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61화 (61/230)

61. 청일 사냥을 준비하다(3)

태수는 라흐만과의 만남에서 이미 그가 어찌 행동할지 짐작했다.

‘라흐만이라면 지금쯤 대비하고 있겠지.’

그의 아버지는 무려 사우디 국방부 장관!

‘라흐만은 전쟁을 확신했다. 그랬으니 허둥지둥 선실을 빠져나갔고, 계약서에 사인을 휘갈겼겠지.’

태수는 일부러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라흐만의 속내를 알기 위해서였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나오는 게 본심이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표정은 꾸밀 수 있지만 계약서에 사인을 한다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계약서에 서명 날인할 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망설이면서 이해득실을 한 번 더 생각한다.

하지만 라흐만은 정신없는 와중에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심중에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는 뜻이었다.

‘이미 라흐만은 제 아버지에게 전쟁에 대해 논했겠지. 그렇다면 국방부 차원에서 은밀히 조사가 이뤄지고, 무기 밀매 정황을 못 잡을 수가 없다.’

태수의 말에 장말동은 침음을 삼켰다.

“네가 그것까지 알고 있는 줄은 몰랐구나. 그래, 우리는 이집트와 시리아에 물건을 대고 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태수는 씩 웃었다.

“사우디 왕실에 다리 좀 놓아 드려요?”

“으음?”

“한쪽 장사만 하실 작정이십니까?”

그럴 리가.

사우디 왕실엔 끈이 닿아 있지 않다.

어설프게 접근했다가는 끌려가기 딱 좋은 게 무기 밀매상이 아닌가.

“네놈이 어찌 날 소개할 수 있단 말이냐? 중동 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사우디 국방부 장관, 아니면 그의 아들을 소개할 생각입니다. 어떻습니까?”

어떻긴 뭘 어째?

이건 무조건 잡아야지!

하지만 장말동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긴다.

힐끔 옆을 보니 한복 입은 남자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 게 아닌가.

‘장말동의 입장에선 목숨을 건 도전이겠지. 무기 밀매란 게 그런 거니까.’

태수는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복 입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말동 역시 오랜 고민에서 벗어났다.

“좋다, 사우디 왕실에 선을 댈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지.”

장말동은 태수를 보며 은근하게 물었다.

“네가 왜 급히 귀국했는지 알게 되었다. 참으로 고맙구나. 이 정보도 물론 호의겠지?”

정보료가 얼만지 묻는 소리다.

한마디로 공짜냐, 아니냐.

“사례를 바랐으면 차용증을 흔들었겠죠.”

“그놈의 차용증 소리, 이젠 꺼내지도 말아라!”

차용증이라면 지긋지긋한 장말동이 치를 떨었다.

암만 생각해 봐도 사채업자가 차용증을 썼던 그날은 정신이 반쯤 나간 게 틀림없었다.

“아주 내가 그때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장말동이 인생 최고의 치욕이야!”

“뭐 그런 걸 가지고. 인생 참 곱게 살아오셨나 봅니다.”

“이런 또라이를 보았나!”

파르르 떠는 장말동.

자주 보니 이것도 익숙하고 좋다.

“어르신은 잊으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잊지 않았습니다. 우린 동맹이 아닙니까?”

“그래서 공짜로 정보를 주겠다?”

“합승한 택시 승객끼리는 돈 받는 거 아닙니다.”

합승한 승객의 돈을 받는 건 택시 운전자다.

“이왕 가는 길에 같이 갑시다. 동맹이니까 서로 좋은 것 챙겨 주고, 같이 키워 주고 끌어 줘야죠.”

동맹은 2인 3각 경기다.

같이 발을 뻗고, 같은 속도로, 목표를 향해 함께 달려야 결승점에 함께 들어갈 수 있다.

“미리 물량을 잔뜩 준비해 놓으세요. 사우디 국방부는 앞으로 무기 구입액을 계속 늘려 나갈 테니까요.”

“이번 한 번만의 고객이 아니다?”

“물론이죠.”

실제로 사우디 정부는 매년 무기 구입액을 늘려 왔다.

중동 전쟁 이후에 서구 자본을 내쫓고 석유를 독점하게 된 사우디 정부다.

부국강병을 부르짖으며 미국과 중국 다음으로 국방비 지출 3위를 달성하는 나라가 된다.

“좋아, 네놈을 믿고 한번 달려 보마. 사우디라면 귀가 솔깃해지는 고객이지.”

“밑지는 장사는 아닐 겁니다.”

중동 전쟁이 일어나면 무기를 파는 족족 사 간다.

물량이 없어서 못 판다.

손해 볼 일 없는 장사다.

“그럼 예까지 온 용건은 전부 끝났느냐? 먼 길 오느라 시간이 남으니 우리 아가씨라도 한번······.”

장말동의 미련을 단칼에 자르는 태수.

“용건이 또 있습니다.”

“···그 용건은 우리 아가씨랑 같이 만나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들어 보면 참 좋겠는데 말이다.”

“최무룡 얘기를 이 댁 아가씨와 함께 나눌 순 없지요.”

“최무룡?”

장말동이 순식간에 눈빛을 바꾼다.

잔뜩 독이 오른 독사처럼 매섭다.

처음 만났을 때의 장말동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 재수 없는 이름을 여기서 왜 올리느냐?”

“함께 최무룡을 잡읍시다.”

“뭣이?”

장말동이 너무 놀라 부채를 탁 내려쳤다.

“최무룡이를 잡아? 어떻게?”

“그놈이 세운 은행을 꿀꺽합시다.”

최무룡은 8.3 사채 동결 조치에서 살아남았다.

지하 금융업인 사채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는 환경이 되자 재빨리 양지로 기어 나왔다.

그렇게 세운 은행이 바로 초명 은행이다.

장말동이 장수 은행을 세운 것과 같았다.

“아직 초명 은행이 부실할 때 쳐야 합니다.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 뽑아내기 어려울 겁니다.”

최무룡의 초명 은행이 지원하는 곳은 청일 그룹.

한청호의 숨겨진 동맹이자 마르지 않는 돈줄이었다.

한청호의 청일 정유를 먹기 위해서는 근간을 이루는 초명 은행부터 흔들어야 한다.

장말동은 말했다.

“그걸 누가 몰라? 최무룡이 그놈은 보통 의심 많은 놈이 아니야. 넌 그놈이 사채 동결 조치를 어떻게 견뎌 냈는지 아느냐?”

“어찌 견뎌 냈습니까?”

“치부책을 만들어서 견뎌 냈다.”

치부책?

뇌물 장부를 말하는 건가?

“최무룡이 그놈은 사채를 돌리면서도 차용증을 안 믿었다. 그놈이 믿는 건 상대의 목줄을 틀어쥘 약점뿐이야. 그러니 사채가 휴지 조각이 되었는데도 치부책을 휘두르며 돈을 회수했다.”

그랬구나.

전생에 8.3 사채 동결 조치 때 장말동은 그대로 휩쓸려 파산하고 말았다.

하지만 최무룡은 거뜬하게 버텨 초명 은행을 세웠다.

이제 보니 박정환과 손을 잡았던 게 아니라 권력자들의 약점을 틀어쥐어 버텼던 모양이었다.

“그런 놈이 몸을 빼겠느냐? 은행이 자리 잡을 때까지 야금야금 푼돈을 집어삼키며 덩치를 키울 때까지 버틸 것이다.”

장말동의 말이 맞다.

실제로 초명 은행은 그렇게 뚝심 있게 버티다 기회가 오면 덩치를 불렸다.

덕분에 튼실한 은행으로 남아 청일 그룹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그러니 잡으려면 지금 잡아야 한다.

아직 제 덩치를 불리지 못하고, 잔뜩 웅크려 푼돈만 집어삼키고 있을 때.

“그래서 지금이 기회란 겁니다. 지금 잡지 못하면 다시 잡기 힘들 겁니다.”

“어떤 방식으로 놈을 끌어내느냐 이것이 문제다. 쥐새끼 같은 놈이다. 얄밉도록 영악한 놈이지. 바닥에 흘린 음식 부스러기를 먹으면서 절대로 잡히지 않을 것이다.”

태수는 씩 웃었다.

“쥐새끼 쉽게 잡는 법을 아십니까?”

“쥐약이랑 쥐덫을 써야지.”

“맞습니다. 쥐새끼는 쥐덫에 홀린 듯이 스스로 들어가서 쥐약 묻힌 먹이를 먹고 뒈집니다.”

“최무룡이 그놈은 오래 묵은 노련한 쥐새끼다. 절대로 쥐약 든 먹이는 먹지 않아.”

“늘 먹던 먹이면 그렇겠죠. 하지만 서양 치즈라면 어떻겠습니까? 홀리는 냄새를 잔뜩 풍기는 이국 음식!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옳거니!”

장말동이 무릎을 탁 쳤다.

“네놈이 지금 최무룡이를 낚을 먹이를 준비했구나! 그것도 외국 것으로! 그게 무엇이냐?”

“석유입니다.”

곧 오일 쇼크가 터진다.

“지금은 서구권 정유 회사의 주가가 연일 상승치를 찍고 있지요.”

서구 자본주의의 황금기는 산유국의 석유를 헐값으로 사 오면서 누리고 있다.

하지만 곧 중동 전쟁이 터질 것이다.

그리고 산유국들은 곧 석유 수출 금지를 선언할 것이다.

그 후 서구의 정유 회사들을 제 나라에서 몰아내고 석유를 되찾을 것이다.

“침몰할 배 안에 치즈를 잔뜩 뿌려서 쥐새끼를 몰아넣읍시다. 그렇게 출항시키는 거지요. 배가 침몰할 때 쥐새끼들도 바닷속에 같이 수장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지!”

장말동이 신나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내가 어떤 걸 도와주랴? 무엇을 해 주면 되겠느냐?”

“최무룡이 속을 살살 긁어 주십시오.”

바람잡이가 필요하다.

“최무룡이처럼 의심 많고 욕심 많은 놈이 배까지 스스로 올라가려면 뒤에서 고양이가 뛰어와야 하는 법입니다.”

전생과 달라진 변수가 하나 있다.

바로 사채 동결 조치로 파산했어야 할 장말동을 태수가 구해 준 것이다.

최무룡이보다 자본도 많고, 사업도 많고, 정보도 많은 장말동.

최무룡은 장말동에게 열등감과 경쟁심을 느끼고 있었다.

“먼저 거짓 소문을 흘리는 겁니다. 서구 석유 회사를 두고 흘러나오는 소문.”

“소문?”

“주가가 상승할 것이다, 매출이 증가하고 있다, 계약을 체결했다, 곧 인수 합병할 것이다.”

“에잉, 그런 거짓 소문에 누가 속는단 말이냐?”

“소문에 들썩이는 게 주가입니다. 그래서 소개할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태수가 방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수를 크게 불렀다.

“한수야, 들어와라.”

드르륵. 탁.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자네는 영등포 해결사가 아닌가?”

태수가 제자리 옆에 동생을 앉히며 말했다.

“앞으로는 미국 투자 회사 ‘새도우 인베스트먼트(Shadow Investment)’ 사장 노릇을 할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강한수입니다.”

“어르신과 손잡고 안팎에서 최무룡을 쑤셔 댈 겁니다. 시장 바닥에서 소문을 뿌려 댈 겁니다.”

태수는 씩 웃었다.

“이 녀석은 원래 시장 바닥에서 떠도는 소문을 수집하는 게 특기였죠. 하지만 이번엔 반대로 갈 겁니다.”

한수는 시장 바닥 구두닦이였다.

그 밑에 애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소문을 수집하고, 해결사 노릇을 하곤 했다.

한수에겐 정보원을 비롯한 인맥이 넓고 많다.

모든 수를 이용해서 한수가 시장 바닥부터 소문을 흘릴 것이다.

“어르신이 데리고 있는 정보 상인들, 이참에 좀 씁시다.”

장말동이 눈빛을 빛내면서 웃었다.

“신용이 생명인 우리 애들더러 일부러 신용을 깎아 먹으란 말이냐?”

“아뇨, 누가 신용을 깎으라고 했습니까?”

“그럼?”

“반대로 갈 거라고 했잖습니까. 소문을 뿌리는 건 이쪽이 할 테니까 바람만 불어 대십시오.”

정보 상인들은 본래 바람잡이가 아니다.

오히려 바람잡이로 인한 뜬소문을 거르는 체 같은 역할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젠 바람을 불어 달란다.

“어떻게? 신용을 깎지 않고 어찌 바람을 불어넣으란 말이냐? 헛소문인 걸 뻔히 알면서.”

“간단합니다. 정보를 사러 온 사람들에게 사실을 말하면 됩니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정보입니다.

-하지만 요즘에 이 정보를 확인하러 오는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졌습니다.

태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 사실입니다. 정보를 확인하러 오는 사람들? 사실일 겁니다.”

장말동은 크게 웃었다.

“사실은 사실인데, 의심스러운 사실처럼 분위기를 잡으란 뜻이렷다?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며 거품만 잔뜩 집어넣어 불어 대란 게지? 최무룡이 쪽으로 살살.”

“의심이란 걸 심어 주는 게 중요합니다.”

의심이란 놈은 무서운 놈이다.

마음속에 한 번 뿌리를 내리면 무섭도록 무럭무럭 커 간다.

주변에 들리는 모든 정보를 비료 삼아서.

“최무룡은 의심이 특히 많은 자입니다.”

의심이란 놈에게 잡아먹히기 딱 좋은 토양이다.

애초에 의심 많은 놈은 그렇게 산다.

모든 걸 의심하고, 똑똑한 척하면서 더 많은 자료를 찾아 확인할 것이다.

그럴수록 더욱 커지는 의심의 구덩이에 스스로 잠겨 들게 될 것이다.

“최무룡이가 의심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어르신께서 확실한 제스처를 보이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하랴?”

의심 많은 놈이 덥석 잡을 동아줄을 보여 줘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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