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새로운 동료와 축배를 들다(3)
한청호의 서재.
한청호는 의자에 앉아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똑똑.
“들어와.”
“아버지, 절 부르셨다고요?”
키 크고 잘생긴 청년이 들어왔다.
창백한 피부에 차갑고 비열해 보이는 눈빛, 얇은 입술을 가진 자다.
한청호의 아들 한일권이었다.
“이 시간까지 뭐하느라 집에 붙어 있지를 않아?”
“아버지 전 한창때잖아요.”
“한밤중이다. 통금 시간 지난 지가 언젠데?”
“아버지 저 성인이에요. 아침 해 뜨고 들어온 것도 아닌데, 왜 트집이실까.”
아들의 눈이 번뜩인다.
살인자의 눈이었다.
“지금까지 어디서 뭐 하고 돌아다녔느냐?”
“밥 먹고, 친구 만나고, 여자애들이랑 좀 놀고, 뭐 그랬죠.”
“김봉남이 아들이랑 같이?”
“다 알면서 자꾸 떠보실 거예요?”
둘이 합이 맞아 나쁜 짓을 지능적으로 하고 다닌다.
대부분 아들이 주도하고, 김봉남의 아들이 손발이 된다.
“이번에도 거하게 한 건 사고 쳤더구나.”
“사고 치긴요. 건전하게 놉니다, 건전하게.”
“송 비서 말이랑 다른데. 똑바로 말 못해?”
“송 비서가 뭐라든가요?”
“김봉남이 아들이랑 여자 하나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렸다면서?”
“우리 송 비서가 일을 참 잘하네요.”
저쪽에서 서 있던 송 비서는 움찔 몸을 떨었다.
“내가 다 알아서 입도 막아, 돈도 뿌려, 심지어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잘해 뒀는데 그걸 어떻게 아셨을까나?”
“저, 저, 전······.”
겁에 질린 송 비서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버려진 여자를 응급실에 데려가 치료를 해 준 것도, 대신 사과를 하고, 따로 두둑하게 위로금을 전달한 것도 송 비서가 한 일이었다.
“아유, 또 뭘 겁을 먹고 그러시나. 내가 당신을 한강에 당장 집어 던지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과 달리 눈은 차갑기 그지없다.
지금은 못할 뿐, 언젠가는 꼭 한강에 던지겠다는 경고를 송 비서가 어찌 모를까.
“아버지 돈 많잖아요. 이럴 때 좀 씁시다. 죽을 때 무덤까지 가져갈 것도 아니고. 벌레 새끼들 입 막는 거 무마한다고 쓰면 또 얼마나 쓴다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다.
자신의 후계자가 되어 이 모든 것을 물려받을 놈이다.
“이게 대체 몇 번째야!”
한일권은 떳떳했다.
“아버지, 난 말입니다. 벌레가 사람 행세하는 꼴은 못 봅니다.”
한일권은 손가락으로 벌레 시늉을 해 보인다.
“바퀴벌레가 내 몸을 기어 다니고 있어요. 모기가 자꾸 귀찮게 얼쩡대고 있어요. 짜증 나죠? 열받죠? 그럼 어떡합니까? 때려잡아야죠.”
태연하게도 웃는다.
“사람도 똑같습니다. 전 내 앞에서 알짱대는 벌레 같은 놈들이 역겨워요. 그런 놈들은 꼭 주제도 모르고 맞어도 싼 짓만 해요. 웩-”
“닥쳐라, 이놈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한청호는 손에 잡히는 것을 집어 던졌다.
책이 날아가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
한일권의 뺨에 가느다란 선이 생기며 피가 조금 흘렀다.
“이 새끼가 반성은 못할망정 내 앞에서 눈 똑바로 뜨고 있어? 너도 내 앞에서 알짱대다 처맞아 볼래?”
한청호는 화가 나서 골프채를 휘둘렀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한일권 옆에 있던 조선 백자들이 터져 나갔다.
“꿇어! 이 빌어먹을 새끼야!”
한청호가 골프채를 다시 휘둘렀다.
이번엔 한일권의 머리를 향해.
한일권이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부웅-
골프채가 한일권의 머리카락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나갔다.
그대로 있었다가는 머리가 터졌을 스윙이었다.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자꾸 이렇게 망종 짓을 하고 다니면 내 손에 맞아 죽는 거야! 알겠어? 작작 좀 해!”
“알았어요. 아버지 나이도 있으신 분이 힘도 좋으셔.”
한일권은 히죽 웃었다.
“우리 아버지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화가 나셨을까?”
“너, 강태수 알아, 몰라?”
“강태수?”
그럼 아버지가 강태수 때문에 화가 나신 건가?
“모릅니다.”
“정말 몰라? 맹세코 몰라?”
“몰라요. 그런 이름은 들어 본 적도 없어요.”
“나가! 나가서 다시 잘 생각해 봐! 기억나면 다시 들어와!”
와장창!
한일권이 서재를 부수기 시작한다.
서재 밖으로 나온 한일권.
새파랗게 질린 송 비서를 보면서 눈을 빛냈다.
“송 비서, 나한테 할 말 없어요?”
송 비서는 작게 떨었다.
“강태수에 대해서 내가 차근차근 제대로 알아야 할 것 같은데요.”
* * *
포항 철강 사장실.
박태종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흐음, 강태수가 이번에 큰일을 해 줬다는구나.”
“우리 사장님이요?”
사장실에 같이 퇴근을 기다리던 아들, 박철완이 눈을 빛냈다.
“중동에서 도로 공사는 잘 해내고 있다고 하던가요? 중동 서부 지방의 혈관이 될 고속 도로 공사잖아요. 얀부 항도 크고 깊게 새로 손봤다던데.”
박철완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나도 중동으로 따라가고 싶었는데 아쉬워요. 홍해를 따라 사막을 타고 내려가는 석유 유통의 기반을 내 손을 짓고 싶었는데.”
박태종은 그런 아들을 보면서 웃었다.
“너도 참 어지간하구나. 하지만 이번에 강태수는 위험할 뻔했다는구나.”
“위험? 사막에서 강도라도 만났대요?”
“강도가 아니라 암살자.”
“헉!”
그것도 한청호가 보낸 암살자를 만났다.
복면을 쓰고 한밤중에 숙소에 침입해 총을 쏘았다지.
“안 되겠어. 아무래도 강태수의 신변이 불안하구나.”
박태종은 전화기를 다시 들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자 대뜸 용건부터 전한다.
“나 박태종이요. 사람을 하나 구하고 싶은데.”
쓸 만한 놈이 필요하다.
입이 무겁고, 의리가 있으며 실력 또한 출중한 놈으로.
“그놈, 아직 제대 안 했어? 내가 괜찮은 일자리를 소개해 주고 싶은데 말이야.”
그놈이 단점은 확실하지만 장점 또한 확실한 놈이다.
* * *
청일을 잡겠다.
반드시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겠다.
태수의 대답이 떨어지는 순간, 장준용은 무릎을 쳤다.
“바로 그거야! 자네라면 내가 원했던 바로 그 대답을 할 줄 알았어!”
장준용은 크게 기뻐한다.
태수 역시 기쁘다.
청일의 한청호를 함께 잡자는 동료가 생겼다.
그를 눈앞에 두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한청호는 간과하는 게 하나 있다.
“연줄만이 일을 성사시키는 건 아닙니다. 연줄은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일 뿐이죠.”
그러니 좋은 연줄 잡았다고 승부를 장담하면 안 될 것이다.
“그래, 자네도 아는군. 한청호가 즐겨 쓰는 수법이 그거지. 연줄을 이용하는 것. 동서양을 불문하고 옛날부터 잘 통하는 방법이긴 하지.”
학연, 지연, 혈연에 로비와 뇌물.
사람이 하는 일이니 사람을 매수해 제 뜻대로 일을 추진하는 것.
그렇게 많은 돈으로 많은 사람을 포섭해 일하는 사람이 한청호였다.
“장 회장께서 해 주셔야 할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내가 해 줘야 할 일?”
장준용의 눈에 생기가 돈다.
사우디 국왕을 직접 포섭하지 못했던 게 아쉬웠던 모양이다.
“한청호의 관심을 모아 주십시오.”
“어디로?”
“주베일 산업항 공사로.”
장준용은 피식 웃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지금도 한청호는 주베일 산업항에 눈독 들이고 있는데.”
“좀 더 강하게, 욕망에 잡아먹히도록, 완전히 눈이 멀도록.”
태수는 과일 안주 한 조각을 집어 높이 들었다.
“이길 확률이 높으니 당연히 기대도 높겠죠.”
무려 재경부 장관과 건설부 장관을 잡았으니까.
태수는 과일을 높은 곳에서 툭 떨어뜨려 보였다.
“하지만 기대가 높았던 만큼 실망도 큰 법입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질수록 충격은 클 겁니다. 흙바닥에 구르면 먼지 꽤 묻겠습니다.”
그게 아주 마음에 든다.
한청호가 실패했을 때 오죽 뼈아플까?
그러자 장준용은 태수의 뜻을 깨달았다.
“한청호의 욕망을 부채질하란 뜻이군. 더 높이, 더 멀리, 기대감과 자신감이 하늘 끝에 닿도록.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불에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바로 그겁니다. 불을 보고 달려든 부나방이 불에 타 죽길 바랍니다.”
“내가 어떤 점을 들쑤시면 좋을까?”
“경쟁심, 열등감, 위기감, 의심, 걱정, 불안. 이런 감정들을 흔들어 주십시오.”
태수가 확실히 말했다.
“전 불안해진 한청호가 이번 일을 성공하기 위해 돈을 물처럼 뿌려 대길 바랍니다.”
태수는 한청호가 더 욕심내길 원한다.
금산의 장준용을 상대하느라 잔뜩 긴장하게 되면 더욱 확실하게, 많이, 여러 사람에게 돈을 뿌릴 터다.
‘난 한청호가 처절하게 패배하길 바란다. 돈은 돈대로 잃고, 일은 일대로 놓치길 바란다.’
한청호를 잡는다.
금산의 장준용과 함께.
“제가 사우디 국왕을 만나 포섭해 보도록 하죠.”
“할 수 있겠나? 지금으로선 매우 어려운 일일 텐데.”
“길이 없으면 길을 찾을 겁니다. 찾을 길도 없으면 길을 만들면 그만입니다.”
태수는 씩 웃었다.
“저 역시 역사를 새로 쓰는 걸 좋아합니다. 회장님처럼.”
불가능한 일을 실현시킬 때 역사는 새로 쓰인다.
하지만 무모한 일은 아니었다.
태수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 입찰이 75년이다. 공사 개시는 76년이지.’
그렇기에 자신할 수 있다.
한청호가 잡은 동아줄은 썩은 동아줄이라고.
‘칼리드는 75년 3월에 차기 국왕으로 즉위한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그가 결정한다.’
75년에 현재 국왕이 암살당해 비명횡사한다.
그 후에 즉위하는 건 칼리드.
중동 전쟁을 견인하며 영향력이 막강해진 국방부 장관 칼리드가 정적들을 물리치고 왕좌를 차지한다.
‘라흐만은 칼리드의 아들이다. 그리고 장준용이 잡고 있는 끈, 압둘라는 칼리드의 오른팔이고 말이야.’
태수는 이해하고 있었다.
전생에서 어째서 한청호가 아니라 장준용이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냈는지.
한청호는 연줄에서도 장준용에게 밀렸던 것이다.
‘한청호, 이번에도 패배의 쓴맛을 제대로 보여 주마.’
게다가 장준용이 태수에게 직접 부탁했다.
‘장준용은 내게 현재 국왕을 포섭해 달란 부탁은 하지 않았어.’
장준용이 포섭을 부탁한 인물은 한청호의 연줄보다 한 끗발 높은 ‘사우디 국왕’이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결정할 사우디 국왕은 칼리드. 라흐만의 아버지지.’
이렇게 사우디 국왕을 포섭한다는 불가능한 확률이 해 볼 만한 확률로, 해 볼 만한 확률이 매우 높은 확률로 변했다.
‘나의 든든한 동맹 라흐만에게 아버지 좀 소개해 달라고 졸라야겠군.’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집주인인 아버지도 볼 수 있겠지.
장준용이 손을 내밀었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 반드시 우리가 따오자.”
태수가 그 손을 맞잡았다.
“승리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되겠군요.”
장준용은 다른 손으로 술잔을 들었다.
“뜻을 합친 것을 기념하며 건배.”
태수 역시 술잔을 들어 장준용의 잔과 부딪쳤다.
“험로를 함께 걷게 된 동료를 환영하며 건배.”
쨍.
맑고 고운 소리였다.
* * *
한청호의 서재.
사우디에서 전보가 왔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 입안 계획을 서두르고 있소.
-이 속도라면 이르면 2년, 늦으면 3년 후 입찰 공고를 낼 수 있을 것 같소.
-청일의 스폰서를 할 현지 기업도 알아봤소.
-사우디 재경부 장관과 건설부 장관이 합심하여 밀어주는 일이오.
-당신이 보기에 승자는 누가 될 것 같소? 아마도 지금 전보를 보며 웃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전보를 보고 한청호는 드물게 크게 웃었다.
“하하하!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이제 내 것이다!”
무려 10억 달러에 달하는 대공사!
사우디 동쪽 도시 주베일에 석유 산업의 메카!
그 대업은 바로 한청호, 청일 건설에서 이뤄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