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원하는 대로(2)
송창준이 돌아가고 난 후, 태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차기범이 노리는 게 뭘까? 출국 일정을 늦춤으로써 내가 얻게 될 이익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불이익은 확실해.”
주목해야 할 점은 특수요원의 체류 기간이 무척 짧아질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저런 핑계로 출국 날짜를 늦춘다.
하지만 남북적십자회담을 들먹이며 귀국 날짜는 은연중에 못 박는다.
“특수요원이 작전에 실패하고 돌아간다면, 박정환의 분노가 내게 미칠 수도 있다. 날 전폭적으로 지원해준 값을 못 받은 셈이니.”
박정환이 태수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 ‘이미지 쇄신’이다.
피랍된 자국민을 구출하기 위해 특수요원을 파견하는 ‘멋진 대통령’이 되길 원한다.
“설마 차기범은 한청호와 한 패인가?”
태수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 움직여야겠군.”
차기범이 누구를 데려오든 상관없다.
그에 대한 방비는 이미 철저히 계획된 후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태수를 위협하는 건 곤란하다.
태수는 결정했다.
“특수요원들 대신 내가 그들의 신원을 미리 확보해 둬야겠다. 그렇다면 특수요원의 일정이 아무리 짧아도 박정환의 목표는 무조건 달성될 테니까.”
태수는 외투를 고쳐 입고 차키를 쥐었다.
부르릉.
그리고 코리노와 하코넨 두 마을이 함께 사는 곳으로 출발했다.
* * *
사막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달려 도착한 베두인족 마을.
태수가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이 반겼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시지?]
[저녁은 하셨어요?]
태수는 아이들에게 주려고 가져온 걸 꺼냈다.
아이들이 알아보고 반색했다.
[외국 과자다!]
[사탕과 초콜릿도 가득해!]
[엄마, 나 이거 먹어도 돼요?]
특히 젊은 베두인족 여자들이 웃음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오늘 하루 자고 가시는 건 어때요?]
[잠자리 좀 봐드려요?]
태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늘은 손님으로 온 게 아니라, 어르신들과 의논할 일이 있어서 온 겁니다.]
젊은 베두인 여자들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해졌다.
그때 태수는 저쪽 천막에서 몸을 반쯤 내민 채, 장난스럽게 끈을 흔들어대는 여자를 발견했다.
예의 그 무희가 태수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앙큼하게 웃었다.
태수는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날 밤 이후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잘 지내고 있나 보군.’
태수는 족장이 머무는 천막으로 향했다.
마침 두 부족의 수뇌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설계도를 펼쳐놓고 끙끙대고 있는 게, 내일 있을 공사 때문인 모양이다.
[늦은 밤까지 고생이 많으십니다.]
태수가 천막에 들어서자, 다들 태수를 반갑게 맞았다.
[오! 은인, 사막의 밤이슬이 모래 위로 내려앉기 시작하는 이 시간에 어쩐 일입니까?]
[마침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의견을 구하고 싶은 게 있던 참입니다.]
태수는 족장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공사 일에 대해 의논하기 전에,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저희가 아는 거라면 무엇이든 다 답변해드리겠습니다.]
[삼원 건설 수뇌부들을 잡아두었다고 하셨죠?]
삼원 건설 수뇌부 얘기가 나오자 다들 눈빛이 사나워진다.
태수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그놈들은 왜 찾으십니까?]
그야 신원을 확보해서 특수요원들에게 넘겨주기 위해서다.
그런데 베두인족들은 반응이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흠, 그러고 보니 사정을 듣지 못했군요. 삼원 건설 사람들은 왜 붙잡아 두고 있었던 겁니까? 예전부터 종종 부딪쳤다고는 들었는데.]
슬쩍 물어보는 말에 격한 반응이 돌아온다.
[말도 마세요! 그놈들, 아주 제멋대로였습니다.]
[여긴 물 때문에 부족 전쟁이 났는데,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미친 짓을 하더란 말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일단 문제를 일으킨 놈들을 잡아두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의리도, 명예도 없는 놈들이었습니다.]
삼원 건설이 인심을 아주 단단히 잃은 모양이다.
[그자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그럽니까?]
[도로 공사에 물이 필요하니 우물을 통째로 내달라고 했습니다. 이 가뭄에!]
여기 있는 사람들은 우물 때문에 부족 전쟁을 벌인 자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우물을 통째로 내어달라고 요구하다니.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했군요.]
[그렇습니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저희 사정을 모른다고 치고 그건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다.]
[뭐가 또 있습니까?]
[저희 부족의 여자들을 건들지 뭡니까? 그것도 강제로······.]
태수는 여태 삼원 건설은 사막 부족의 텃세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고만 들었다.
하지만 베두인족의 말은 차원이 달랐다.
[허··· 여자들을 건드렸다는 말입니까?]
[다행히 일찍 발견한 탓에 미수에 그쳤습니다만, 그대로 놔둘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잡아 가둔 겁니다. 정식으로 사과하면 놔주겠다고 했는데, 콧방귀만 뀌더군요.]
태수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정말 천벌 받을 놈들이군요. 그런데 그런 무례한 짓을 왜 항의하지 않으셨습니까? 사우디 왕실이나 대한민국 대사관에 진작 말했다면······.]
베두인족은 고개를 돌렸다.
[저희 일을 고자질하란 말입니까? 그깟 놈들은 왕실에 보고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희가 해결하면 그만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족쇄를 채워 가둬 놨습니다. 이제 좀 반성했을 겁니다.]
베두인족들은 외부인에게 되도록 해를 끼치지 않는단 전통이 있다.
괘씸한 놈들도 외부인이라고 많이 참은 모양이다.
혼내주는 방식이라고 해봐야 족쇄를 채워 행동반경을 제한한 것이라니.
태수 같았으면 아예 거꾸로 매달아 버렸을 것이다.
[후, 저는 그런 일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베두인족 여러분께 깊이 사죄드립니다.]
태수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자 수뇌부들이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아이고, 아닙니다. 은인께서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잡혀있는 자들에 대해 신원을 파악하고 싶습니다.]
[그게···, 그건 저희도 잘 모릅니다.]
그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해한다.
[잘못한 놈들을 잡아 가둔 거라······. 외부인이라 제대로 조사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이해한다.
태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삼원 건설 수뇌부들을 직접 만나야 하나······.’
껄끄럽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은 박정환의 제물로 바쳐질 자들. 엮이면 골치만 아플 사람들이지.’
베두인족들이 안전히 데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태수는 그들에 대해 관심을 꺼버렸다.
어쨌건 태수에게 주어진 임무는 아니었으니까.
조만간 특수요원들이 도착해서 알아서 데려가겠거니 생각했다.
태수에겐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들까지 신경 쓸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만나면 도로 공사에 대한 얘기가 안 나올 수가 없어. 태양 건설이 삼원 건설의 일을 집어삼켰다는 걸 알면, 저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집어삼킨 건 일뿐만이 아니다.
어쩌다 보니 회사까지 집어 삼키게 됐다.
태수가 청한 건 도로 공사 인수인계 공문이었는데, 박정환이 먼저 나서서 삼원 건설을 태양 건설에 뚝 떼어 줬다.
‘우린 피차 만나서 좋을 게 없는 사이다. 그런 이유로 난 내내 뒤에서 물건과 음식을 지원할 뿐, 그들 앞에 나서지 않았는데······.’
태수가 그들과 엮이지 않으려는 이유는 또 있었다.
‘그들이 영악하게 태양 건설에 들러붙는 경우도 껄끄럽긴 마찬가지다.'
태양 건설에 비해 삼원 건설의 덩치가 훨씬 크기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자본, 기술, 실적, 직원 수까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전부 태양 건설은 상대도 되지 않는다.
‘상전을 모시고 살 수는 없어.’
순순히 태양 건설에 들어오는 척하며 외려 잡아먹으려 들 것이다.
태수와 박철완은 기존의 삼원 건설 수뇌부와 불필요한 신경전을 해야 한다.
그럼 본격적인 세력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새 물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이지. 태양 건설에 그들의 자리는 없어. 난 박철완을 중심으로 회사를 키울 거다.’
고민은 끝났다.
‘난 그저 신원만 파악해 특수요원의 일을 거들면 그뿐이다. 한 사람만 불러다가 물으면 되겠지.’
태수는 입을 열었다.
[삼원 건설의 사장을 잠깐 불러줄 수 있겠습니까?]
[아! 사장이 누군지는 압니다. 하지만 그는 여기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혹시 풀어줬습니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죽었다거나······.]
베두인족이 외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이곳은 사막이다.
풍토병에 걸려서.
혹은 싸움에 휘말려서.
아니면 사막에서 길을 잃어서.
얼마든지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아닙니다. 애초에 그를 잡아오지도 않았습니다.]
[우리 두 부족이 싸우기 시작할 때, 돈 되는 걸 전부 챙겨서 제일 먼저 도망갔다고 합니다.]
들을수록 가관이다.
태수는 헛웃음이 나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방치됐던 공사 현장이 떠오른다.
돈이 될 만한 건 전부 베두인족이 챙겨 간 줄 알았는데, 사실은 사장 일당이 가지고 튄 거라니.
[그럼 잡혀 있는 사람들은 누굽니까? 삼원 건설 수뇌부가 맞습니까?]
[글쎄요. 저흰 잘 모릅니다. 아무래도 수뇌부들은 맞는 것 같긴 한데······.]
[그럼 저들 중에 누가······.]
태수는 말을 하다 말았다.
이들이 그런 걸 속속들이 알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베두인족 수뇌부들이 난감해한다.
‘차라리 내가 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직접 묻는 게 더 빠르겠군. 잠깐 좀 껄끄럽고 말지.’
태수는 괜히 미안해졌다.
[죄송하긴요. 아닙니다. 제가 괜한 폐를 끼쳤습니다. 직접 가서 몇 마디 물어보면 될 일입니다.]
[중요한 일인 줄 알았으면 저희들이 진즉 제대로 파악해놓았을 텐데······.]
[마음 쓰지 마세요. 사실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닙니다.]
간단한 일이고, 별 것 없는 일이다.
삼원 건설에서의 직책, 이름, 나이 같은 것만 알면 충분하다.
‘박정환은 피랍된 인질들을 구출한 대통령이란 타이틀만 얻으면 되니까. 방송에 내보낼 인적 사항만 확보하면 그만이지.'
사장이 있으면 좋지만, 없으면 그만이다.
수뇌부들도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박정환에게는 그냥 지금 여기 잡혀 있는 삼원 건설 사람들이란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따라오십시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 *
사막 부족의 한 천막 안.
족쇄로 어설프게 줄줄이 묶인 7명이 있었다.
잘 챙겨먹은 덕분에 다들 혈색이 좋고 건강해보였다.
그들 중 한 명이 짜증을 버럭 내면서 그릇을 엎었다.
“아, 더럽게 맛없네. 이걸 사람 먹으라고 내왔다니.”
어린애도 하지 않을 밥투정이었다.
“지난번에 연회를 열 때도 우리만 쏙 빼고. 부족 전체가 아주 신났던데요?”
“내가 여기서 이런 개밥이나 얻어먹을 사람이 아닌데, 쯧.”
삼원 건설의 부사장은 씩씩대며 화를 냈다.
생각할수록 분하다.
“풀려나기만 해봐라, 내가 이 새끼들을 가만히 두나.”
“휴, 전무님도 참. 부사장님이 괜히 술 취해서 여자를 건드리니까 이렇게 탈이 났잖습니까.”
“뭐? 나만 그랬냐? 너희들은 얌전히 있었어? 술김에 잠깐 실수한 걸 가지고 이러는 게 말이 돼?”
술 취한 자신들을 여자들에게 떼어 놓고 몽둥이찜질을 하던 사막 전사들이 떠올랐다.
절로 이가 갈린다.
“솔직히 성공했으면 이렇게 억울하지도 않아.”
“그건 그렇죠.”
“여기 여자들이 얼마나 예쁘고 몸매가 좋은데. 그걸 그냥 손 놓고 두고 봐야 하다니.”
“우리가 도 닦는 사람들도 아니고. 솔직히 너무하긴 합니다. 비싸게 굴기는.”
억울하다.
“외국에 나와서 몇 달이나 여자 구경, 술 구경을 제대로 못 했다. 오랜만에 기분 좋게 마신 김에 딱 한 번 실수한 걸 가지고.”
누군가가 한숨을 쉬었다.
“사장님이 우리 금고를 통째로 들고 도망갔다면서요?”
“최 사장! 이 빌어먹을 놈!”
“어렵게 술을 구했다면서 실컷 마시자고 할 때부터 이상했어요. 우리가 함정에 빠진 거죠, 뭐.”
한참이나 최 사장과 그 심복들에 대한 욕이 난무했다.
이후엔 불편한 이곳 생활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난 고기반찬 없으면 밥 안 먹는데. 여긴 음식도 형편없고, 물도 쥐꼬리만 하게 주고.”
“여태 침구 한 번을 안 빨아주더라고요. 미개한 놈들이라 그런지 위생상태가 형편없어요.”
이 가뭄에 먹을 물도 귀하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이들이 고려할 리가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집 생각이 간절했다.
“집에 가고 싶다. 여기까지 와서 이게 무슨 꼴인지······.”
“공사도 못하고, 돈도 못 받고. 이게 뭐야? 개밥에, 족쇄에. 이런 개 같은 취급이라니.”
월월!
그때 밖에서 웬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근처에서 순찰이라도 도는 모양이다.
“베두인족 놈들, 보나마나 우리 몸값을 잔뜩 뜯어먹으려는 속셈이겠죠?”
“당연하지. 중세 귀족들은 그렇게 포로 생활하다 집에 돌아갔다면서?”
“한국 정부랑 우리 몸값에 대해 협상하고 있을까요? 국제 테러범들이 그러잖아요.”
“대한민국 정부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국민들이 이렇게 포로로 잡혀 있는데.”
도저히 못 참겠다.
“안 되겠다. 우리라도 무슨 수를 쓰긴 해야겠다.”
“포로로 잡혔는데, 무슨 수를 쓰겠어요.”
그가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탈출해야지.”
다들 깜짝 놀랐다.
“탈출을요?”
“그래. 아무도 구하러 안 오는데, 평생 여기서 포로로 썩을 수는 없잖아.”
이제는 내 힘으로 내 살 길을 찾아야 할 때다.
목표도 분명하다.
“최 사장, 감히 금고 째 들고 도망갔단 말이지? 어디로 갔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금고!
다들 솔깃했다.
“최 사장만 잡자. 그 돈 나눠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거다.”
최 사장이 들고 갔다는 금고.
거기에 든 돈은 대략 4백만 달러쯤 된다.
“금고에 여권이고, 돈이고 다 들었다. 최 사장을 잡아야 해. 그 돈으로 오랜만에 신나게 놀다가 한국으로 돌아간다. 다들 어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