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새로운 동료와 축배를 들다(2)
박정환은 차기범에게 말했다.
“삼원 건설 사장, 중앙 정보국에 데려가.”
“어쩌실 작정입니까?”
“강태수가 직접 진상한 놈이다. 그 뜻이 무엇이겠나? 이놈에게 삼원 건설을 제대로 뜯어내란 뜻이겠지.”
공사의 재개를 위해 사우디 정부에 공식적으로 공문을 보냈다.
삼원 건설은 태양 건설에 인수되었기에 도로 공사는 태양 건설이 맡아 끝낼 것이라고.
“내 입으로 뱉은 말이니 내 손으로 마무리해 줘야지.”
별로 어려울 일도 아니다.
그까짓 건설 회사 하나 주는 것쯤이야.
“삼원 건설을 태양 건설에 넘기라고 해. 인수 절차 밟아. 순순히 협조하면 풀어 줘.”
이건 박정환이 미리 준비하는 태수의 선물이었다.
“각하, 그런데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뜻밖에도 차기범이 제 뜻을 피력한다.
박정환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지금 내 명을 거역하는 건가?”
“아닙니다.”
차기범이 말했다.
“삼원 건설 놈들, 잠깐 털었는데도 먼지가 풀풀 납니다. 협조했다고 그냥 풀어 주기엔 죄목이 심상치 않습니다.”
“죄목이 뭔데?”
“경범죄부터 중범죄까지 다양합니다. 그럼 국내에서 한 범죄부터 고할까요, 아니면 사우디에서 한 범죄부터 보고 드릴까요?”
박정환이 주먹으로 팔걸이를 내려쳤다.
“이런 고약한! 국내외 안팎으로 저지른 범죄란 말이지? 이 망할 새끼들이 감히 대한민국 간판에 똥칠을 해?”
국내는 그렇다 치고 사우디에서까지 범죄를 저질러?
그것도 대한민국 건설 회사란 간판을 내걸고?
“해외에 나갔으면 국위 선양하고 외화나 벌어 올 것이지 도망간 것도 쪽팔려 죽겠는데. 거기다 범죄?”
그놈들이 공사를 내팽개치고 도망가는 바람에 사우디 왕실에서 박정환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다.
그걸 받고 박정환이 얼마나 쪽팔리고 짜증 났던가.
차기범은 삼원 건설이 했던 일들을 쭉 읊었다.
눈 감아 줄 수 없는 죄목들이 줄줄이 나온다.
“정치 자금을 세탁하기 위해서 만든 건설 회사입니다. 그래서 주로 관급 공사를 맡아 국고를 비자금으로 세탁해 왔습니다. 정치인들 더러운 뒤처리도 도맡아 했답니다.”
“이 쓰레기 같은 새끼들이!”
“삼원 건설 사장부터 임원들이 전원 조직 폭력배 출신입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난다.
“이 건달 새끼들, 모조리 중앙 정보국으로 끌고 가. 주머니에 든 먼지 하나까지 전부 털어.”
그걸로도 성에 안 찬다.
“삼원 건설, 이참에 연루된 놈들 전부 색출해서 집어넣어. 나머지는 전부 강태수한테 주고.”
그제야 차기범이 허리를 굽혔다.
“각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삼원 건설이 추진하고 있던 아파트 공사며 관급 공사도 전부 강태수에게 넘길까요?”
“전부 넘겨.”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것 또한 태수에게 주는 차기범의 작은 선물이자 보답이었다.
차기범은 태수의 전보가 생각났다.
-이래도 내가 당신에게 고마워해야 합니까?
맹랑한 놈이지만 마음에 든다.
* * *
금산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자리 잡은 바.
그중에서도 VIP들을 접대하기 위한 룸이 따로 있다.
태수와 장준용은 그곳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자네라면 시원시원하게 얘기가 잘될 줄 알았어.”
장준용은 매우 흡족해했다.
그래서 품속에서 직접 선물을 꺼냈다.
황금 명함이었다.
“받게.”
“이건 왜 주십니까?”
“주는 게 아니라 돌려주는 걸세.”
장준용은 태수의 손에 황금 명함을 턱 올려놓았다.
“유조선을 쓰는 대가는 사우디 왕실에서 받기로 했어. 그 대가로 난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받아 올 생각이고.”
“그건 사우디 왕실과 장 회장님 사이의 일입니다. 어찌 제가 그 덕을 볼 수 있겠습니까?”
“옆에 있다가 덕 좀 얻어 받으면 어떤가? 그래야 나도 자네 덕을 좀 볼 것이 아닌가.”
장준용은 호쾌하게 웃었다.
“사우디 왕실에서 주베일 산업항을 호락호락 내어 주지 않을 것일세.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니까. 당연히 그렇겠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공과 사는 분명히 구분할 것이다.
유조선 물이 아무리 비싸 봐야 9억 달러가 넘는 주베일 산업항만 할까.
“그래도 유조선 물 때문에 입찰서를 내어 볼 수 있는 기회라도 얻었어.”
그 기회를 잡기 위해 무수히 많은 건설사가 앞다투어 로비를 벌인다.
큰 공사를 따기 위해서 별짓을 다 한다.
장준용이 유조선을 빌려줘 물을 몇 번이나 퍼 날라도 택도 없을 정도로.
하지만 사우디 왕실은 장준용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자네도 알다시피 사우디는 공사 입찰에 참여하기가 어려워. 외국인에겐 스폰서가 붙어야 하는데, 그걸 만드는 게 또 일이란 말이지.”
사우디는 진입 장벽이 높다.
하지만 일거리는 많다.
태수가 탐냈듯이 장준용도 탐이 났을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힘 좀 써 줘야겠네.”
“제가 힘이 어디 있겠습니까?”
코딱지만 한 태양 건설을 가진 태수다.
금산의 장준용이 가진 힘과는 격차가 크다.
하지만 장준용은 고개를 저었다.
“금산이 외국에서도 금산이겠나? 나도 밖에 나가면 그리 큰소리칠 주제는 안 된다네.”
박정환의 비호 아래 무럭무럭 크고 있는 금산 그룹이다.
하지만 아직까진 국제적으로 이름 있는 기업은 아니었다.
사우디에선 더욱 그렇다.
“지금 내겐 사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필요해.”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십니까?”
“돈은 내가 대겠네. 그러니 자네가 그 돈을 들고 가서 사우디 왕족의 마음을 사로잡아 줬으면 좋겠어.”
마음에 드는 제안이다.
하지만 의아했다.
“장 회장님께서 직접 움직이시면 간단한 일이 아닙니까?”
“그게 여의치 않아서 그렇다네. 내게 다른 사정이 있다고만 알아 두게.”
장준용의 표정이 조금 어두웠다.
그래서 태수는 더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만 참는다.
언젠간 알게 되리라.
“대체 누구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으십니까?”
“사우디 국왕.”
태수는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그게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태수에게 사우디 국왕을 만나라는 부탁 자체가 말도 안 된다.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알고 있네. 하지만 청일의 한청호가 워낙 대단한 끈을 잡고 있어서 말일세.”
“한청호가 누구의 끈을 잡고 있는지 아십니까?”
“라흐만이란 자에게 오랫동안 공을 들였었지. 하지만 최근에 갈아탔다네.”
그건 알고 있다.
라흐만이 한청호에게 이를 가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게 누굽니까?”
“파흐드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장준용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려 재경부 장관이야. 그러니 한청호보다 한 끗발 높으려면 사우디 국왕밖에 없지 않은가.”
골치 아프다.
한청호가 잡고 있는 끈이 하필이면 재경부 장관이라니.
파흐드는 초대 국왕의 9남으로, 칼리드 다음인 5대 국왕으로 즉위하는 자다.
‘한청호가 왜 라흐만의 손을 끊어 냈는지 알 것 같군. 재경부 장관을 잡았구나.’
국방부 장관이라는 칼리드 역시 영향력이 대단하지만 라흐만은 그의 아들.
한 다리 건너이기 때문이다.
‘한청호가 국방부 장관 아들과 재경부 장관을 천칭 위에 올려놓고 저울질했겠군.’
그 결과 국방부 장관의 아들은 아웃.
대신 현재 막강한 영향력을 보이는 재경부 장관을 덥석 잡았을 것이다.
영리하게 처세한 결과다.
‘라흐만은 국방부 장관 칼리드의 후계자인 줄도 모르고.’
칼리드에게는 아들이 많다.
라흐만은 12번째 아들이다.
그 위로 형들이 줄줄이 있다.
한청호는 라흐만이 칼리드가 가장 총애하는 아들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이거 재밌게 돌아가는군.’
태수는 장준용에게 물었다.
“사우디 국왕을 잡자는 건 한청호와 경쟁하겠단 뜻이겠죠?”
“그래, 한청호 역시 냄새를 맡았어. 주베일 산업항 공사에 눈독 들이고 있지. 다른 건 다 내가 앞서는데, 연줄에서만큼은 밀리게 생겼어.”
무려 9억 3천만 달러짜리 공사다.
대한민국 정부의 1년 예산 중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의 공사니 한청호가 군침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터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재경부 장관만으로는 주베일 공사를 거론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아닐세. 한청호가 이번에 끈을 제대로 골랐어. 재경부 장관이 누구와 한 편인 줄 아나?
“누구와 한 편입니까?”
“투르키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초대 국왕의 4남이네. 다음 왕위를 노리며 칼을 갈고 있는 자이지.”
“4남이요?”
투르키라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는 다음 왕위를 얻지 못한다.
초대 국왕의 3남인 파이살이 현재 국왕, 그리고 다음 국왕은 5남인 칼리드다.
그 가운데 있는 4남은 쏙 빠졌다.
‘그렇다면 지금 칼리드와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는 자겠군.’
결과적으로 칼리드에게 밀려 국왕 자리를 빼앗길 사람이다.
칼리드 다음에 즉위하는 국왕이 9남인 재경부 장관.
4남은 끝내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다.
“4남 투르키는 현재 어떤 직책을 맡고 있습니까?”
“건설부 장관.”
이런, 하필이면.
장준용은 한숨을 쉬었다.
“이젠 알겠지? 내가 왜 사우디 국왕을 포섭하려고 하는지 말이야.”
알다마다.
재경부 장관과 건설부 장관이 힘을 합친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당연하게 재경부와 건설부의 힘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일이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쯤 되니 제가 오히려 묻고 싶군요.”
“무얼 말인가?”
“한청호가 재경부 장관과 건설부 장관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 왜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내기 위해 공을 들이십니까?”
금산의 장준용 회장이 잡고 있는 끈은 고작 방위군 사령군인 12남 압둘라.
재경부 장관과 건설부 장관에게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한 연줄이다.
그런데도 장준용은 기를 쓰고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얻고자 한다.
“왜? 자네도 불가능하다고 보는가?”
“불가능하다고 말하진 않겠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하는 일 중에는 불가능한 일이 극히 드무니까요.”
실제로 장준용은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멋지게 따냈다.
“하지만 현실을 말하자면 한청호에 비교하면 연줄에서만큼은 이길 확률이 낮긴 합니다.”
“그렇겠지······.”
일개 외국인이 사우디 국왕을 포섭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현실은 냉정하다.
사우디의 재경부와 건설부.
두 장관이 한청호를 밀어준다면?
한청호가 승리를 자신하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태수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
“확률, 그거 매우 편리한 기준이죠. 어려운 일을 앞에 두고 확률이란 잣대를 쓰면 결정이 참 간단해지곤 합니다.”
장준용도 고개를 끄덕여 태수의 말에 동의한다.
“어려운 일을 성공시킬 확률? 애초에 그 확률이 낮으니까 어려운 일인 겁니다.”
태수는 눈을 빛냈다.
“확률이란 잣대를 쓰면? 보통 사람들은 간단하게 포기를 결정하죠. 그럼 마음이 편하니까. 스스로를 위안하겠죠. ‘확률이 낮은 일이었어.’ 하지만 그래서야 남는 게 있습니까?”
태수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성공할 확률이 낮은 일, 어려운 일, 불가능한 일, 누구나 포기를 택하는 일. 그런 일에 도전해야 남보다 앞서 나가는 법입니다.”
지금 주베일 산업항 공사 같은 것 말이다.
“불가능을 실현시킬 때 역사는 새로 쓰입니다.”
장준용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래, 자네 말이 맞네. 난 그렇게 역사를 새로 쓰면서 살아왔어.”
장준용의 눈이 빛난다.
“우리 함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보는 게 어떤가?”
마음에 든다.
그래서 각오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 어려운 길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험로를 걷게 될 겁니다.”
태수가 걷고 있는 길 역시 험로(險路)다.
10만 원짜리 광산에서 시작해서 재벌이 되려는 머나먼 길.
청일 그룹이라는 거대한 재벌 앞에 사마귀 앞발을 휘두르는 무모한 길.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말리는 복수의 처절한 길.
그 외로운 길을 걷고 있는 태수였다.
“기꺼이 함께 걷지.”
장준용도 마다하지 않는다.
“자네에게 말 꺼낸 순간부터 각오했던 일이야. 그 정도 각오는 되어 있다네.”
“장 회장님의 각오는 잘 알겠습니다.”
그래서 부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번에 우리가 청일을 잡고, 반드시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내야겠습니다.”
이건 무조건 먹어야겠다.
큰 공사를 따와 실적도 쌓고, 그 와중에 한청호도 엿 먹이는 일이다.
일석이조를 마다할 필요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