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국방부 장관 앞에서 전쟁을 논하다(1)
태수 역시 정중하게 인사했다.
[대한민국에서 온 강태수라고 합니다.]
[반갑소. 난 칼리드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초대 국왕 폐하이신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의 다섯 번째 아들이며 현재 국방부 장관으로 일하고 있다 오.]
칼리드가 자기소개를 한다.
[우리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응접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떤가.]
[좋습니다.]
어느덧 응접실에 도착했다.
응접실은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집주인의 성향을 나타내듯 과감하고, 파격적이고, 웅장했다.
한마디로 눈에 띄는 게 뭐든 크고, 높고, 굵고, 비싸다.
‘적어도 라흐만처럼 집 안 곳곳마다 보석에 금장식으로 꾸미는 짓은 안 해서 다행이다.’
이 집 안에서 가장 화려한 곳을 꼽자면 단연 라흐만의 방일 것이다.
라흐만의 사무실, 옷차림, 타고 다니는 크루저나, 차만 봐도 알 수 있다.
라흐만은 지나치게 화려하다.
‘확실히 이곳에 와 보니 라흐만의 취향이 얼마나 사치스러운지 알겠군.’
코리노 족장이 호화 유람선을 보고 바로 라흐만이라 짐작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라흐만의 취향은 사우디 왕실 문화에 비해 튀어도 너무 튀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사치스런 것을 좋아하는 라흐만.
하지만 아버지가 국방부 장관, 실세 중의 실세이며 재력 또한 넉넉하다.
개인 취향까지는 내버려 두는 것이다.
[멀리서 이곳 리야드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겠어. 당신이 최근 사우디 왕실을 놀라게 했던 바로 그 인물인가?]
칼리드는 흥미로운 얼굴로 태수를 살펴본다.
[그대가 내 아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며? 사람의 말 대신 돈을 보라고 하였다지?]
[그랬습니다.]
사람의 행동 근원은 욕망이다.
그 욕망을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지표가 바로 돈!
[나는 왕실 전용기를 띄우고, 고급 리무진을 준비했다. 그대가 보기에 나는 왜 돈을 쓰는 것 같은가?]
칼리드가 매섭게 훅 들어온다.
라흐만이 누구를 보고 배웠는지 잘 알 것 같다.
[호의. 그리고 선물입니다. 절 이토록 환영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내 뜻을 확신하고 있군. 근거가 뭔가?]
[아까 직접 말씀하셨잖습니까?]
왕실의 전용기를 띄우고, 고급 리무진을 준비했다고.
[만일 저를 해코지하고 싶으셨다면 다른 쪽으로 돈을 쓰셨을 겁니다. 전용기 대신 군용 헬기를 띄워 절 잡아들인다거나, 고급 리무진 뒷좌석 대신 자동차 트렁크에 절 처박아 데려오셨겠지요.]
[하하하.]
태수의 말을 듣고 칼리드는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똑똑한 자로군. 아들의 말을 듣고 내심 짐작하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더 똑똑한 젊은이였어.]
[과분한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태수는 웃으면서 한 발 앞으로 나갔다.
[덕분에 오랜 시간 자동차를 타고 사막을 건너오는 수고를 덜었습니다.]
[내 아들에게 베풀어 준 가르침을 생각하면 더 한 것을 못 내줄까. 내 집에 잘 왔소이다.]
형식적으로 하는 인사지만 정중하다.
‘드디어 포섭 대상인 미래의 사우디 국왕을 만났다.’
장준용이 노리는 목표.
태수가 만나야 할 사람.
장차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결정지을 남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일단 앉지. 언제까지 거기에 서 있을 셈인가?]
태수는 칼리드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태수의 맞은편엔 라흐만이 자리 잡았다.
[솔직히 말하지. 잠시 안 보는 사이에 내 아들이 그대의 색깔로 물든 것 같아. 좋은 말을 가슴에 새겼더군.]
[동양 속담에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말이 있습니다. 친구와 더불어 지내다 보면 친구의 색으로 물든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아드님도 제 색에 물들었나 봅니다.]
칼리드는 웃었다.
[지금 그대는 스스로를 내 아들의 친구라 말하고 있는 것인가?]
[네, 그렇습니다. 저는 아드님의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태수가 라흐만을 가리켰다.
[아까 아드님을 만났을 때 제게 그러더군요.]
-가난한 친구를 곁에 두면 떨어지는 건 벼룩과 빈대뿐이야.
-반면 부자 친구를 곁에 두면 떨어지는 식은 밥도 먹음직한 법이지.
[아주 인상 깊은 말이었습니다. 저는 부자 친구와 더불어 더 좋은 것을 나눠 먹을 생각입니다.]
[어떤 걸 나눠 먹을 생각인가?]
[승리의 전리품.]
칼리드는 태수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승리는 언제나 옳지.]
물론이다.
승리는 달콤하고 패배는 쓴 법이니까.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칼리드는 슬쩍 태수를 만나면 확인받고 싶었던 말을 꺼내 놓는다.
[배짱이 대단하던데. 도로 공사를 두고 내기를 벌였다면서? 돈 한 푼 안 받고 공사를 끝내는 것도 모자라 석회 광산과 시멘트 공장까지 내걸었던데.]
[내기에 대해 들으셨습니까?]
[아무렴, 석유를 뜯어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더군. 내 아들은 3,500만 배럴이나 질렀다지? 젊은 애들이 참 화끈하다니까.]
[언짢으십니까?]
[전혀. 내 아들의 뜻이고, 내가 감당할 수 있으니 문제가 될 것 없지.]
칼리드는 웃었다.
[석유를 탐내도 좋다. 내 아들의 등골을 좀 빼먹어도 좋아. 하지만 내 아들의 체면만큼은 떨어뜨려선 안 돼. 내 그것만은 용서할 수 없다.]
체면.
칼리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우디 국방부 장관의 위엄이 그대로 전해진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공사는 벌써 60% 가까이 진행되고 있으니까요.]
[아버님, 이 친구의 말은 사실입니다. 이 속도라면 이르면 석 달, 늦어도 반년 내로 공사는 끝날 것입니다.]
라흐만이 거들자 칼리드가 눈을 크게 떴다.
라흐만의 얼굴이 밝다.
정말로 공사가 잘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좋아. 내 아들의 동맹을, 아니 친구를 나도 한 번 믿어 보지.]
칼리드가 흡족해한다.
아들의 앞날에 드리운 먹구름이 걷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안심이다.
태수를 보는 칼리드의 눈길이 따사롭다.
[잘 부탁하네.]
[아드님만큼은 못하지만 저 역시 빈대나 벼룩이 나올 만큼 가난한 사람은 아닙니다. 전 아드님의 등골을 빼먹는 것보다 다른 걸 나눠 먹는 걸 좋아합니다.]
[그래, 승리의 전리품! 그거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지. 하하하.]
남을 등쳐서 등골 빼먹는 짓은 사기꾼이나 하는 짓이다.
사기를 칠 생각 따윈 없다.
승리를 거머쥐고, 그에 따른 포상을 실컷 먹으면 그만이다.
그게 훨씬 명예롭고, 훨씬 값지다.
[그 마음가짐, 아주 마음에 들어. 명예로운 승리를 기원하겠다. 내 그 보답은 톡톡히 하지.]
라흐만이 이미 카이바-알룰라 고속 도로를 선물로 주었다.
한데 칼리드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챙겨 줄 생각인 모양이다.
[나는 언제나 받은 것 이상으로 갚는다. 라흐만은 내 아들이다. 내 아들이 받은 것은 내가 받은 것과도 같다.]
칼리드는 몰래 속으로 이를 갈았다.
‘내 아들을 배신한 한청호, 그자에게는 이 배신의 앙갚음을 몇 배로 되돌려 줄 것이다.’
한청호와 손을 잡고 라흐만은 역전의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한청호는 아들의 손을 저버리고 다른 이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강태수라는 자는 느낌이 좋아. 내 아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것 같군.’
눈앞의 이 젊은이는 그 음흉하고 약삭빠른 늙은이와 아주 다른 것 같다.
패기만만한 젊은이는 언제나 환영이다.
[이번엔 라흐만의 아비 된 자로서 아들의 친구를 환영하겠다. 만나서 반갑다.]
같은 환영이지만 처음 태수를 만났을 때와는 분위기부터가 다르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태수를 반겼다.
[내 집에 정말 잘 왔네. 내 아들이 정말 멋진 친구를 데리고 왔어! 이렇게 기쁜 날에 내가 무얼 해 주면 좋을까?]
[친구 집에 놀러 왔는데 많은 걸 바라겠습니까? 밥 한 끼 베풀어 주시면 족하죠.]
칼리드는 크게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시종이 다가왔다.
[내 아들의 친구에게 밥 한 끼를 대접해야겠다! 당장 음식을 만들어 내와라!]
칼리드가 흡족한 눈으로 태수를 보았다.
[라흐만에게 똑똑하고 야무진 친구가 생겼구나. 자세한 얘기는 밥 먹으면서 나누도록 하지.]
아버지가 아들이 데려온 친구를 마음에 들어 한다!
덕분에 식탁이 한껏 풍족해진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 * *
화려한 식탁이 곧 준비되었다.
라흐만은 식사를 하면서 태수와 나눴던 말을 전했다.
[아버님, 이것을 받으십시오.]
라흐만은 아버지에게 명함을 건넸다.
태수가 주었던 무기 상인의 명함이었다.
[이집트와 시리아에 무기를 대고 있는 자의 것이라 합니다. 저기 제 친구 강태수가 저를 찾아와 건네주었지요.]
[그대가?]
칼리드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태수를 보았다.
라흐만이 자세한 이야기를 전했다.
전쟁이 반년에서 1년 사이에 일어날 것이라는 대목에서 칼리드의 안색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으음······. 서둘러 대비를 단단히 해 두어야겠구나.]
라흐만이 물었다.
[아버님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지금이라도 전쟁 준비를 대대적으로 해야겠지.]
칼리드가 대답했다.
[먼저 형님 폐하께 이를 보고한 후 각료 회의를 열어서 군비를 확보하고, 군수 물자를 대대적으로 구입할 생각이다. 군대 소집령도 내려야겠지.]
[건설부 장관님과 재경부 장관님이 그걸 가만히 두고 볼까요?]
[사우디 왕국이 전란에 휩싸이는 일이야. 아무리 그들이라도 전쟁 앞에서 권력 다툼을 하진 않을 것이다. 난 내 형제들을 믿는다.]
그럴 리가 없다.
그들이라면 전쟁이라는 상황을 이용해 더욱 자기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정치를 하는 자들에겐 세력 싸움, 자리 싸움이 변화의 순간에 더욱 심해지는 법이다.
라흐만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
칼리드는 형제들과의 권력 다툼에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흐만이 왜 서쪽 도시로 쫓겨났는지 알 것 같군. 칼리드가 아직 결단을 못 내렸구나.’
이대로라면 라흐만은 언제 또 정치 싸움에서 밀려날지 모른다.
바람 앞의 등불 신세다.
‘칼리드가 제대로 라흐만의 바람막이가 되어 줘야 해. 정치 싸움에서 압승하여 차기 국왕이 되려면 확고한 결단이 필요하다.’
칼리드가 확고하게 버텨서 권력을 틀어잡아야 라흐만이 산다.
라흐만이 사우디 왕실에 단단히 뿌리박아야 태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다.
조용히 있던 태수가 입을 열었다.
[외람된 말을 한마디 올려도 되겠습니까?]
칼리드와 라흐만이 동시에 태수를 돌아보았다.
태수는 넵킨으로 입가를 닦은 후 말했다.
[대대적으로 전쟁을 준비해서는 안 됩니다.]
[왜?]
[경계심만 잔뜩 일으켜 대치 상태가 길어지고 싸움은 장기화될 겁니다. 하루마다 들어가는 돈은 많은데, 성과는 나오지 않는 지루한 싸움이 계속될 겁니다. 피해가 너무 큽니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이대로 손 놓으란 소리는 아니겠지?]
[계책을 써야죠.]
사실 태수는 이번 전쟁의 결과를 알고 있다.
전쟁치고는 큰 피해 없이 고작 3주 만에 마무리된다.
그렇기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아주 유리한 방향으로.
[위기는 곧 기회의 다른 말입니다. 칼리드 님은 하늘이 내려 준 이 기회를 그렇게 망쳐 버리실 겁니까?]
[기회? 그대는 지금 전쟁을 하늘이 내려 준 기회라고 말하는 건가?]
사우디 국방부 장관 칼리드가 눈을 부릅떴다.
[전쟁이 나면 사우디 국민들이 피를 흘린다. 사우디의 국토는 황폐화된다. 그런데도 그대는 이런 위기를 기회라고 말하는 것인가?]
사우디 국토의 대부분은 사막이라 황폐해 봤자 사막이다.
하지만 태수는 그런 사소한 부분을 걸고 넘어가지 않는다.
대신 더 중요한 말을 꺼낸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할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태수는 냅킨을 식탁 위에 올렸다.
[칼리드 님께선 이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전쟁의 뜻을 꺾을까요?]
사우디 국방부 장관은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를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태수의 말이 가슴속 깊이 와닿았다.
[사다트라면··· 반드시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그는 뜻을 꺾는 자가 아니야.]
칼리드는 마침내 사실을 인정했다.
아마도 막지 못할 것이다.
사다트가 야욕을 꺾을 인물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대가 말했지.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할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라고. 그대가 보기엔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가?]
태수는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저는 이번 전쟁으로 칼리드 님이 이겨야 할 세 가지 분야의 전쟁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과 함께.]
계책.
태수가 아까 말한 전술을 일러 줄 것이다.
[그럼 무엇을 얻게 되는지도 자연히 알게 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