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원하는 대로(3)
하지만 여기엔 크나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다 좋은데요, 물은 어떻게 구할 건데요?”
바로 물!
물이 문제였다.
베두인족의 마을은 사막 한가운데 있었다.
사막을 물 없이 맨몸으로 돌아다니다간 하루도 못 가 갈증으로 죽는다.
“요새 이상한 거 못 느꼈어? 며칠 전부터 물을 넉넉하게 주고 있잖아.”
“아, 그러고 보니까 그러네요.”
“마른하늘에 비 한 방울이 안 내린다. 하지만 실제로 물은 갑자기 풍족해졌단 말이지.”
“이 가뭄에 갑자기 물이 풍족해졌다는 말은······.”
“어디서 우물을 뺏은 거야. 여기 부족 사람들이 다른 놈들 싹 다 죽이고 차지한 거겠지.”
사람들의 안색이 변한다.
아무래도 부족 전쟁이 끝나면 자신들의 차례일 게 분명하다.
위기감이 엄습했다.
“부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탈출해야겠어요.”
모두 동의했다.
그때 탈출을 제일 먼저 제안했던 남자가 거무죽죽한 무언가를 꺼냈다.
사막 부족 전사들이 사용하는 가죽 물주머니였다.
“탈출을 대비해 내가 물을 좀 빼돌려 뒀다.”
“와! 역시 부사장님이십니다.”
“과연 부사장님. 현명하십니다.”
그런데 누군가 의문을 제기했다.
“여기 애들이 그렇게까지 물을 많이 주지 않았는데요? 그 물은 어디서 구한 거예요?”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요즘 물을 제법 넉넉히 준다고 해도 가죽 부대를 채울 정도는 아니었다.
나오는 즉시 대부분 마셔버리고 있고.
부사장은 자랑스럽게 씩 웃었다.
“갑자기 물이 많아졌다고 했잖아. 가축 먹일 물도 풍족해졌더라.”
“서, 설마······.”
사람들의 안색이 희게 변했다.
“싫으면 마시지 마. 그럼 나야 고맙지.”
“아, 아닙니다. 사막에서 갈증으로 죽는 것보다는 낫죠.”
“그럼요. 급할 때는 오줌도 받아먹는 게 사람입니다. 그런 것보다 훨씬 낫죠.”
부사장은 자신했다.
“이걸 아껴 마시면 사막을 지나는 동안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거야.”
“그 말은······.”
“조만간, 탈출한다.”
“좋습니다.”
“그럼 다 같이 계획을 짜 보자고.”
그들은 탈출 계획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 * *
밖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태수는 기가 찼다.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반성 하나 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에도 열이 뻗쳤다.
하지만 뒤에 들려온 말에는 실소가 나왔다.
‘탈출? 제정신이 아니군.’
자력갱생한다고 탈출을 시도하다니.
길잡이도 없이 함부로 사막에 나가는 건 그냥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자살행위와 마찬가지다.
‘사막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전혀 모르는군. 게다가 자신들이 보호받고 있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다니.’
포로를 족쇄로 묶어 뒀다뿐이지 외부인인 점을 감안해 후하게 먹였다.
두툼한 모포에, 제법 깔끔한 옷에, 필요한 물품들까지.
‘2012년 시나이반도 지역 베두인과 이집트가 충돌할 때도 한국인 관광객 세 명이 베두인족에게 납치당한 일이 있었지.’
그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탈레반과 달리 먹을 것도 잘 주고, 대우도 꽤 좋았다지? 학대는커녕 납치한 걸 정중하게 사과하기까지 했다던데.’
베두인족들은 테러범이나 여타의 납치범과는 달랐다.
그러다 보니 서구권에서도 베두인족을 테러 집단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억류된 사람 마음도 어디 그럴까?
하지만 이자들은 그냥 무고하게 감금당한 게 아니었다.
사고를 쳐도 단단히 쳤지 않은가.
‘아직도 정신 못 차려서 못된 생각만 하고 있던데, 마침 잘됐군.’
공사하러 보내 놨더니 하라는 공사는 안 하고 여자를 건드려서 문제나 일으키다니.
마음 같아서는 모래 속에 파묻어 버리고 싶었지만, 박정환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탈출이 소원이라니, 기꺼이 보내 줘야지.’
더구나 알아서 삼원 건설 최 사장까지 찾아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탈출을 위한 만반의 준비까지 갖췄던데, 이대로 계획이 무산되면 섭섭하지.’
몰래 가축 먹일 물까지 빼돌리는 대담함!
사만 전사의 경계 순찰을 우습게 보는 당돌함!
사막 한가운데서 도망간 최 사장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감까지!
‘이렇게까지 지극정성인데, 이건 보내 줘야 한다.’
태수는 발길을 돌렸다.
천막 안에서 태수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베두인족 수뇌부들.
그들이 태수를 맞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들을 만나보셨습니까?]
[어떻게 하기로 결정하셨습니까?]
[우리는 뭐든 은인의 뜻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내키지는 않지만 태수의 결정을 존중하겠다는 뜻이었다.
[만나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들어보니 조만간 이곳을 탈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더군요.]
[탈출을요? 사막의 밤은 혹독한데요. 혹시 어디로 가는지는 아십니까?]
[글쎄요. 그것까지는 잘······.]
차마 도망간 최 사장을 잡으러 간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사막은 지형이 자주 바뀌어서 지리를 잘 아는 자가 아니라면 꽤 헤맬 텐데요. 물도 없이 대체 어쩌려고······. 며칠 못 가 목숨을 잃을 겁니다.]
베두인족들은 사막을 잘 안다.
그래서 다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제가 보니까 그런 자들이긴 하지만 여러분이 지원을 많이 해 주신 것 같더군요. 먹을 것이나 옷, 물, 그 밖에 필요한 물품과 모포, 그리고 가죽 물주머니까지 보이던데, 맞습니까?]
[아······.]
그건 그렇다.
그들이 내줄 수 있는 최대한을 내줬다.
태수가 온 이후부터는 태수를 보아 더욱 후하게 대접했다.
[그래서 그런 걸 겁니다. 아직 그들은 맨몸으로 사막을 겪어 보지 못했으니, 그동안 부족 사람들이 그들을 보호해 줬단 사실을 모르는 것 같더군요.]
베두인족들은 조금 겸연쩍어 했다.
태수에게 하듯 융숭하게 대접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러분과 그들 사이에 앙금이 있다는 걸 잘 압니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합니다.]
[네?]
수뇌부들은 입을 떡 벌렸다.
사막을 모르는 자가 탈출을 논하고, 그 헛된 계획을 아는 자는 탈출을 돕겠다고 한다.
[다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사람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길눈이 밝고, 추적을 잘하고, 그쪽 상황을 알 수 있게 연락이 가능했으면 좋겠습니다만.]
족장은 바로 태수의 뜻을 헤아렸다.
그러자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웃음이 나온다.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족장은 휘적휘적 걷는 시늉을 해 보인다.
발자국의 모양, 보폭, 깊이, 방향이 전부 다르다.
사막에서 발자국을 헤아려 추적해오는 걸 막기 위한 조상들의 방법이었다.
[어려서부터 우리 베두인족들은 이런 훈련을 받습니다. 사막에서 흔적을 숨기는 것에 능하고, 반대로 작은 흔적을 추적해 위치를 쉽게 알아내지요. 절대 놓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독수리 두 마리와 사막 전사들을 보내겠습니다. 며칠이나 예상하십니까?]
[글쎄요. 저 역시 사막을 모르는데,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모두 그들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죠.]
[그럼 사막 전사들에게 일러놓겠습니다. 그들이 충분히 간절해진 것 같으면 구해 오라고 말이죠.]
[바로 그겁니다.]
사막에서 조난당해 죽기 직전까지 몰렸을 때.
지금까지 베풀었던 베두인족의 도움을 마음속 깊이 감사하게 될 때.
다 필요 없으니 귀국하겠다는 소리가 먼저 나올 때.
다른 방면으로 충분히 죗값을 치렀다 생각될 때.
베두인족은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 것이다.
‘이왕이면 포로로 억류했던 못된 베두인족보다는 사막에서 그들을 보호했던 고마운 베두인족이 낫지.’
마침 탈출을 계획해 주다니, 정말 고맙다.
‘자들이 설령 사막을 탈출해서 최 사장을 잡고 뜻을 이뤄도 상관없다. 그건 그것대로 좋지.’
그러니 그냥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다.
[부디 그들의 탈출을 허락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무렴요. 허락하다 뿐입니까? 기쁜 마음으로 무사 탈출을 기원하겠습니다.]
저놈들, 사막에서 고생깨나 하겠구나!
베두인족들은 서둘렀다.
사막 방향으로 잘 도망갈 수 있도록 그쪽만 보초를 비워두기로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여자들한테 못 가도록 그쪽은 순찰을 돕시다.]
[그래야죠.]
당연한 소리였다.
이들이 어쩌다 여기 잡혀 왔는데.
* * *
천막 밖에서 쩔그렁 소리가 들렸다.
탈출을 준비하던 사람은 모두 얼음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인기척이 없다.
“뭐야? 무슨 소리였어?”
부사장이 천막을 슬쩍 열었다.
근처 바닥에 열쇠 꾸러미가 보인다.
“하늘이 도왔다! 열쇠다.”
“열쇠요? 그게 그냥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고요?”
“누가 여기 천막에 걸어 두었다가 깜빡했던 모양이다.”
반신반의했건만 진짜 열쇠가 맞았다.
족쇄는 순식간에 풀렸다.
“이야, 타이밍 봐라. 이 정도면 하늘이 우리 편인 거 맞지?”
“흐흐흐, 우리가 운이 좋긴 한가 봐요.”
“그것 봐라. 누가 우릴 막겠냐? 가자!”
삼원 건설 수뇌부들은 어둠을 틈타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저기 보십시오. 탈출을 시작했습니다.]
[멀리서 따라붙자.]
그런데 이상함을 발견했다.
[어, 물이 새는데요?]
그들이 짊어지고 갔던 가죽 부대에 작은 구멍이 나 있는 모양이다.
그들이 떠난 발자국을 추적할 것도 없이 물 자국만 따라가도 되겠다.
[구멍 나서 버린 물주머니를 주워 와서 썼나 봅니다.]
[이대로라면 하루도 못 버티고 물이 동날 텐데······.]
[그러게요. 하필 사막 한가운데에서 물이 부족해지겠네요.]
[유감스러운 일이야.]
[그러게요.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 생기겠네요.]
원래 무식한 자가 용감한 거다.
사막을 모르니, 저렇게 날뛰는 거겠지.
절로 한숨이 나온다.
[가축 먹일 물을 아껴 마시는 걸 꼭 보고 싶었는데.]
[알라신의 뜻이죠. 사막 한가운데에서 그런 물도 없으면 다른 거라도 마시겠죠.]
[유감스러운 일이야.]
[그러게요. 이건 진짜로 유감스러운 일이겠어요.]
한참 후에 그들도 어둠을 틈타 뒤따라 사라졌다.
이로써 삼원 건설 수뇌부들의 탈출 계획은 베두인족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무사히 성공했다.
* * *
수뇌부들이 모인 천막에서 앞으로 있을 공사에 대한 의논까지 모두 끝났다.
태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밤이 깊었는데, 여기서 주무시고 가시죠.]
[아닙니다. 늦은 시각에 폐를 끼칠 순 없죠.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다들 아쉬워했다.
[쉬세요. 배웅도 필요 없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태수는 외투를 걸치며 자동차에 올랐다.
부르릉.
태수가 탄 자동차는 베두인족 마을을 순식간에 빠져나왔다.
그때였다.
부스럭 소리와 함께 뒷자리에서 뭔가가 불쑥 솟아올랐다.
[후와, 진짜 이렇게 갈 줄은 몰랐네요.]
무희였다.
그녀가 검은색 모포를 뒤집어쓰고 뒷자리에 숨어있었다.
깜짝 놀란 태수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왜 거기에 숨었습니까?]
[몰라서 그래요?]
그녀가 볼을 부풀렸다.
[처음이에요. 남자의 차에 몰래 숨어들어오게 된 건. 당신 덕분에 여러 가지로 처음 겪는 일이 많아요.]
[이거 영광이군요.]
그녀가 조수석으로 오려고 한다.
하지만 울퉁불퉁한 바닥 때문에 요란하게 휘청댄다.
[앗!]
기어이 머리를 천정에 쿵 박는다.
태수는 즉시 자동차를 멈췄다.
그녀가 냉큼 조수석에 앉으면서 작게 웃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이렇게 멈추면 제가 섭섭해요. 차를 탔으면 드라이브를 해야죠.]
[인제 보니 드라이브가 목적이었군요.]
[여자들은 사막 전사들과 달리 함부로 사막에 나갈 수 없어요. 답답한 제 마음을 알아주시겠죠?]
그녀가 예쁜 눈을 반짝이며 속삭였다.
[저쪽 모아딥 석산 방향으로 쭉 가면 사막이 비단처럼 펼쳐져 보이는 아름다운 바위가 나온다고 했어요. 정말로 신비로운 곳이라고 하더군요.]
그녀가 두 손을 모았다.
[같이 보러 가지 않을래요? 당신과 함께 보고 싶어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좋습니다.]
태수가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그런데 여자들은 함부로 사막에 나갈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치고는 길 안내가 무척 능숙하시군요. 자주 왔던 겁니까, 아니면 열심히 배워 온 겁니까?]
[그, 그건······.]
곤란할 때면 코끝을 찡그리는 버릇이 있구나.
귀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