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라흐만의 선물(2)
사우디 왕실에서 비공식적으로 항의 서한이 올 정도로 신뢰를 잃은 삼원 건설이다.
그렇기에 끝내 72년 입찰했던 도로 공사는 실패로 돌아갔고, 사우디 현지 건설 기업이 맡아 완공하였다.
그리고 양국의 합의하에 삼원 건설이 72년 도로 공사를 맡았던 사실은 역사 속에 묻혔다.
그런데 다음 해인 73년 6월, 삼원 건설은 사우디에서 또 한 차례 도로 공사 입찰 계약을 따냈다.
그것도 현지 파트너였던 쇼복시와 다시 한번 손을 잡고서!
‘쇼복시는 라흐만이 만든 서부 도시 개발 건설 업체다. 하지만 라흐만은 공사 실패의 책임을 진 채 쫓겨났다. 그렇다면 후임 도시 개발자와 삼원 건설이 손을 잡았다는 뜻인데.’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사우디 왕실은 신뢰를 잃은 삼원 건설을 또다시 받아들였어. 그렇다면 후임은 누구였으며 누가 삼원 건설을 밀어줬던 것일까?’
또 하나.
‘박정환의 성정으로 보건대, 체면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삼원 건설에 보복의 철퇴를 내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도 박정환의 손에서 삼원 건설이 살아남았단 말이야. 삼원 건설의 뒷배는 누구지?’
문득 미치는 생각이 있었다.
‘한청호는 왜 삼원 건설을 대신해 사우디 왕실을 연결시켜 줬을까? 그래 놓고서 왜 도마뱀 꼬리 자르듯 삼원 건설을 잘라 냈을까?’
그림이 나온다.
삼원 건설의 배후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때 태수의 생각을 끊고, 라흐만이 말했다.
[카이바-알룰라 고속 도로 공사는 6월에 입찰 공고가 날 것이다. 그리고 8월에 계약이 통고될 예정이고, 12월에 공사를 착수하게 되겠지.]
전생에서도 똑같이 흘러갔다.
이건 변함이 없다.
[이 도로 공사를 계획한 것도 나고, 입찰 심사하는 것도 나야. 계약도 내 손에서 체결될 테지.]
라흐만은 계약서에 사인했던 펜을 한 바퀴 휙 돌렸다.
[강태수, 이번 공사는 태양 건설 단독 입찰로 간다.]
달라진 점은 이런 것이다.
전생에선 카이바-알룰라 고속 도로 공사는 대대적인 해외 입찰 경쟁이 있었다.
승리자는 삼원 건설이었다.
태수가 서류에서 눈을 떼었다.
[단독 입찰? 입찰 공고를 내지 않겠다는 겁니까?]
[형식적으로는 내겠지. 관보 구석지에 아주 조그맣게, 하루 반나절 정도 잠깐 공고할 예정이야.]
[그렇게 제멋대로 해도 됩니까?]
[형식은 다 지켰으니 별문제 없어. 따질 테면 따지라고 해. 누가 감히 내게 그깟 작은 공사를 가지고 따질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해외에 대대적인 입찰 공고를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확실히 소소한 미래가 변했다.
태수로 인해.
[어떤가? 내가 준비한 선물은 마음에 드나?]
[마음에 듭니다.]
[자네에겐 석회 광산과 시멘트 공장, 그리고 중장비와 베두인족 인부들도 있으니 딱히 어려움은 없을 거야. 도로 뽑는 김에 마저 뽑는다고 생각하면 돼.]
홍해를 낀 고속 도로 공사를 전부 태수가 맡게 되었다.
얌부-움라지 고속 도로 공사.
그리고 카이바-알룰라 고속 도로 공사.
라흐만은 손바닥을 비비며 눈을 반짝였다.
[이번엔 강태수, 자네가 준비한 선물을 좀 열어 볼까?]
태수의 차례였다.
태수는 품에서 명함 하나를 꺼냈다.
라흐만이 손을 뻗었지만 태수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명함을 뒤로 물렸다.
[명함을 드리기 전에 먼저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무엇을 물어보기에 이리 뜸을 들이나?]
[아버님께 제가 전한 말은 전하셨습니까?]
태수는 라흐만에게 말했다.
-잠시 전할 얘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라흐만 님이 아니라 아버님, 칼리드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님이 아셔야 할 정보입니다.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무기 상인에게서 엄청난 양의 무기를 사들이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아버님께 몰래 무기 상인과의 밀매에 대해 조사해 보는 게 어떠냐고 한마디 꺼내 보심이 어떨까요?
라흐만은 피식 웃었다.
[아버님도 아셔야 할 중요한 일이었지.]
아버지 칼리드 사우디 국방부 장관에게 말했다는 뜻이다.
[아버님께선 어찌 받아들이셨습니까?]
[흔쾌히 조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전에 그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셨지.]
[그렇다면 이것을 드려도 되겠군요.]
태수는 씩 웃으며 그제야 라흐만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누구의 명함이기에 이리 조심스러운가?]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요. 남의 목숨을 함부로 건네 드릴 순 없잖습니까?]
라흐만은 명함을 받았다.
영어로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무기 상인>
명함 앞면에는 접선하는 방법을 적어 놨다.
그 뒷면에 취급하는 무기 종류와 가격이 자세히 적혀 있다.
라흐만의 안색이 변했다.
[이것은······.]
[이집트와 시리아에 무기를 대고 있는 무기 상인의 연락처를 알아 왔습니다.]
라흐만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버님께서도 아직 알아내지 못한 무기 상인의 연락처를 이리 쉽게 알아내다니······.’
새삼 앞에 앉아 있는 남자의 수완을 다시 봤다.
사우디 국방부 장관보다 빠르게 연락처를 알아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가.
[아버님께 가져다 드리면 무척 좋아하실 겁니다.]
아마도 그러실 것이다.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무기를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
요즘 군대를 정비하고, 무기를 확인하고, 예산을 검토하느라 바쁘다고 들었다.
다가온 전쟁에 준비하기 위해서다.
[아마 준비된 물량은 충분할 겁니다. 아버님께서 부랴부랴 수고스럽게 고생하시지 않아도 될 겁니다.]
이것 참, 수고를 덜어 주는 고마운 일이었다.
[무기 상인의 말로는 전쟁까지 대략 반년 정도. 1년을 넘기지 않을 것 같다고 합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황금보다 귀한 정보였다.
라흐만이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그게 정말인가?]
[직접 만나서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 명함을 받아 온 거지요.
한국까지 날아가서 말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군. 강태수, 이 빚은 다음에 꼭 갚겠다.]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는 라흐만.
그의 팔을 태수가 잡았다.
[굳이 시일을 두고 빚을 갚으실 필요 없습니다.]
라흐만이 제 팔뚝을 잡은 태수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지?]
[중요한 일이 아닙니까? 나라가 전쟁에 휩싸일지도 모르는 큰일입니다.]
태수는 똑바로 제 뜻을 밝혔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직접 뵙고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겁니다.]
라흐만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강태수는 직접 무기 상인을 만나고 왔다고 했다. 아버님께서 무엇을 묻든 나보다 자세히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고민은 짧았다.
결정은 빨랐다.
[자네도 아버님께 나와 함께 가지.]
라흐만은 외투를 챙기고 전화기를 들었다.
[공항에 전용기 준비시켜. 수도 리야드로 갈 것이다. 아버님께 라흐만이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려라.]
역시 사우디 왕족이었다.
전용기까지 있다.
‘사우디 4대 국왕이 되는 칼리드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라흐만의 아버지이며 현직 국방부 장관인 권력자.’
그를 만나러 간다.
라흐만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로!
* * *
오늘도 한청호의 서재 안에선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서재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송 비서는 눈을 감았다.
‘대체 청와대 오찬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러실까.’
송 비서는 몰랐다.
한청호가 왜 이렇게 열받았는지를.
정재계 유명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금산의 장준용에게 선전포고를 들은 기분을.
송 비서는 그 자리에 함께할 수가 없었기에 절대 모른다.
“으아아-! 장준용, 이 망할 자식이!”
그저 서재 안에서 들려오는 욕설을 들고 짐작할 뿐이다.
청와대 오찬에서 금산의 장 회장과 얼굴을 붉혔나 보구나, 하고.
한참만에 서재가 잠잠해진다.
“들어와.”
한청호의 명에 따라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가는 송 비서.
역시나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아무래도 불안해서 안 되겠다.”
한청호가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 풀면서 으르렁댔다.
“사우디에 돈을 더 뿌려야겠어.”
“사우디에 말입니까?”
“내가 잡은 동아줄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추를 매달아야지.”
돈이란 이름의 단단한 추를!
한청호가 핏발 선 눈으로 송 비서를 돌아보았다.
“사우디의 재경부 장관, 건설부 장관에게 보낼 돈을 준비해.”
“얼마나 준비할까요?”
“달러로. 한 트렁크씩.”
사과 박스보다 훨씬 무거운 트렁크를······.
한청호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입찰 담당자, 동쪽 도시 개발 담당자 위아래로 전부 기름칠할 수 있도록 한 트렁크 더.”
송 비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나 많이 준비합니까?”
“큰 건이야. 무려 10억 달러짜리 공사란 말이야, 10억 달러!”
그걸 얻기 위해서 내가 뿌린 돈이 얼만데!
한청호는 두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금산의 장준용이 저렇게 큰소리를 치는 건 믿을 구석이 있기 때문이야! 혹시 재경부 장관이랑 건설부 장관이 그놈에게도 손을 내밀었을지 몰라!”
의심이란 놈이 한청호의 가슴속에도 뿌리를 내렸다.
“금산에도 전보를 보냈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장준용이가 그 공사를 어떻게 알았겠어! 입찰 공고도 나지 않은 공사 계획을!”
화가 난다.
이대로 두 손 놓고 밀려날 수는 없다.
한청호는 송 비서를 돌아보았다.
“네가 직접 사우디로 날아가!”
“제가요?”
“직접 재경부 장관을 만나고, 건설부 장관을 만나고, 밑에 애들에게 돈 듬뿍 먹여! 알았어?”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송 비서는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서재에서 물러나왔다.
타악.
문을 닫자 한청호의 악귀 같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송 비서의 등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번엔 내 차례인가. 설마······.’
특수 요원들에게 돈을 건넸던 운전기사의 말로를 알고 있다.
오랫동안 한청호 회장을 수발하며 운전하던 자였다.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운전기사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깨끗하게 처리한 한청호였다.
꼬리를 잘라 낸다는 이유였다.
그런 한청호가 돈 배달을 송 비서에게 시켰다.
그것도 무려 10억 달러짜리 공사를 따내기 위해서!
‘이번에 내가 실패하면··· 나는 어떻게 될까?’
송 비서의 마음속에 불안과 공포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다. 명령을 거절하면 당장 비참하게 죽을 테니까.’
두렵다.
‘난 한청호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어.’
한 가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내 차례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송 비서는 덜덜 떨리는 다리로 한청호의 집에서 빠져나왔다.
한청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 * *
공항에서 전용기를 타고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에 도착했다.
리야드 공항에는 황금색 엠블럼을 달고 있는 롤스로이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차가 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엄청나게 으리으리한 대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라흐만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기가 아버님 궁전이다.]
[아주 으리으리하군요.]
저택을 보면 집주인의 재력과 권력을 짐작할 수 있는 법이다.
나라를 세우면 제일 공들여 치장하는 것이 궁궐이요, 신하들이 제일 승진하면 먼저 힘주어 꾸미는 것이 저택이다.
현재도 아파트 평수와 가격으로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건 흔한 일이지 않은가.
라흐만은 자랑스럽게 겸손을 떨었다.
[사우디 왕실은 다른 왕실에 비해 검소한 편이지.]
어디 가서 이 건물 보고 검소하다고 하면 맞아 죽을 것 같다.
[규모 자체가 엄청나서 그렇지 검소한 것은 맞다. 아버님이 군인이라서 그러신지 나와는 취향이 많이 다르시지. 너무 소박하다고 할까?]
이곳 어디가 소박하지?
얄미운 겸손이었다.
그때였다.
[어서 오시오. 내 집에 온 것을 환영하오.]
미리 라흐만의 연락을 받고 집에 와 있던 칼리드.
그가 두 팔 벌려 태수를 환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