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새로운 동료와 축배를 들다(1)
뜻밖의 전화에 김환이 당황하고 있을 때 태수는 차분하게 말했다.
-스케줄 비는 때가 있는지 물어보려고 전화한 겁니다.
“이런, 진작 연락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회장님께선 스케줄이 꽉 차서 일주일간 비워 둔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 30분 후부터 차로 이동하실 예정입니다.”
-30분이면 충분합니다. 잠시 회장님을 만나러 가도 되겠습니까?
“네? 지금 어디에 계시기에······.”
-전 여기 금산 그룹에 와 있습니다.
벌떡.
김환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잠깐만 전화 끊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제가 금방 회장님께 물어보고 알려 드리겠습니다.”
평소와 달리 전력질주로 회장실 문을 두드리는 김환.
느긋하게 결재 서류를 보고 있던 금산 그룹의 회장 장준용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숨이 턱까지 찼어? 자네답지 않게.”
“헉··· 헉··· 태양 광산의 강태수가 회장님을 만나 뵙고 싶어 합니다.”
“강태수? 지금 중동에 간 그 강태수 말인가?”
“예, 지금 이곳에 와 있답니다. 회장님을 꼭 만나고 싶다고.”
금산의 장준용이 턱을 슬슬 문질렀다.
“스케줄이 어떻게 되지?”
“30분 후에 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합니다.”
“차 한 잔 할 시간은 있다는 소리로군.”
장준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태수더러 들어오라고 해.”
안 그래도 강태수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강태수, 그자가 주베일 산업항 공사 공동 입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군.’
유조선 가득 물을 채워 보내고 사우디 왕실에 요구한 주베일 산업항 공사 입찰.
무려 9억 3천만 달러짜리 공사였다.
* * *
똑똑.
“어서 오시게. 기다리고 있었네.”
금산의 장준용 회장이 두 팔 벌려 태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태수는 정중히 인사하고, 장준용이 권한 의자에 앉았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나야 보다시피 잘 지냈지. 자네는 그때보다 많이 탄 것 같군그래.”
“중동 뙤약볕이 강해서 말입니다.”
태수는 고개를 숙였다.
장준용을 만나서 세 가지 용건을 해결할 생각이다.
첫 번째 용건이었다.
태수는 호의를 잊지 않았다.
“먼저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절 위해 외무부 장관님을 움직여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런 걸 가지고 감사씩이나. 내 사우디 대사한테는 입도 벙긋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는데 말이야. 이 친구, 입이 가벼워서 못 쓰겠는데?”
“대사님께서 말씀하신 건 아닙니다.”
“그럼 누구한테 들었지?”
사우디 주재 대사관의 2등 서기관 송창준에게 들었다.
대사가 심복을 통해 자신의 공을 어필하려고 안달이 났었다.
사우디에서 벗어나 좋은 근무지로 옮기고 싶었을 테니까.
하지만 대사가 직접 입을 벙긋한 건 아니다.
태수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보내 주신 트레일러와 지게차, 크레인은 잘 쓰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감사드립니다.”
“잘 쓰고 있으면 됐네. 그러길 바라고 보낸 걸세.”
“그런 이유로 겸사겸사 금산 중장비에서 중장비를 주문하고 싶습니다.”
장준용은 느긋하게 소파에 팔을 둘렀다.
“청일에서 뜯어낸 중장비로는 부족한 모양이지?”
“아시잖습니까? 청일이 내어 줄 수 있는 최대치가 그 정도라서 딱 거기까지 말한 겁니다. 아무래도 공사 속도를 높이려니 중장비가 부족합니다.”
어려울 것 없다.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팔아 달라는 것이다.
아니, 이 정도 물량이면 이쪽에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 판이다.
“좋아, 금산에서 중장비를 팔아 주지.”
“사우디로 배달하는 것도 잘 좀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바지선을 보내 봐서 항구 못 찾을 걱정은 없을 거야.”
태수는 펜을 들어 금산 중장비에 주문할 물량을 적어 내려갔다.
장준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중장비라면 도로 공사는 기한 내에 충분히 마칠 수 있겠어.”
“그래야죠.”
“좋아, 되는대로 빨리 자네가 있는 곳으로 보내 주지.”
“감사합니다.”
금산에 찾아온 첫 번째 용건은 끝냈다.
필요한 중장비를 주문하는 것.
다른 부족한 중장비를 지원해 준 보답이었다.
‘이번엔 두 번째 용건이 되겠군. 황금 명함.’
태수는 공손하게 말했다.
“그리고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조선을 항구에 정박해 주신 거로도 모자라 제가 공사를 끝마칠 때까지 무기한 빌려주시다니요.”
“사우디 가뭄이 심하다고 들었네. 공사를 마칠 때까지 물이 부족해서 쓰러지면 안 될 일이지.”
사우디의 우기가 오려면 아직 멀었다.
유조선의 물로는 부족하다.
“유조선을 빌려줄 테니까 잘 쓰고 반납해. 몇 번 다른 나라에서 물을 채워 가져가면 될 거야.”
“어르신이 바레인에 석유 사러 간다고 새로 들이신 유조선이 아닙니까?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황금 명함으로 청하기엔 너무 과한 청인 듯합니다.”
“자네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우디 왕실에서 연락이 왔네.”
장준용이 차를 한 모금 마신다.
“사우디 왕실에서 유조선을 사들이겠다는 뜻을 전해 왔어.”
“그래서 파셨습니까?”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좋은 기회가 내 손에 들어왔는데 그렇게 싸게 팔아 치울 수는 없는 법이지.”
유조선값을 두둑하게 쳐준다고 해도 남는 건 푼돈이다.
금산의 장준용은 그런 푼돈 장사에 관심이 없다.
“나는 다른 것을 요구했네.”
“어떤 것을 원하셨습니까?”
“사우디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
주베일 산업항 공사.
1975년 입찰 과정을 거쳐 1976년에 시작한 이 공사는 금산 장준용 회장의 작품이었다.
당시 공사 수주 금액은 무려 9억 3천만 달러.
이건 당시 대한민국 정부 총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원래 장준용이 맡았던 공사다. 그런데 장준용은 유조선을 핑계로 이 공사를 원하는군. 이건 운명인가, 아니면 치밀하게 계산된 결과인가.’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큰 공사입니다. 한데 아직 공사 계획이 발표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요.”
“그렇지. 하지만 계획을 구상하는 자가 흘리는 말을 들었어.”
장준용은 공사 계획을 구상 단계에서 알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홍해를 끼고 있는 사우디 서쪽 도시 개발 담당은 라흐만.
하지만 주베일은 페르시아만을 끼고 있는 사우디 동쪽 도시다.
‘동쪽 도시를 개발하는 사람은 누굴까?’
거기까진 태수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동쪽 도시 개발 계획을 구상하는 자라······. 그거 궁금하군요.”
“나는 도시 개발 담당자는 모른다네.”
“그럼 주베일 산업항 계획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해외를 꽤 오랫동안 돌아다녔지. 조선소 사업 자금을 빌리기 위해서. 그때 만난 자가 있어.”
장준용은 씩 웃었다.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초대 국왕의 12남이야.”
이런, 거물을 알고 계셨군.
‘압둘라라면 장차 사우디 6대 국왕이 될 자가 아닌가. 금산의 끈도 튼튼해.’
태수가 잡고 있는 건 라흐만이란 끈.
그의 아버지는 초대 국왕의 5남으로, 장차 75년 3월에 4대 국왕으로 재위할 칼리드다.
금산의 장준용이 잡고 있는 끈은 압둘라.
그는 초대 국왕의 12남으로, 1995년 11월에 대리청정을 시작해 2005년에 6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심지어 현재 국방부 소속 방위군 사령관이지. 국방부 장관인 칼리드의 오른팔로, 형인 칼리드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동생 압둘라를 부총리로 임명하지.’
사실상 둘은 거의 같은 끈을 잡고 있었다.
모두 칼리드라는 거물에 붙어 있는 끈이다.
“든든한 끈을 붙잡고 계시는군요.”
“그래서 말인데.”
장준용이 은근하게 물었다.
“자네가 붙들고 있는 끈도 내게 한 번 보여 주지 않겠나?”
“저야 어르신과 달리 끈이랄 게 뭐 있겠습니까?”
“하하하, 겸손은.”
장준용은 믿지 않았다.
입에 발린 겸손 대신 태수의 수완을 믿는다.
장준용의 눈앞에서 박정환을 구워삶던 그 수완을 말이다.
장준용은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면서 말했다.
“나랑 공동 입찰 한번 해 보지 않겠나?”
“공동 입찰을? 지금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같이해 보자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뜻밖의 제안이었다.
“내겐 자네의 수완과 끈이 조금 필요하다네. 입찰의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신기한 일이다.
원래 장준용이 맡아 개발할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내기 위해 태수에게 공동 입찰을 제안하다니.
‘굳이 내가 없더라도 장준용, 당신이 이 일을 따게 될 텐데······.’
원래 사람은 한 치 앞을 모르는 법이다.
금산의 장준용이 실제로 2년 후에 혼자의 힘으로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낼 줄 누가 알았을까?
“공동 입찰이라······. 자세히 듣고 싶군요.”
“얼마든지 설명해 주지.”
장준용이 비서 김환을 불러들였다.
“뒤에 있는 스케줄, 전부 취소시켜.”
“회장님, 그럼 국회의원부터 시작해서······.”
“전부 취소해. 지금 이것보다 더 중요한 대화는 없을 테니까.”
무려 9억 3천만 달러짜리 공사에 대한 의논이다.
대한민국 정부 예산의 절반이나 차지할 대업 중의 대업이다.
그깟 국회의원 나부랭이를 만나자고 태수와의 만남을 포기할 순 없었다.
“차로는 부족한데, 술은 어떤가? 내가 잘 아는 바가 있다네.”
“좋지요.”
아직 오후 해가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바에 가서 술 마시길 권한다.
그만큼 얘기가 길어질 것이란 뜻이었다.
* * *
아주 당연하게도 연일 신문 1면엔 박정환 대통령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조간신문이고, 석간신문이고 할 것 없이.
-국민 한 사람이라도 구하기 위해선 사막까지 날아가라! 대통령의 결심!
-박 대통령의 결단, 12명의 목숨을 구하다!
-피립된 한인 구출 작전, 완벽한 성공! 그 뒤엔 대통령이 계셨다!
-사우디 정부와 한국 정부의 합동 작전이 통했다! 외교적 성과까지 거두다!
신문을 접으며 박정환은 크게 웃었다.
“강태수라고 했던가? 그 친구 솜씨가 참 좋아.”
차기범이 대답했다.
“피랍되었던 삼원 건설 수뇌부 일곱 명을 비롯해서 도망가서 숨어 있던 삼원 건설 사장 및 임원진까지, 수뇌부 12명 전원의 신원을 미리 확보해 두었다고 합니다.”
“도망가서 몇 달이나 숨어 있던 놈까지 잡아 와? 재주도 좋군.”
박정환은 턱을 쓸었다.
“강태수, 그놈이 사우디에 도착한 후로 한 번도 항의 전보가 날아오지 않았다지?”
“전무합니다.”
“사우디 땅에 도착하자마자 베두인족들은 싸움을 멈추고, 다음 날부터 인부로서 도로 공사에 참여했다면서?”
“네, 그렇습니다.”
“베두인족들을 어찌 구워삶았을까? 게다가 시멘트 수입하기 번거롭다고 자체 생산 시설까지 만들었다는 소리가 진짜인가?”
“네, 그렇습니다.”
박정환을 무릎을 탁 쳤다.
“보통내기가 아니더라니! 그놈이 그렇게 한 건 해낼 줄 알았어!”
포항 철강 사장실에서 봤던 강태수의 얼굴이 떠오른다.
겁도 없이 제 앞에서 요구 조건을 술술 불던 녀석.
“청일의 늙은 너구리 한청호를 홀랑 벗겨 먹고, 내 앞에서 이미지 쇄신을 들먹이며 잔재주를 부리더니, 그 값은 제대로 하는구나.”
“특수 요원 중에 기어들어 온 쥐새끼들도 잡았습니다.”
“뭐? 그놈들, 자네가 잡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이번 적십자 회담이 끝난 후에.”
“마침 좋은 기회가 왔답니다. 제 밑에 있는 놈이 잡긴 잡았습니다만 강태수의 조력이 큰 몫을 했다고 합니다.”
박정환이 턱을 한 번 더 쓰다듬는다.
“무력으로는 보탬이 안 됐을 테고······. 그럼 특수 요원을 어찌 흔들어 놨을까?”
“간단합니다. 삼원 건설 수뇌부들을 순순히 내어 주고, 귀국 비행기 표를 대신 끊어 줬다는군요.”
차기범은 박정환에게 속사정을 얘기했다.
태수는 캡틴에게 모든 공을 독차지해도 좋다고 했지만, 캡틴은 차마 공을 완전히 독차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태수의 협력을 슬쩍 보고했던 것이다.
“뭐라? 하하하! 고작 그런 협조로 큰 조력은 무슨!”
“그렇긴 합니다만 특수 요원들이 사막을 뒤지며 사장 찾는 수고를 크게 덜어 준 건 사실이지요.”
박정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필요한 건 이미지 쇄신용 놈들이니 피랍된 놈들만 있으면 그만이야. 하지만 강태수는 굳이 사장까지 잡아들여서 내 앞에 바쳤다.”
그 뜻이 참으로 영악하다.
박정환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강태수는 훌륭하게 내 목적을 완수했어. 도로 공사 건도 곧 완수할 것 같고.”
박정환은 차기범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장까지 잡아다 바친 뜻은 받아 줘야지. 이참에 강태수에게 선물을 좀 챙겨 주고 싶은데 말이야.”
아마도 강태수가 이걸 받으면 입이 찢어지게 좋아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