착, 그 노골적인 태도. 돈 앞에서 체면 따윈 날려 버린 사람이었다.
빈 트렁크를 바라보며 송 비서가 진저리쳤다.
그때였다.
“웁!”
누군가 뒤에서 송 비서의 입을 막았다.
입을 틀어막은 수건에서 올라오는 역한 냄새를 맡았다.
송 비서의 기억은 그것으로 끝났다.
[옮겨.]
검은 옷을 입은 괴한들이 축 늘어진 송 비서를 자동차 트렁크에 쑤셔 박듯이 집어넣는다.
부르릉.
차는 출발했다.
* * *
-내가 이 전쟁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태수는 이 물음에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사실 내놓을 답은 간단했다.
-칼리드 님, 당신은 이 전쟁으로 모든 것을 얻게 되실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현직 국왕은 75년 3월에 암살을 당한다.
중동 전쟁에서 권력을 휘어잡은 칼리드가 차기 국왕 위에 오른다.
정적들을 모조리 물리치고서.
‘하지만 지금의 칼리드는 결단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형제들을 견제해 권력 암투에서 승리하겠다는 다짐이 보이지 않아.’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형제 사이를 이간질한다는 오해밖에 얻을 게 없으니까.
애써 쌓은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 문제는 서두르면 탈이 난다. 천천히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도와줘야지.’
그래서 태수는 대신 다른 것을 답했다.
[먼저 어떻게 세 가지 분야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인가란 물음부터 대답해 드리죠.]
[좋다.]
칼리드가 집중한다.
[먼저 시나이반도에서 벌어지는 전쟁, 그 자체에서 승리할 계획입니다.]
태수는 물었다.
[지금 이집트와 시리아는 왜 앞뒤 다르게 행동하겠습니까?]
앞에서는 대대적으로 공갈 협박에 허풍 선전 포고를 날리고, 군대를 동원하는 시늉을 하며 쇼를 한다.
하지만 뒤에서는 착실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무기 상인에게서 몰래 무기를 사들이고 있다.
[그야 사다트가 적을 속이기 위한 기만책을 펴고 있기 때문이지.]
[맞습니다.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가 열심히 기만책을 펴서 판을 깔고 있습니다. 전 세계를 상대로 대대적인 도박판을 벌였다, 이 말입니다.]
태수는 식탁 테이블을 두 손으로 짚었다.
[그 도박판이 벌어지는 곳이 시나이반도입니다. 사우디도 강제로 한 자리에 배정받았습니다.]
사우디뿐만이 아니다.
시나이반도가 전쟁터가 된다면 중동의 다른 나라들도 강제로 참전하게 생겼다.
[도박판을 엎으실 겁니까? 그럼 판이 엎어지긴 한답니까? 벌써 두 나라가 작정하고 벌이는 전쟁이 아닙니까?]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아니면 지금 다른 나라들에 이집트와 시리아가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고 알리실 겁니까? 이미 이집트 대통령이 전쟁을 매일 부르짖고 있는데도, 아무도 안 믿잖습니까?]
믿었다면 사다트는 공갈 협박을 일삼는 허풍쟁이란 말도 나오지 않았을 터다.
[사우디만이라도 대대적으로 전쟁을 준비하려면 어떡해야 할까요? 칼리드 님이 사우디 왕실에서 전쟁을 준비하자고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그럼 다들 믿어 줄까요? 칼리드 님이 외려 공격당하실 겁니다. 체면은 땅에 떨어지겠죠.]
[그건 안 된다! 체면이 땅이 떨어져서는 안 돼!]
칼리드가 주먹을 꽉 쥐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사다트와 같이 허풍쟁이 취급을 받을 순 없다.
[그대의 말이 맞다. 사람들은 이미 사다트의 농간에 넘어간 후야. 내 말을 가볍게 여기고, 날 조롱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을 순 없어. 어쩌면 좋겠나?]
[사다트가 오랜 시간 동안 깔아 둔 도박판입니다. 도박판에 끼게 됐다면 승자가 되면 그만입니다. 사다트의 기만정책을 이용합시다.]
도박판의 룰은 간단하다.
승자 독식.
Winner takes all!
[기만정책을 어찌 이용한다는 건가?]
[한국의 유명한 말 중에 ‘구라의 꽃은 역구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의 기만책을 이용해 승리를 거두는 기만 전술이죠.]
한국에 그런 유명한 말 따윈 없다.
아직 나오지도 않은 영화 속 대사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도박판에서 마지막에 승리를 거머쥔 방법이기도 하다.
[기만책을 기만책으로 되받아친다?]
[현재 이집트와 시리아가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 믿는 사람은 오직 칼리드 님뿐이십니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 모르게 뒤에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칼리드이 눈이 커진다.
태수의 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자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군. 나 역시 모른척하고 뒤에서 전쟁 준비를 하란 말이지.]
칼리드가 무기 상인의 명함을 내려다본다.
[그래서 내게 이 명함을 준 거겠지?]
이집트와 시리아에 무기를 몰래 밀매하고 있는 무기 상인의 연락처다.
설마하니 그들을 잡아서 엄벌에 처하라고 명함을 줬을까.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사우디 역시 군수 물자를 반드시 준비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요란하게 앞에서 준비할 필요는 없겠죠.]
[좋아. 나 역시 은밀하게 무기 상인에게 군사 물자를 사들이겠다.]
사우디 국방부 장관이 전쟁을 눈치챘다는 사실을 누구도 모르도록 숨길 것이다.
사우디 왕실에서 매년 쏟아붓는 국방부 예산은 21세기 기준으로 미국, 중국 다음인 세계 3위다.
장말동에게 엄청난 우수 고객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왕 뛰어들게 된 도박판이라면 일단 두둑하게 칩부터 마련해야지.]
도박판에서 칩은 곧 베팅을 위한 자금.
전쟁에서 칩은 곧 군수 물자다.
[바로 그겁니다. 도박판에서 상대 카드를 훔쳐봤으면 게임은 쉽습니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패까지 알고 있다.
목표는 이스라엘.
사우디 왕국이 아니다.
칼리드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조용히 움직이려면 비밀 보급을 준비해야겠군. 어디를 병참 기지로 쓸까······.]
태수는 라흐만을 가리켰다.
[마침 아드님이 계시는 곳에서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사우디 왕실에서 각종 저장 탱크와 물자를 보내고, 국고에서 지원해 뚝딱뚝딱 짓는 시설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얀부항!]
칼리드가 무릎을 탁 쳤다.
얀부항에서부터 베두인족 마을까지 갑작스러운 공사가 한창이다.
각종 중장비가 동원되고, 사막 전역에 흩어져 있던 베두인족들이 몰려들어 벌이는 대공사다.
얀부항에는 포클레인과 불도저가 기반을 닦아 만든 커다란 공터가 있다.
물을 저장하기 위한 물탱크가 들어섰고, 장차 석유를 저장할 오일 탱크로 운용될 곳이었다.
[그곳에 병참 기지를 만드는 겁니다. 물 저장 탱크와 석유 저장 탱크를 만드는 곳에 큰 창고와 수송 시설을 준비하면 됩니다.]
[이왕 결정 난 일이니 남들 눈치를 보지 않아도 괜찮을 테고.]
[아드님이 총책임자이니 원하는 대로 공사 규모를 키워도 그만이죠.]
태수의 말대로라면 심지어 사우디 왕실에서도 비밀 병참 기지에 대해서 모를 것이다.
이미 공사가 시작된 걸 모두 알고 있고, 그에 대한 왕실의 지원도 마무리된 일이다.
그러니 앞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공사가 더 추가될 것인지는 신경도 안 쓸 것이다.
[또한 병참 기지로 제격인 점은 또 있습니다. 바로 라흐만 님이 만들어 놓은 엄청나게 크고 깊은 항구입니다.]
칼리드가 무릎을 탁 쳤다.
[거기라면 군용 함선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항구가 크지.]
[석유 전진 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아드님이 미리 큰 그림을 그린 덕분이지요.]
그뿐만이 아니다.
[사막 전역에서 공사에 참여하기 위해 베두인족이 몰렸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뛰어난 사막의 전사들입니다.]
[여차하면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해도 되겠군! 더할 나위 없구나.]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다.
칼리드는 테이블을 탁 쳤다.
[좋다, 라흐만 너는 얀부항에 병참 기지를 만들어라. 필요한 군자금은 내가 몰래 지원하마.]
[아버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이것만 잘되면 너 역시 군공을 세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우디 왕실에서 라흐만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강태수, 그대 덕분에 내 아들이 사우디 왕실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겠는데. 그 공은 참작해야지.’
칼리드가 태수를 돌아봤다.
[라흐만의 지휘 아래 공사가 진행될 거요. 그 공사도 같이 부탁해도 될까? 공사비는 물론 내가 지원하겠소.]
[물론이지요. 도로 공사하는 김에 병참 기지 공사도 같이하게 됐군요.]
라흐만이 슬쩍 웃는다.
[아버님, 이 친구는 석유를 좋아합니다. 석유로 주시지요.]
[석유로? 하하하. 좋지.]
[아버님, 저 친구는 말은 안 믿습니다. 계약서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을걸요?]
[그까짓 계약서, 쓰자.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칼리드가 수염을 쓰다듬는다.
[그대는 우리나라 공사 때문에 쉴 틈이 없었어. 베두인족 공사에 병참 기지 건설까지 함께 참여하면 정작 그대가 맡은 도로 공사 기일은 맞출 수 있겠나?]
[그럴 줄 알고 중장비를 잔뜩 추가 주문했지요. 아마도 문제없을 겁니다.]
한국에서 금산의 장준용을 만나서 중장비를 불렀다.
장준용이라면 최대한 빨리 중장비를 지원해 줄 것이다.
칼리드는 작게 감탄했다.
‘이제 보니 똑똑할 뿐만이 아니라 치밀하기까지. 무서운 인물이구나.’
그렇지만 두렵지 않다.
라흐만과 호의로 맺어진 동맹.
그는 라흐만의 친구를 자처하는 자다.
실제로 라흐만에게 해를 끼칠 기색도 느껴지지 않는다.
‘라흐만이 대단한 친구를 집에 데려왔어. 사람 보는 눈이 좋아. 인덕도 있고. 역시 내 후계자다.’
칼리드가 흐뭇한 얼굴로 아들 라흐만을 돌아봤다.
그가 내정한 후계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저런 유능한 녀석을 친구라고 데려오다니.
[칼리드 님, 두 번째 전쟁의 승리 계획입니다.]
[좋아. 말해 봐라. 내 귀담아들을 것이다.]
[전쟁은 국방부 장관의 영향력이 가장 강해지는 때입니다. 이를 계기로 사우디 왕실에서 몸을 바로 세우실 기회이기도 합니다.]
지금 태수가 말하는 전쟁은 중동 전쟁이 아니었다.
바로 사우디 왕실에서 일어나는 정쟁(廷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