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새로운 동료와 축배를 들다(4)
태수는 술잔을 들었다.
“이것을 마지막 잔으로 이만 헤어지는 게 어떻습니까?”
장준용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쩔 수 없이 태수도 따라 일어섰다.
“막잔은 무슨. 끝까지 달리지. 이렇게 좋은 날에 젊은 놈이 먼저 빼면 섭섭해.”
“괜찮으시겠습니까?”
“나 금산의 장준용이야. 이 정도는 끄떡없어. 각오를 다지는 자리에 약한 소리 따윈 딱 질색이야.”
“좋습니다.”
태수는 각오를 다졌다.
“청일의 한청호가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에 목을 맨 사이, 금산이 멋지게 바레인 조선소를 따내십시오.”
“좋아. 바레인 조선소를 따낸 실적이라면 주베일 산업항에 더 크게 어필할 수 있겠지.”
쨍.
태수와 장준용은 동시에 술을 마셨다.
이번에도 얼음이 안 든 양주 스트레이트였다.
‘이제 사우디로 돌아간다.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은 끝났다.’
사우디로 돌아가면 라흐만을 찾아갈 것이다.
‘라흐만, 내가 당신에게 선물을 안겨 드리지. 동맹이란 이름으로.’
사우디 왕실에서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그러니 라흐만 당신은 내게 아버지를 소개해 줘야겠어.
‘칼리드, 그를 만나 의논해야 할 일이 제법 많군.’
마음이 급하다.
한청호를 잡을 생각에.
‘하나씩, 하나씩. 사방에 그물을 준비해서 한꺼번에 당긴다.’
그렇게 태수는 청일 정유 사냥을 준비하고 있었다.
* * *
침대는 푹신하고, 이불은 부드러웠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빈속에 독한 양주를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이다.
‘결국 붙잡혀서 전력질주로 달렸어. 장준용이랑 다시는 같이 술 안 마신다.’
독기를 잔뜩 품었는지 연거푸 양주를 권하는 장준용이었다.
그것도 스트레이트로.
술잔 가득 찰랑찰랑하게.
‘장준용도 그렇고, 김 비서도 주당이더군. 술자리가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도 안 난다.’
술에 취한 장준용은 신나서 황금 명함을 마구 뿌렸다.
-우리 태수 다 가져! 다 줄게! 황금 명함 막 써! 우리 함께하자고! 끝까지 달려!
김 비서는 기겁해서 황금 명함을 일일이 주웠다.
-1년에 한 번 내놓지도 않는 이 귀한 명함을! 알았으니까 그만 좀 뿌려요!
그러면서 태수에게 은근슬쩍 자기 명함을 하나 더 찔러 넣었다.
-고작 회장님 스케줄을 물어보는 데 쓰라고 드리는 거 아닙니다.
중요한 일에 쓰라고 신신당부하는 김환이었다.
다들 명함을 못 줘서 안달 난 사람들 같았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눈도 못 뜨겠다.
목이 마르다.
“으음······.”
“목이 타세요? 물 드릴까요?”
젊은 여자의 목소리다.
태수는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렸다.
단발머리에 투명하도록 흰 피부를 가진 여자였다.
그것도 입이 떡 벌어질 미인.
“이게 어떻게 된······.”
“기억나지 않으세요?”
어렴풋이 기억난다.
헤어질 무렵, 함께 술을 마신 전우들은 장렬히 전사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남자들 옆에 여자들이 한 명씩 붙었다.
이 여자는 태수를 부축해 아래층 호텔 방까지 함께 왔다.
“우선 물부터 마셔요.”
태수가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다행히 옷을 제대로 입고 있었다.
‘휴- 순간 아찔했다.’
이렇게까지 폭음을 한 건 무척 오랜만이다.
당연히 술 취해 여자와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것도 낯선 일이다.
“여기요.”
“고맙습니다.”
태수는 여자가 내민 물잔을 받았다.
목이 너무 말라서 단숨에 한 컵을 비웠다.
여러모로 머리가 아프다.
태수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머리가 많이 아프세요?”
“당신은 누굽니까?”
“어제 이름을 말해 줬는데, 그것도 잊어버렸어요?”
그녀가 말갛게 웃었다.
“정윤아라고 해요.”
“정윤아?”
태수는 흠칫했다.
‘설마 탤런트 정윤아? 영화배우 정윤아라고?’
70년대 최고의 미녀로 알려진 영화배우이자 탤런트.
75년 영화로 데뷔하게 된 여배우.
술집 여자 출신이 아니냐는 소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연예인.
‘가까이서 보니까 정말 예쁘군.’
다시 봐도 그녀가 맞다.
단군 아래 최고의 미녀라는 별명처럼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여자다.
“이제는 제 이름을 기억할 수 있겠죠? 태수 오빠.”
“태수 오빠?”
“오빠라고 부르기로 했잖아요. 그것도 잊은 건가요?”
기억난다.
그녀에게 호텔까지 부축해 줘서 고맙다고 차비를 챙겨 줬다.
그렇게 그냥 보냈는데?
“왜 안 가고 지금까지 여기 있습니까?”
“그냥 가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저기 앉아서 오빠가 깨길 기다리다 보니 밤을 새우고 말았어요.”
그녀가 소파를 가리켰다.
그녀가 앉아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뭘 걱정하는 겁니까?”
“이렇게 아무 일 없이 돌아가도 되나 해서요. 저 사실은 엄청 각오하고 온 거였거든요.”
태수도 기억한다.
태수를 부축하는 가녀린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태수는 차비를 쥐여 주고 그녀를 보냈다.
“감독님이 이번 일만 잘하면 영화에 출연시켜 준다고 하셨거든요.”
태수는 눈을 감았다.
어떻게 된 건지 잘 알겠다.
“어떤 감독이 그런 걸 빌미로 이런 짓을 시킵니까?”
“화내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저도 밤새 후회 많았어요.”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다.
“그냥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기회를 잡고 싶었어요. 제가 잠깐 어떻게 됐었나 봐요. 미안해요.”
태수는 잠시 그녀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최고의 미인이면서 발연기 논란이 많은 배우였지. 발연기 꼬리표를 떼어 내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했다고 들었다. 데뷔 후 5년이 지나면서 발연기란 말 대신 흥행 영화배우란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그래서 태수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기회를 잡는다고 좋은 건 아닙니다. 한 번 인식된 발연기 꼬리표를 떼어 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까요.”
“하지만 좋은 기회잖아요. 이 기회를 놓치면······.”
“기회는 또 옵니다. 그리고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제대로 잡을 수 있습니다.”
정윤아가 태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응이 꼭 다람쥐 같아서 귀여웠다.
“차라리 연기를 체계적으로 배운 이후에 야심 차게 도전해 보면 어떨까요? 그럼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감독들이 앞다퉈 러브콜을 보낼 것 같은데요.”
“연기를 체계적으로 배운다고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제안이었다.
“훌륭한 연기 선생님을 알고 있습니다.”
태수는 청일 그룹에서 오래 일했기에 연예계 바닥에 대해서도 얼추 알고 있다.
광고 모델을 섭외하는 일도, 신문사와 접촉하는 일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 연극으로 다져진 연기 실력을 갖췄으면서, 성추문 하나 없는 연기 선생들도 꽤 안다.
“얼굴로 때우는 미인은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연기가 밑바탕이 되지 않은 여배우는 인형처럼 사용되다 버려집니다. 당신은 인형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에요. 그런 건 싫어요.”
“그렇다면 밑바닥부터 착실하게. 기본기부터 확실하게. 그런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각오할게요.”
“좋습니다. 그 각오를 믿어 보겠습니다.”
태수는 펜을 들어 메모지에 휘갈겼다.
정확한 전화번호는 모르지만 연기 선생이 될 만한 사람의 이름과 극단 명칭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고마워요.”
태수가 준 메모지를 받고서 정윤아는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이 또 다람쥐 같아서 태수는 단단히 당부했다.
“앞으로 이상한 감독이 영화 출연을 빌미로 이런 짓 시킨다고 응하면 절대 안 됩니다. 평생 두고두고 이상한 꼬리표가 따라붙습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아뇨, 싫어요.”
정윤아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처음이에요. 밤새 반성 많이 했고, 여기까지 온 것도 후회 많이 했는데요. 그런데 지금 태수 오빠 말을 듣고 나니까······.”
그녀가 배시시 웃는다.
“여기 와서 오빠를 만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잡은 기회는 오빠였나 봐요.”
큰일 날 소리다.
태수는 손을 저었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어서 일어납시다. 남들이 보면 오해할 테니까요.”
“오해? 혹시 오빠 결혼하셨어요?”
“아닙니다.”
“다행이다.”
정윤아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태수 오빠, 전 꼭 최고의 여배우가 될 거예요. 오빠 말대로 연기력부터 쌓고 도전할게요. 이런 접대도 기회랍시고 흔들리지 않겠어요.”
“꿈을 응원하겠습니다. 최고의 여배우가 되길 바랍니다.”
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윤아가 태수의 팔을 슬쩍 잡았다.
“그런데 오빠.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궁금한 게 뭡니까?”
“결혼도 안 했고, 술도 마셨는데, 왜 저를 그냥 보내셨어요? 차비까지 주면서.”
정윤아가 태수가 준 차비를 만지작거린다.
“제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세요?”
“마음에 듭니다.”
정윤아의 눈에 빛이 반짝인다.
“정말요? 제가 예쁘지도 않고, 매력 없고, 그래서 절 거절한 게 아니었어요?”
“당신은 아주 예쁩니다. 매력도 있고. 하지만 억지로 나온 여자를 안는 취미는 없어서 말입니다.”
정윤아가 수줍게 웃으면서 말했다.
“전 오빠가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녀는 태수에게 이름을 알려 달라 먼저 졸랐다.
그녀가 태수의 주머니에 차비를 도로 집어넣으면서 웃는다.
“차비는 받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저더라 가라고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이 여자를 어쩌면 좋을까.
“스폰서가 되어 달라는 얘깁니까?”
“아뇨, 말했잖아요. 전 스폰서도, 접대도 이제 사양하겠다고. 오빠가 연락처도 안 주니까 계속 만나 달라고 조르지는 않겠어요.”
그녀가 웃으며 태수의 입술을 삼킨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이라도 그냥 제 호감을 받아 주면 좋겠어요.”
태수를 보는 여자의 눈이 예쁘게도 휜다.
“차비를 거절한 건 당신입니다.”
태수는 그녀의 호감을 거절하지 않았다.
* * *
1973년 5월 11일 청와대 오찬 장소.
정재계 유명 인사들이 점심 식사에 초대되었다.
금산의 장준용, 청일의 한청호도 물론 이 자리에 나왔다.
박정환과 점심을 함께하며 이런저런 말을 나누던 차에 ‘피랍된 한국인 구출 작전’까지 대화가 흘렀다.
“이번 일로 각하의 이미지가 한층 좋아진 것 같습니다.”
“각하를 향한 국민들의 반응이 연일 뜨겁습니다.”
“모두 각하께서 과감한 결단을 내린 덕분이지요.”
몇 명이 앞다투어 아부한다.
박정환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
“하하하, 뭘 그런 것을 가지고 유난이야. 국민이 위험에 처했다면 나라 가 구해야지. 당연한 일을 한 것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박정환은 흡족해한다.
강태수 말대로 이번 일로 이미지 쇄신을 좀 한 것 같아서 마음에 든다.
박정환은 식사 대신 차만 홀짝이는 금산의 장준용을 돌아봤다.
“장 회장, 오늘따라 영 음식을 못 먹던데. 어디 아픈가?”
“아닙니다. 멀리서 찾아온 친구를 만나 밤새 술잔을 기울여서 그럽니다. 저도 나이가 들었는지 숙취가··· 흠흠.”
겁도 없이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위장에 들이부었다.
젊은 놈의 패기에 지고 싶지 않아 이 악물고 전력으로 마구 달린 결과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도 없는 장준용이다.
그 초췌한 몰골을 보며 박정환은 짓궂게 웃었다.
“참 별일도 다 있군. 대체 얼마나 마셨기에 금산 장 회장의 입에서 숙취 소리가 나올까?”
박정환도 장준용이 주당이라는 걸 잘 안다.
“꿀물 좀 더 내오라고 이를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각하. 괜찮습니다.”
박정환이 장준용에게 호의를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
“사우디 왕실에서 서신이 왔어.”
간밤에 사우디 왕실에서 공식적인 서신이 도착했다.
“장 회장, 자네를 칭찬하더군. 덕분에 내가 면이 좀 섰어.”
삼원 건설이 깎아 먹은 체면을 장준용이 적당히 올려 주었기 때문이다.
유조선의 물 덕분이다.
“제가 한 일이 뭐 있겠습니까? 하지만 각하께서 체면이 섰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금산의 장준용이 어떤 식으로 가뭄 극복에 도움을 줬는지 자세히 적은 서신이었다.
또한 서신의 대부분은 박정환이 빠른 일 처리를 칭찬하고 있었다.
사우디 왕실은 박정환의 노고에 감사하며 앞으로 더욱 든든한 우방이 되어 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박정환은 내내 기분이 좋았다.
“장 회장, 이번에 유조선을 사우디 항구에 몇 달 더 정박하기로 하고, 제법 괜찮은 공사를 얻었다지?”
“아직 확정되진 않았습니다. 그저 말이 오갈 뿐이지요.”
“한 번 달려들어서 해 봐. 10억 달러에 가까운 대공사라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눈을 크게 떴다.
‘10억 달러짜리 대공사?’
‘대한민국 정부 1년 예산의 반?’
하지만 사우디 공사라면 끼어들 방법이 없다.
사우디 왕실의 진입 장벽이 너무 높다.
다들 반쯤 체념하고 말았다.
반면 한청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멍청한 놈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벌써 공사를 따낸 것처럼 지껄이는군. 사우디 왕실에서 내게 뭐라고 전보를 보냈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장준용은 한청호를 힐끗 보았다.
‘한청호, 생각대로 의기양양한 얼굴이로군. 든든한 동아줄을 잡았다 이거지?’
그래서 장준용은 회심의 한 방을 날렸다.
“각하, 이번 주베일 산업항 입찰은 공동 입찰로 추진하고자 합니다.”
공동 입찰?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청호 역시 뜻밖이라 미미하게 눈이 커졌다.
박정환은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장 회장, 자네는 누구와 손잡을 생각인가? 설마 일본 기업인가?”
일본이라면 이해가 간다.
그들이 자본력과 기술력, 그리고 해외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이 대단하다.
그들과 손잡으면 입찰 경쟁에서 제법 유리한 고지를 취할 것이다.
하지만 장준용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어딘가? 그리스?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모두 아닙니다. 해외에 국부를 유출할 필요가 있나요.”
“그렇지! 아주 좋다!”
박정환이 무척 좋아했다.
한청호는 머리를 굴렸다.
‘설마 지금 장준용이 내게 공동 입찰을 제안하는 건가?’
한청호가 아니라면 여기 또 누가 있으랴.
사우디 왕실에 단단하게 끈이 닿아 있는 자는 여기서 한청호뿐이다.
하지만 한청호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내가 왜 너와 손을 잡아야 하지? 내 먹이를 가로챌 생각이라면 어림도 없다.’
장준용이 한청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태양 건설 강태수와 함께 일을 추진해 볼까 합니다.”
강태수?
한청호는 눈썹을 와락 구겼다.
‘그 재수 없는 자식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차기범만 아니었더라면 중동에서 진즉 죽어 없어져야 할 이름이었다.
장준용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한청호를 보았다.
“금산과 태양 건설이 두 손을 잡고서, 함께 사우디 건설 역사에 큰 획을 그을 겁니다.”
명백한 도발이고, 대놓고 날리는 선전 포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