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67화 (67/230)

67. 라흐만의 선물(1)

호텔 근처의 국밥집.

정윤아가 우겨서 들어온 국밥집이었다.

“오빠, 깍두기 좀 더 드실래요?”

“좋죠.”

정윤아가 태수의 수저 위에 깍두기를 올려 준다.

태수는 문득 처음 돌아왔을 때 태수의 수저 위에 어머니가 깍두기를 올려 주던 게 생각났다.

그때 먹던 음식도 해장국이었다.

그래서 태수는 정윤아에게 물었다.

“아가씨들은 이런 국밥보다 스테이크나 돈가스, 스파게티 같은 걸 더 좋아하지 않습니까? 호텔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점심을 함께할 수도 있었는데요.”

“다음에요. 오늘은 국밥 먹고, 다음에 레스토랑에서 근사하게 칼질해요.”

“국밥을 좋아합니까?”

“다 잘 먹어요.”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국밥을 먹는다.

“제 속이 걱정되셨습니까?”

“알고 계셨어요?”

“멀미약과 위장약을 찾던데요.”

정윤아가 밉지 않게 눈을 흘긴다.

그런데도 그녀의 입가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잠깐 벤치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니까 제 뒤를 따라오셨어요?”

“약국에 가기에 궁금해서요. 혹시 많이 아팠던 건 아닌가 걱정돼서 그랬습니다.”

“아······!”

정윤아가 얼굴을 붉혔다.

“창피하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여긴 국밥집이잖아요.”

정윤아가 식탁 밑에서 태수의 허벅지를 톡 때렸다.

아프지도 않고, 귀엽기만 하다.

“비행기 타고 멀리 간다는데, 숙취에 멀미까지 하면 너무 괴롭잖아요.”

“가는 동안 한잠 늘어지게 자면 됩니다.”

정윤아가 아쉬운 얼굴로 태수를 보았다.

“한국엔 오랫동안 못 오겠죠?”

“당분간은.”

“한국에 오면 우리 함께 레스토랑에서 밥 한 끼 같이 먹지 않을래요?”

그녀가 슬쩍 호텔 방향을 가리켰다.

“금산 호텔 레스토랑 스테이크가 그렇게 맛있다고 하던데.”

“저를 위해 국밥을 택한 게 무척 후회되나 보군요.”

“지금 제 데이트 신청 일부러 거절하시는 거죠?”

그건 아니다.

다만 그녀가 유명한 여배우가 된 후에도 지금의 약속을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몰라요. 연락처도 안 주는 분이니 어련하시겠어요? 얄미워.”

정윤아가 고개를 팩 돌린다.

그런데도 그녀의 얼굴엔 장난스런 웃음이 가득했다.

“태수 오빠.”

“네.”

“고마워요.”

“뭐가 고맙습니까?”

“제게 따끔한 조언을 해 준 거요. 정신이 번쩍 들었거든요.”

정윤아는 태수가 준 메모지를 꼭 잡았다.

“저한테 그런 말을 해 준 건 오빠가 처음이에요.”

그녀는 방긋 웃었다.

“오빠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제 사진이 도시 곳곳에 붙어 있고, 제 영화 포스터가 극장마다 걸려 있고, 제 CF가 TV를 틀 때마다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될 겁니다. 당신은 예쁘고,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아마도 연기 실력도 출중할 테니까 말입니다.”

정윤아는 수줍게 웃었다.

“바보. 오빠가 내 사진을 보면서 날 떠올려 주길 바란다는 뜻이에요.”

그녀가 태수에게 종이쪽지를 건넸다.

“내 연락처예요.”

태수가 연락처를 주지 않으니 어쩔 수 있나.

그녀는 태수에게 작게 윙크했다.

“언제든 연락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유명한 여배우가 되면 제 연락이 귀찮으실 텐데요.”

“유명한 여배우가 되면 그땐 제가 저기, 금산 호텔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사 준다니까요?”

그녀가 또 한 번 윙크한다.

“그러니 오늘 국밥값은 오빠가 내요.”

* * *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은 대사관 소속 2등 서기관 송창준이었다.

송창준이 태수의 트렁크를 차에 실으면서 웃었다.

“아니, 어째 휴가 기간보다 체류 기간이 짧은데요? 전 귀국하신 김에 한 달은 있다 오시겠거니 했는데 말입니다.”

“공사 일이 바쁜데 그리 오래 자리를 비워 둘 순 없죠. 잠깐 부모님 뵙고 왔으면 그게 휴가죠.”

송창준이 뜨악한 얼굴을 했다.

“애인도 아니고, 부모님을 뵙고 왔다고요?”

“어버이날이었지 않습니까?”

“······.”

“가슴에 카네이션 달아 드리고 왔습니다.”

“······.”

어버이날에 꽃 달아 드리는 김에 한수도 미국으로 보내고, 장말동을 만나고, 금산의 장준용도 만나고 그러는 거지.

어쩌다 보니 애인은 아니지만 예쁜 여자도 만났고.

“어디로 모실까요? 일단 숙소부터? 아니면 항구? 도로 공사 현장? 베두인족 마을?”

“사우디 관청으로 갑시다.”

“네?”

송창준이 귀를 휘적휘적 팠다.

“중동에 오자마자 또 어딜 간다고요?”

“사우디 관청이요. 사우디 서쪽 도시 개발을 담당하는 곳. 거기서 라흐만이 일하고 있을 겁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라흐만을 만나서 한국에서 가져온 일거리를 줘야겠다.

송창준은 지프차에 시동을 걸었다.

“참 바쁘게도 사십니다. 중동에 오자마자 베두인족부터 만나는 분이니 어련하겠습니까.”

“오래 걸립니까?”

“생각보다 좀 걸립니다. 지다까지 가야 하거든요.”

지다는 사우디 서쪽 도시 중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다.

이곳 역시 홍해에 닿은 항구 도시로, ‘할머니’란 뜻의 아랍어다.

메카의 외항으로 순례자들이 지나는 도시이며 무역항이 발달해 상업이 활발하다.

라흐만이 호화 크루저를 타고 태수가 일하는 항구에 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 가는 동안 공사 상황을 비롯해 제가 알아 둬야 할 것들에 대해 좀 알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송창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왠지 제가 외무부 대사관 소속이 아니라 태양 건설 소속 비서가 된 기분입니다.”

“외무부에 사직서 제출하고 태양 건설에 입사하시겠습니까? 송 서기관님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스카웃 제의를 해 주신 점,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송창준은 장난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묘한 일렁임이 생기기 시작했다.

‘진짜 외무부 때려치우고 태양 건설로 옮겨?’

대사를 따라다니면서 하는 일은 사진 찍고, 전보 보내고, 공문 작성하고, 업무 수행에 따라가는 것 등등.

그런 잡일보다 훨씬 재밌을 것 같긴 하다.

‘강태수란 남자 곁에 있으면 더 크고 멋진 세상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송창준의 마음속에서 야망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때가 일러. 지금은 외무부에서 돕는 편이 이 남자의 눈에 들기 더 쉽다.’

외무부 직원으로 있으면 도와줄 일이 많다.

전보를 보내고, 사진을 찍고, 업무 수행에 따라다니고, 통역에 나서고.

‘젠장, 이런 잡일이나 하려고 외무부에 입사한 건 아닌데 말이야.’

개탄스러운 일이다.

* * *

사우디 서쪽 도시 지다에 위치한 사우디 관청.

서류를 넘기며 일하고 있던 라흐만은 직원의 보고에 고개를 들었다.

[누가 날 찾아왔다고 했습니까?]

[얌부 도로를 공사하고 있는 외국인이라고 합니다.]

강태수가 날 찾아왔구나!

안 그래도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마침 잘됐다.

[그자를 데리고 오십시오. 한번 만나 보겠습니다.]

라흐만의 허락이 떨어지자 직원은 문을 열고 나갔다.

사무실에 홀로 남게 된 라흐만은 깍지를 꼈다.

‘안 그래도 내가 그자에게 챙겨 줄 선물을 준비했는데, 어떻게 알고 날 찾아왔는지 모르겠군.’

라흐만은 책상 위에 올린 서류 뭉치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손수 작성하고 있던 도시 개발 계획서였다.

똑똑.

[들어오시오.]

강태수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태수는 눈이 돌아가게 화려한 사무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최고급 양탄자에 최고급 원목 가구에 비싼 장식품까지.

커튼까지 금실로 수놓았고, 보석 장식도 드문드문 박혀 있다.

오는 길에 본 사우디 관청 사무실은 수수한데, 이곳만 딴 세상처럼 동떨어져 있다.

‘다시 봐도 취향이 참 사치스럽다니까.’

그러니 멀리서 호화 크루저만 봐도 코리노 족장이 대뜸 누군지 알았던 게 아닌가.

다른 왕국에 비하면 검소하다고 평가받는 사우디 왕실 사람으로서는 특이한 취향이었다.

입고 있는 옷조차 화려하기 그지없다.

멋쟁이 라흐만은 두 팔을 벌려 동맹을 맞아 주었다.

[오랜만이야. 강태수,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동맹 선물을 준비했지.]

태수 역시 환하게 웃으면서 마주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저 역시 당신께 동맹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참으로 좋은 관계다.

주고받는 관계.

라흐만은 흡족해서 웃었다.

[동맹 선물을 준비하고 날 찾아왔다니, 내가 손님을 거하게 대접하지 않을 수가 없군. 레드 와인 한잔하면서 천천히 대화를 나눠 볼까?]

이 양반이 간도 크게 관청에서 당당히 술을 마시자고 제안하는 건가?

[됐습니다. 걸렸다간 큰일 나는 거 아닙니까? 유람선도 아니라 보는 눈도 많을 텐데요.]

[자네는 외국인이고, 나는 여기 우두머린데?]

의미심장하게 웃는 라흐만.

그가 책상 밑에 숨겨 뒀던 레드 와인을 슬쩍 올려놓는다.

[4만 달러짜리 최고급 와인을 마시는 방법을 내가 제대로 배웠거든? 보게. 침전물이 마침 잘 가라앉아 있지? 이대로 마시면 된다네.]

이 양반이, 고급 와인에 제대로 맛 들린 모양이다.

두바이에서도 레드 와인을 입에 달고 살더니.

제 버릇, 제 취향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양이다.

[이번에도 허세 떤다고 대뜸 병부터 깨시는 건 아니겠죠?]

[지금 생각하면 아까워 죽겠어. 이렇게 맛있는 와인인 줄 알았으면 손님맞이로 내놓기는커녕 애초에 숨겨 두고 혼자 마실 걸 그랬다니까.]

저 4만 달러짜리 와인 역시 혼자 마시려고 몰래 숨겨 놓은 것처럼 보인다.

안 그랬다면 집무실 책상 밑에서 나왔을 리가 없지 않나.

[어때? 자네도 한잔할 텐가?]

[좋습니다. 주십시오.]

태수와 라흐만이 와인잔을 들었다.

태수는 와인을 한 모금 음미했다.

풍미가 진하고, 향기가 다채롭다.

최고급 와인은 언제 마셔도 맛있다.

[라흐만 님 덕분에 입이 호강합니다.]

[가난한 친구를 곁에 두면 떨어지는 건 벼룩과 빈대뿐이야. 반면 부자 친구를 곁에 두면 떨어지는 식은 밥도 먹음직한 법이지.]

그래서 사람들은 돈 있는 자들에게 달라붙곤 한다.

[참, 먼저 사우디 왕실에서 자네에게 보내온 선물이야.]

라흐만이 말했다.

[왕실에서 자네에게 공사 대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어.]

[공사 대금이요? 아직 도로가 완공되지 않았습니다만 왕실에서 대금을 지급해 준다는 겁니까? 라흐만 님 대신?]

삼원 건설이 수주한 공사 대금 1,250만 달러.

그중에 태수가 받게 될 돈은 70%인 875만 달러!

라흐만과 내기 판돈을 올렸다.

태수가 공사를 기한 내에 완공하면 라흐만은 석유로 대신 지불하기로 했다.

무려 3,500만 배럴의 석유로!

[아니, 이건 코리노와 하코넨 마을의 수로, 우물, 도로 공사 대금이다. 정부에서 지원하기로 결정한 돈이지.]

[아, 그렇군요.]

그 공사는 석회 광산과 시멘트 공장에서 나오는 돈으로 하고 있다.

‘요청하지도 않은 공사 대금까지 사우디 왕실에서 챙겨 줄 줄이야.’

처음부터 사우디 왕실에서 의뢰한 공사가 아니다 보니 지원받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일이었다.

기뻤다.

[사우디 왕실에 감사드립니다.]

[이 큰 공사를 사우디 국민을 위해 선뜻 해 주고도, 대가를 바라지 않은 자네에게 우리가 더 감사해야지.]

[그런데 왕실에서 얼마를 지원해 준다고 합니까?]

[1,800만 달러. 긴급 예산으로 충당했지.]

두둑하다.

심지어 삼원 건설이 따낸 도로 공사 금액보다 많다.

태수는 라흐만을 슬쩍 보았다.

[혹시 이것도 석유로 바꿀 수 있을까요?]

[하하하, 자넨 석유를 참 좋아해.]

[이번에도 같은 조건으로 부탁합니다.]

[못해 줄 것 없지. 우리도 달러로 주는 것보다 석유로 주는 게 좋아. 또 올해 12월이겠지? 도로 공사 완료에 맞춰서.]

좋아!

받아 낼 석유가 자꾸 쌓여만 간다.

곧 통장에 달러도 뻥튀기되어 쌓이겠지.

[아시죠? 말 대신 믿을 건 계약서뿐이라는 것을요.]

[당연하지. 나 역시 자네의 가르침을 뼛속 깊이 새기게 되었다네. 안 그래도 미리 계약서를 준비해 뒀지.]

라흐만이 책상 서랍을 열어 준비해 뒀던 계약서를 꺼냈다.

[치밀하시군요.]

[다 자네에게 배운 것이지. 좋은 걸 가르쳐 줘서 고맙다.]

둘은 계약서에 사인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계약서를 나눠 가지고, 둘은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오가는 계약서 속에 싹트는 신뢰!

[그럼 이번엔 내가 준비한 선물을 내놓을까?]

라흐만이 책상 위에 올렸던 서류 뭉치를 내놨다.

태수가 그걸 받아 표지의 제목을 읽었다.

<카이바-알룰라 고속 도로 건설 계획>

사우디 서쪽 도시 개발 계획이었다.

홍해를 타고 달리는, 무려 164킬로에 달하는 해안 고속 도로 공사 계획이다.

위에서 승인이 떨어졌고, 입찰 예정 공고는 6월에 발표될 예정이다.

[2,405만 9천 달러짜리 도로 공사를 동맹 선물로 주게 되었군.]

과거 삼원 건설이 최초로 사우디 도로 공사를 따냈다고 알려진 바로 그 공사였다.

‘이게 내 몫으로 돌아오다니.’

삼원 건설이 태양 건설에 인수되어서 그런가?

원래 예정되었던 운명인가, 아니면 이것 역시 태수가 노력한 성과인가.

카이바 고속 도로 건설 계획서를 보는 태수는 마음이 복잡했다.

‘과거 삼원 건설과 라흐만이 얽혔던 얌부-움라지 고속 도로 건설은 실패로 끝났다. 결국 양국 수뇌부들의 합의하에 진실을 묻어 두게 되었지. 하지만 이번엔 내가 그 공사를 이어받았다.’

현재 상황으로 보면 올해 내에 얌부-움라지 고속 도로 공사는 무리 없이 끝날 터다.

태수는 자신 있었다.

이번 공사는 사우디에서 한국 건설 회사 최초의 성공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이번 일로 라흐만의 자리도 달라졌으면 하는데. 카이바 공사는 내 손에 다시 떨어지게 되었군.’

문득 의문이 든다.

‘전생에서 삼원 건설은 이번 얌부-움라지 도로 공사를 실패했다. 한데 어떻게 다음 해에 카이바-알룰라 고속 도로 공사를 맡게 됐을까?’

사우디 왕실에서 비공식적으로 항의 서한이 올 정도로 신뢰를 잃은 삼원 건설이다.

그런데 어떻게? 대체 무슨 수로?

태수는 여기에 음모가 얽혀 있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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