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청일 사냥을 준비하다(2)
태수는 한수의 눈을 간절하게 바라봤다.
한수가 마음을 돌려주길 바랐다.
‘이래도 고집을 꺾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 그게 한수의 운명일 테니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태수가 할 수 있는 설득은 이것으로 끝이다.
남은 건 한수의 결정뿐이다.
한수는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할 게. 타고난 게 이 모양이라 어쩔 수 없지.”
각오로 단단해진 눈이었다.
“이왕 칼이 되는 거, 가족과 형을 위해 휘두르겠어.”
“고맙다.”
“사람 죽이는 것보단 회사 살리는 게 낫지.”
“그래.”
큰 결심해 주어서 정말 기뻤다.
‘은장도로 데리고 있는 건 한수에게 못할 짓이겠지? 인재 낭비이기도 하고.’
태수는 한수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형, 하지만 지금 일은 너무 따분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은 내게 맞지 않아.”
“그래, 안 그래도 마침 네가 딱 좋아할 만한 일이 있어.”
한수가 눈을 빛냈다.
“그게 뭔데?”
“정글도. 이번엔 네가 정글 숲을 헤치며 앞길을 터 줘야겠다.”
이번 일은 한수에게 맡길 생각이다.
“미국에 가서 회사를 하나 세우자.”
“회사? 무슨 회사?”
“투자 회사.”
오일 쇼크로 뻥튀기된 돈을 굴릴 생각이다.
‘내가 갑자기 엄청난 돈을 들고 오면 표적이 되기 쉬워.’
도로 공사 금액을 다들 알고 있다.
하지만 태수가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을 아파트 건설 자금으로 푼다면?
다들 태수를 경계하게 될 것이다.
‘자금을 세탁한다.’
이번 투자 회사로 돈의 포장지를 바꿀 생각이다.
실제로 태수의 돈이라도 밖에서 보면 빌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또 하나, 사냥을 준비해야지.’
태수의 흔적을 지워서 물밑에서 조용히 움직일 거다.
몸을 숨기고 사냥감에 다가가는 맹수처럼.
‘이번 목표는 청일 정유.’
오일 쇼크를 이용해 청일 정유를 박살 내는 게 목표다.
“아마 재밌는 일이 생길 거야.”
태수는 한수와 머리를 맞대고 한참이나 의논해야 했다.
* * *
한청호의 서재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송 비서.
와창창.
서재 안에서 물건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오늘은 유달리 길구나.’
그만큼 한청호의 심기가 어지럽다는 뜻일 터다.
왜 아니겠나?
중동 사막에 강태수를 파묻으라고 보냈던 사람들이 전부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것만이면 이토록 화가 나진 않았을 것이다.
‘회장님이 몇 년에 걸쳐 공들여 심어 뒀던 첩자들이 전부 뿌리 뽑히고 말았다.’
뼈아픈 손실이었다.
그들에게 뿌린 돈이 대체 얼만데.
‘대통령의 최측근에서 정보를 물어다 주던 정보원들을 한 번에 잃었다.’
눈과 귀가 사라졌다.
다시 만들려면 돈도 시간도 많이 들 일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알 수가 없다.
한참 만에 서재가 조용해진다.
“들어와.”
한청호의 부름을 받고, 송 비서는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서재 안은 엉망이었다.
“전부 쫓겨났다지?”
“네.”
이번에 색출된 첩자들을 말하는 거다.
잡혔으니 쫓겨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쫓겨난 게 아니다.
“중앙 정보국 취조실에 끌려갔다고 합니다. 분명 놈들이 우리를 지목할 텐데 어떻게 할까요?”
“꼬리를 잘라 내.”
꼬리라면 한청호 대신 특수 요원들을 포섭한 청일의 직원이다.
한청호는 웃었다.
“죽은 놈은 말이 없어. 돈 먹인 놈이 죽었는데, 누가 감히 내게 죄를 묻겠나? 난 모르는 일이야.”
송 비서는 소름이 끼쳤다.
‘잔인한 놈. 나도 언젠가 저 꼴이 되겠지.’
한청일의 분노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차기범이 영악한 짓을 했어.”
아마도 차기범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중동 상황을 이용해 기생충 색출 작전을 결행했다.
“그러니 제 손으로 중동에 갈 특수 요원을 뽑겠단 소리를 먼저 꺼냈겠지.”
눈치로 보아 박태종이 나섰을 일이었다.
재빨리 선수 친 차기범에겐 그때 이미 숙청 계획이 잡혀 있었던 거다.
“이번엔 내가 밀렸지만 다음엔 안 밀린다.”
첩자야 또 심으면 그만이다.
돈 싫다는 놈이 어디 있으랴.
충성? 명예? 의리?
돈 앞에선 신념 따윈 빛이 바래는 법이다.
“적당한 놈들을 알아봐. 약 쳐야지.”
“알겠습니다.”
이번 일로 들인 돈이 꽤 됐는데, 몇 배는 더 들게 생겼다.
송 비서가 입을 열었다.
“5월 11일 금요일, 각하께서 회장님을 청와대 오찬 모임에 초대하셨습니다.”
“3일 후?”
“네.”
한청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들고 갈 사과 박스나 준비해서 트렁크에 실어 놔.”
“네, 알겠습니다.”
* * *
태수의 계획에 한수는 적극 찬성했다.
“정말 재밌겠는데?”
“미국까지 가면 자리 잡기까지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을 거야.”
“괜찮아,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믿을 만한 사람과 능력 있는 사람을 따로 붙여 주고 싶은데.”
마땅한 사람이 없다.
누가 좋을까?
“형,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데리고 다니는 애들이랑 같이 가도 돼.”
“걔들도 전부 미국은 처음이니까 그렇지. 현지에 익숙한 사람이 필요해.”
“거기서 믿을 만한 사람을 찾으면 되지.”
“그게 어려우니까 그렇지.”
한숨이 난다.
하지만 고민해 봐야 답이 안 나온다.
이건 한수를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다.
“한수야, 이번에 나랑 같이 명동에 가서 장말동 어르신을 만나자. 너를 정식으로 소개시켜 주마.”
한수는 의아했다.
“나는 왜 소개하려고? 전에 얼굴 봤잖아?”
“새 명함 파서 새로운 일을 어르신과 함께하게 될 테니까.”
장말동과 함께?
“미국에 투자 회사를 세우는데 어르신과 함께할 게 있을까?
“네가 미국에 투자 회사를 세워야 할 이유와 일맥상통해. 어르신과 손을 잡고 같이 한 놈을 집중 공격할 생각이니까.”
한청일을 잡기 위해 먼저 잡고 가야 할 놈이 있다.
아마 이놈을 같이 잡자고 하면 장말동도 흔쾌히 손을 잡을 것이다.
“좋아, 같이 가자.”
“고맙다. 내일 아침에 출발할 테니까 그런 줄 알고 있어.”
태수는 한수의 어깨를 장난삼아 툭툭 두들겼다.
한수가 눈썹을 와락 구겼다.
“어째 점점 힘이 세지는 것 같은데?”
“착각이야.”
“아닌데? 이젠 뼈를 골라 때리는 것 같은데?”
“착각이라니까.”
“악! 쇄골은 반칙이잖아!”
오랜만에 형제끼리 멱살을 잡는다.
한참 투닥거리다가, 둘은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하여튼 말은 잘해요. 화려한 말솜씨에 넘어가 버렸네. 결국 난 뭐가 돼도 칼이 된다는 소리잖아?”
“적성, 능력, 타고난 게 이 모양이라 어쩔 수가 없다며? 네 입으로 말했다.”
“수술용 칼이랬다가, 정글도랬다가. 이러다가 부엌칼도 나오는 거 아냐?”
“원한다면 부엌칼도 좋지. 한번 외쳐 볼래? 나는 요리왕이 될 거야!”
한수의 눈썹이 씰룩인다.
“안 되겠다. 오늘만은 도축용 칼이다. 오늘 내 손에 짐승 피 좀 묻힌다.”
“끄악! 치사하게 옆구리 치기냐?”
다시 한번 형제의 멱살잡이가 시작됐다.
장난으로 시작했다가 살벌하게 끝났다.
그럼에도 웃음이 나온다.
“한수야, 하나만 물어보자. 솔직하게 대답해 줘라.”
“응.”
“중앙 정보국 요원 일, 누가 널 부추겼지?”
“음······.”
한수가 표정을 굳힌다.
역시.
보통 사람이 ‘중앙 정보국 요원’이라고 콕 짚어 말할 리 없지.
“누구야?”
“경리.”
“경리?”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튀어나왔다.
“경리가 먼저 말했는데, 포항 철강에서 보내온 광부들도 입 모아 동의하더라고. 나는 예리해서 그쪽으로 가면 분명히 출세할 거라고.”
포항 철강에서 보내온 광부들까지!
그들이야 특수 부대 출신들이니 이해가 간다.
특수 부대에서 나와 중앙 정보국에 들어가는 일은 흔하니까.
‘그런데 경리가 제일 먼저 제안했다고?’
이상하다.
광산에서 영수증 붙이고 회계 장부 작성하는 경리다.
그런데 먼저 한수에게 중앙 정보국에 입사하길 권했다니.
‘나중에 한번 만나 물어봐야겠군.’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귀국한 김에 제대로 기반을 다져 놓는다. 청일 사냥, 이제 시작이다.’
준비할 게 많다.
태수가 사냥하기에 청일은 너무나 거대한 기업이다.
그러니 하나씩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
청일을 떠받치는 기둥부터 하나씩 무너뜨려야 한다.
‘최무룡, 초명 은행이 이번에 버틸 수 있을까?’
이곳에서 돈줄부터 흔들어 놓는다.
벌써부터 내일 장말동을 만날 때가 기대된다.
* * *
명동 장말동의 집.
오늘도 장말동은 비단 보료 위에 앉아 부채를 살랑살랑 부치고 있었다.
태수는 털썩 바닥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어르신,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중동에 간 녀석이 어찌 이리 빨리 돌아왔을꼬? 같이 보낸 우리 애들은 아직도 소식이 없는데.”
뼈 있는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채업자들을 용역으로 탈바꿈시키자마자 태수가 홀랑 채갔다.
중동으로.
“네놈에게 애들을 넘겨준 탓에 손발이 부족해. 늙은 몸이 참으로 번거롭구나.”
“이런, 지금보다 더 번거로워지실 텐데 이걸 어쩝니까? 제가 어르신께 일거리를 잔뜩 가져온 참입니다.”
“일거리?”
장말동이 눈을 요사스럽게 빛내며 부채를 착 접었다.
한복 입은 남자도 귀를 슬쩍 열었다.
“중동에서 곧 일이 벌어질 듯합니다.”
“일? 무슨 일?”
“어르신이 좋아할 만한 일, 돈 버는 일, 공장 돌아가게 생긴 일, 수족이 더욱 번거로워질 일.”
장말동이 안달이 나서 부채를 좌탁에 탁 내려쳤다.
“그러니까 그 일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질 않느냐? 뜸은 그만하면 되었다.”
“제가 어르신께 물건을 왕창 샀지 않습니까? 그걸 더 많이 사겠다고 나설 곳이 있습니다.”
태수가 산 물건이라면······.
장말동의 안색이 슬쩍 변한다.
“네놈이 중동에서 테러라도 벌일 참이냐?”
“제가 아니라 아마도 사우디 정부에서 필요할 겁니다.”
“뭣이라?”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압니다. 어르신, 솔직히 말해 보십시오.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어르신을 통해 몰래 많이 사들이고 있지요?”
“그, 그걸······!”
장말동은 힐끔 한복 입은 남자를 보았다.
한복 입은 남자는 눈을 번뜩였다.
‘제법······. 중동에 도로 공사하러 간다는 놈이 귀가 빠르군.’
태수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을까?
‘눈과 귀를 외국까지? 역시 그 뒷배라는 놈, 만만치 않구나. 도통 찾을 수가 없으니.’
한복 입은 남자의 눈빛이 깊어져 간다.
정보 상인이라는 그들이 눈에 불을 밝히고 찾아도 밝혀지지 않은 흑막.
‘대단한 뒷배를 두었구나.’
태수의 뒷배는 미래 정보다.
그렇기에 강력하고, 그렇기에 흔적도 없다.
“사우디 정부에 정보가 흘러갈 겁니다.”
“무, 무엇을 말이냐?”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무기 사들이는 거 말입니다. 비공식적으로 그 많은 물량이 들어갔으니 당연히 알아챘겠죠.”
한두 정 소량으로 이뤄지는 총기 밀매가 아니다.
군대를 무장시키기 위해선 엄청난 물량이 필요하다.
공식적인 군비 증강은 세계의 이목을 끈다.
그래서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했다.
‘대놓고 선전포고를 날린 후 군대 동원령과 군비 증강 제스처를 보였지. 하지만 실제로 무기 구입액은 껑충 뛰지 않았다. 그랬다면 정말로 난리가 났겠지.’
말보다는 돈을 믿어야 한다.
사다트는 무기 구입에 돈을 조금만 쓰고 있다.
그러니 사다트의 말은 모두 공갈 협박이라고.
똑똑한 사람들은 그렇게 사다트의 속내를 짐작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는 무기 밀매로 엄청난 군사비를 투자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만일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무기 구입하는 액수를 알면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중에 한 곳, 장말동이 무기 밀매에 슬쩍 끼어 있었다.
독립 운동을 지원하던 무기 공장이 여태 남아 덩치를 불려 오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과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이제는 중동으로.
‘중동 전쟁이 일어나고 한참 후에 알려진 비사지. 청일 그룹 정보력은 생각보다 꽤 대단해.’
씁쓸하다.
‘청일 그룹의 막강한 자본력과 정보력을 언제 따라잡을 수 있을까?’
오랜 시간 동안 탄탄히 다져 온 자본력과 인재 풀이 부럽다.
태수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하나씩 잡는다.’
사냥꾼보다 덩치가 크고 강한 사냥감.
그런 걸 잡을 땐 단번에 숨통을 끊어 두는 게 가장 좋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잡느냐?
‘사지부터 하나씩 공략해야지. 상처를 내서 피를 흘리게 만들고, 함정에 빠뜨려 체력을 빼놓는다.’
태수는 청일 사냥을 준비하고 있었다.
목표는 청일 정유.
이것이 태수의 사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