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청일 사냥을 준비하다(4)
태수는 말했다.
“장수 은행은 서구 석유 회사 주식들을 사 모으고 있다, 그 소문에 힘을 실어 줍시다.”
“실제로 석유 회사 주식들을 사 모으라는 건 아니겠지?”
“까짓것 사 모읍시다. 아주 대대적으로. 최무룡이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만큼 맛있는 냄새를 좀 뿌려 줍시다.”
장말동이가 고개를 팩 돌렸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중동에 조만간 전쟁이 날 것이다. 반년이 채 남지 않았어.”
중동에 무기 밀매하면서 전쟁 시기를 가늠하지 못하면 바보다.
심지어 장말동은 시기까지 얼추 때려 맞출 정도다.
그만큼 현장에서 직접 대면하는 물밑 분위기가 점점 날이 서고 있다는 뜻이다.
“중동 전쟁이 나면 서구권 석유 회사들이 제일 먼저 타격을 받는다. 최무룡이 죽이자고 나까지 함께 침몰하는 배에 타라는 뜻이냐?”
“설마요. 침몰할 것을 아는 이상, 배가 출발하기 전에 내리면 그뿐이잖습니까?”
“하하하!”
장말동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다.
“좋다! 석유 회사에 투자 한번 제대로 해 보자! 안 그래도 요즘 석유 회사 주가가 연일 상승하더라. 내 돈 놀리지 않고 이참에 잠깐 짭짤하게 수익 좀 올릴까?”
“바로 그겁니다.”
장말동이 한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저놈은 왜 미국까지 가서 투자 회사를 세우는 것이냐? 최무룡이 잡으려면 소문만 내도 충분할 것 같은데.”
태수가 대신 대답했다.
“속이려면 제대로 속여야죠. 한수가 미국계 투자 회사를 세워 장수 은행에 투자 제안을 할 것입니다.”
“왜 굳이? 우리 장수 은행 자본금만 하여도······.”
“중동에서 무기 판 돈을 그대로 가져올 생각은 아니죠?”
“옳거니! 돈세탁이구나!”
이제야 장말동은 태수가 왜 한수를 제 앞에 소개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왜 미국계 투자 회사를 차렸는지도 알 수 있었다.
태수는 말했다.
“최무룡은 어르신이 무기 상인 노릇 하는 걸 알고 있습니까?”
“모르지.”
“그 의심 많은 놈은 장수 은행 자본금을 계산하며 머리를 쥐어짜면서 살고 있을 테죠.”
“바로 그렇다. 괘씸한 놈이 내 주머니를 헤아리려고 매번 쥐새끼들을 들여보내지.”
실제로 턱밑까지 기어들어 온 적이 있었다.
8.3 사채 동결 조치 때를 기점으로, 장말동은 집 안을 발칵 뒤집어 숨어든 쥐새끼들을 전부 때려잡았다.
‘그때는 최무룡이 이 장말동이의 정보를 훔쳐 갔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야.’
실제로 쥐새끼들이 나오니 그렇게 심증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다 근래에 알게 되었다.
‘사실은 최무룡이가 높은 자리 앉아 있는 놈들, 돈 많은 놈들을 다른 수단으로 휘둘렀다는 걸 알게 됐단 말이지.’
장말동의 정보를 빼낸 덕분에 사채 동결 조치를 무사히 넘긴 게 아니었다.
최무룡은 다른 방법으로 위기를 견뎌 냈다.
‘차용증 대신 치부책으로! 약점을 흔들어 제 돈을 회수했더란 말이야.’
그러니 차용증이 휴지 조각이 되어도 약점이 잡힌 놈들은 빌린 돈을 순순히 토해 낼 수밖에.
하지만 태수가 귀띔해 준 ‘최무룡이 은행을 세운다.’란 정보는 제 몫을 해냈다.
어쨌건 태수 덕분에 의심스러운 놈들을 모조리 뽑아낼 수 있었으니까.
그것으로 장말동은 최무룡이의 계산과 속셈도 파악할 수 있었다.
‘최무룡이는 이 장말동이의 곳간을 훔쳐보고 싶어 했지. 남 주머니에 든 동전을 세면서.’
하지만 최무룡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장말동의 숨겨진 얼굴이 실은 무기 상인이라는 것을.
그것도 해외에 대규모 무기 공장을 짓고, 여태 무기를 몰래 팔아 왔다는 것을.
“어르신, 솔직히 말해 보세요. 이제껏 지하 금융에서 사채업을 해 왔던 것, 무기 상인으로 벌어들인 돈을 감추기 위해서였죠?”
“네놈은 속일 수가 없구나.”
“은행을 세우면서 양지로 나오는 바람에 새로운 간판이 필요했던 것도 다 그 때문이었을 테고요.”
“그래, 거기다 이왕이면 네놈처럼 똑똑한 놈이 우리 아가씨의 배필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
“됐습니다.”
이 댁 아가씨 얘기만 나오면 가차 없이 말을 끊는 태수였다.
“용역까지 양지로 나왔는데, 무기 상인은 양지로 나올 수 없었겠죠. 그래서 광산과 시멘트 공장을 이용해서 자금 세탁을 하고 싶으셨을 겁니다.”
“실은 그렇긴 하다만 네가 아가씨의 배필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 건 진심이다. 그렇게까지 내 뜻을 곡해하지는······.”
틈만 나면 들이대는구나.
이번에도 가차 없이 자른다.
“그래서 제 동생을 소개시켜 드리는 겁니다.”
“아가씨 배필로 원하는 건 네 동생이 아니라 너라니까······.”
이 양반이 진짜!
“그러니까 지금 돈세탁해 준다고 제안하는 거 아닙니까? 동맹을 맺었으니까 어르신 돈도 같이 세탁해 드리겠다는데, 자꾸 잡소리 할 겁니까?”
“끄응-”
“싫으면 마십시오. 중동에서 무기 판 돈을 그대로 가져오면 박정환이 참으로 얼씨구나 하겠습니다.”
“끄응- 뭘 그리 성질을 내느냐. 그냥 실없는 소리다. 그냥 넘기자. 나까지 챙겨 줘서 이것 참 고맙구나. 이건 진심이야.”
장말동이 끝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우리 한수가 미국 투자 회사를 세웠으니 어르신의 은행에 투자한다고 소문낼 겁니다. 그 돈으로 어르신은 서구 석유 회사들 주식을 사들이는 겁니다.”
그 돈은 무기를 판 돈이다.
미국 투자 회사를 거치며 투자금으로 포장지를 바꿀 것이다.
한복 입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장말동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렇게 하자.”
“어르신이 데리고 있는 정보 상인을 좀 더 적극적으로 굴려 주세요. 이 좋은 기회를 허무하게 날리면 속이 꽤 아플 테니까요.”
“알았다. 최무룡이 바람 잡는 건 내가 다 알아서 하마. 아주 정신없이 몰아치마.”
장말동은 음흉하게 웃었다.
“그놈 잡고, 내가 그놈 은행을 꿀꺽해야겠다.”
“좋은 생각입니다. 같이 좀 나눠 먹읍시다.”
“당연히 그래야지. 네 공에 따라 네 몫은 반드시 챙겨 줄 것이다.”
“그럼 계약서 쓰시죠.”
“끄응- 이젠 제발 좀 이 장말동이를 믿어라. 동맹까지 했으면서 계약서는 무슨!”
“차용증 아닌 게 어딥니까?”
“진짜 이렇게 나올 게냐?”
“장난입니다. 어르신께 야박하게 굴 생각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태수는 씩 웃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정보료도 안 받았던 겁니다. 우린 동맹이 아닙니까.”
동맹이란 참 좋은 것이었다.
‘난 아직 석유를 못 받아서 한수의 투자 회사에 돈 한 푼을 투자하지 못하는데.’
태수의 석유는 아직 묶여 있다.
도로 공사가 끝나면 받을 석유.
중동 전쟁이 발발하면 받을 석유.
‘그 탓에 한수의 미국 투자 회사에 투자할 돈이 없었지.’
몰리브덴 광산과 석회 광산, 시멘트 공장에 나오는 돈도 전부 쓰고 있다.
강남 대치동 땅을 사들이는 데.
중동 석회 광산과 시멘트 공장에서 나오는 돈도 전부 쓰고 있다.
베두인족 인부들에게 지급하는 일당과 음식, 부족한 물품들 사는 데.
도로 공사와 우물, 수로 공사를 하는 데.
‘이번에 장말동 덕분에 공짜로 초명 은행을 나눠 먹게 생겼구나.’
서구권 석유 회사 주식을 사들이는 것도 장말동의 돈이다.
중동에서 무기 판 돈.
그걸로 최무룡을 잡는다.
그 뒤 초명 은행을 같이 나눠 꿀꺽한다.
“어르신, 함께 초명 은행을 잡아 봅시다. 동맹이란 이름으로.”
“오냐, 동맹을 맺을 걸 후회하지 않게 서로 제대로 협조하자.”
아무렴요.
그래야죠.
사람 말은 못 믿는다.
하지만 한수의 투자 회사에 들어갈 장말동의 돈은 믿는다.
‘한청일, 어디 청일 정유를 잘 지켜 내 봐라.’
오일 쇼크.
석윳값이 갑자기 펄쩍 뛰는 세계 재난급 빅 이벤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때가 다가오고 있다.
‘언제나 위기 속에 기회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오일 쇼크란 위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한청호의 청일 정유를 사냥하는 전장으로.
‘한청호, 오일 쇼크가 일어나면 가뜩이나 석유 구하느라 돈 많이 들 텐데, 돈줄이 끊기면 청일 정유를 어떻게 하려나?’
다른 계열사를 팔아서 청일 정유를 지켜 낼까?
그게 아니라면 어쩔 수 없이 청일 정유를 포기하게 될까?
태수는 그것이 궁금했다.
‘장말동을 만나 해야 할 말은 전부 끝냈다.’
장말동에게 무기 증산을 제안했다.
그리고 초명 은행 잡을 계획을 의논했다.
한수의 투자 은행을 소개시켜 줬다.
‘그럼 중동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해 줘야겠지.’
도로 공사를 마저 끝내야 한다.
그리고 사우디 왕실에 장말동이란 무기 상인을 소개해 줘야 한다.
그때 슬쩍 부추겨야 한다.
‘청일에 석유 공급을 끊도록 만들어야겠다.’
아마 라흐만이 제일 먼저 기뻐할 것이다.
한청호에게 뒤통수를 맞고 이를 갈고 있을 테니까.
중동 전쟁으로 한껏 위상과 영향력이 높아질 사우디 국방장관이 그의 아버지다.
라흐만의 아버지가 한청호를 가만히 둘까?
‘이제 금산의 장준용 회장만 만나면 되겠군. 그 후에 다시 중동으로 돌아간다.’
짧은 귀국 일정이다.
서둘러야 한다.
* * *
태수와 한수가 돌아간 후.
한복 입은 남자는 크게 웃었다.
“정말로 맹랑한 놈이란 말이지.”
장말동은 제 비단 보료를 한복 입은 남자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옆에 앉아 그를 위해 차를 우려낸다.
“그 맹랑한 놈이 이번에 큰 건을 골라서 물어 왔습니다.”
“사우디 왕실을 소개해 주겠다고? 대체 그놈 뒷배의 영향력은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
사우디 왕실을 파고드는 건 꽤 어려운 일이다.
초대 국왕이 사우디 왕국을 건설한 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지금은 초대 국왕의 아들이 다스리고 있는 나라.
역사가 짧은 만큼 장악력이 대단하다.
“고작 중동에 가서 남이 하던 도로 공사 일하기에도 바쁠 녀석이······.”
가뜩이나 공사 기한까지 빠듯한 일을 맡았다.
보통 3년에 걸치는 공사 기한을 삼원 건설이 2년으로 단축한다는 조건을 걸어 따 온 일이었다.
그런데 그놈들이 몇 달이나 허송세월하는 바람에 이제는 기한까지 채 1년도 남지 않았다.
똥줄이 빠져라 도로 공사에 매달려도 기한까지 완공이 어려운 일.
그 와중에 어찌 한국까지 와서 이런 수작을 부리는 것인가.
“정말로 대단한 놈이란 말이야. 이 배짱, 미리 계획하여 짜 두는 이 치밀한 판.”
한복 입은 남자는 나직이 감탄했다.
“보통 수완이 아니야. 무서운 놈이야.”
장말동이 차를 한 잔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점점 대하기가 벅찹니다.”
“그럴 테지.”
장말동이를 쥐락펴락, 아주 농락하는 수준으로 갖고 논다.
그러니 당하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곤욕스러운 일이겠나.
장말동이 벅차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무기 공장에 생산 증량을 명할까요?”
“그래야지. 당장 전보를 보내라.”
“이번에 최무룡이 잡는 건······.”
“장말동이, 그건 전적으로 자네가 맡아 줘야겠어.”
한복 입은 남자는 눈을 빛냈다.
“중동에는 내가 갈 생각이다.”
처음 사우디 왕실에 안면을 트려면 직접 움직이는 게 낫다.
“강태수가 어떤 끈을 잡았는지 내가 직접 확인해야지.”
기대된다.
“우리도 본격적으로 사우디로 진출한다.”
강태수가 뚫어 준 고속 도로를 타고 달릴 시간이다.
* * *
금산 그룹의 총괄 비서실장 김환.
그는 전화 한 통에 깜짝 놀랐다.
“강태수 씨? 태양 광산의 강태수 씨가 정말 맞습니까?”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중동에서 전화가 올 리 없는데······.”
-당연히 한국입니다.
“한국이라고요? 언제 들어오신 겁니까?”
-어제 들어왔습니다. 아직 만 하루가 채 안 지났군요.
들어오자마자 연락했단 뜻이었다.
김환은 안색을 굳혔다.
“급한 일이십니까?”
-회장님을 잠시 만나 뵐 수 있을까 합니다.
“장 회장님을요?”
개인적인 부탁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