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51화 (51/230)

51. 사우디 왕족의 초대(3)

태수는 느긋했다.

라흐만과는 정반대의 여유였다.

[체면이 땅에 떨어질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도로 공사를 기한 내로 끝내러 왔기 때문입니다.]

[현재 상태로는 불가능해.]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도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절 이곳에 보낸 겁니다. 아직 공사 기한은 남았고, 공사는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누구도 이걸 빌미로 라흐만 님을 압박할 수 없습니다.]

[···으음.]

라흐만이 태수의 말을 파악하기 위해 지그시 바라본다.

태수는 라흐만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서부 도시 개발은 이런 작은 일로 멈추지 않을 것이고, 라흐만 님이 계획하신 대로 서부 도시의 물류 혈관이 될 고속도로는 제시간에 개통될 겁니다. 라흐만 님의 앞길은 제가 밝혀드리겠습니다.]

당연하게도 라흐만은 코웃음 쳤다.

[흥, 너희들은 이제 믿을 수 없다. 청일의 한청호도 처음엔 내게 그렇게 큰소리 탕탕 쳤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지? 도마뱀 꼬리 자르듯이 내 손을 잘라 냈다.]

라흐만이 손날로 제 팔을 자르는 시늉을 한다.

태수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전 한청호가 아닙니다. 그리고 전 당신께 먼저 손 내밀고 있습니다. 당신을 저 위로 끌어올려 주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도로 공사는 완공할 것이라고 약속드리죠.]

라흐만은 태수의 손을 노려보기만 한다.

선뜻 손을 잡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손을 쳐내지도 않는다.

태수는 웃었다.

[초면에 대뜸 믿음을 강요할 수도 없으니 난감하군요. 하지만 제 말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라흐만 님께 청하고자 합니다. 저랑 내기하시겠습니까?]

불신하는 사람을 설득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아예 귀를 틀어 막고 트집 잡을 기회만 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수는 설득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바로 내기.

[내기? 지금 감히 내게 내기하잔 말을 꺼냈나?]

내기란 소리에 라흐만이 눈을 번쩍 떴다.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여전하구나. 누가 도발하면 정면으로 받아쳐야 직성이 풀리는 저 성미는.’

자존심 세고, 승부욕이 강하기 때문이다.

능력이 뛰어나고, 가진 자원도 많기 때문이다.

영악하게 계산하여 이긴다 싶으면 풀 베팅도 서슴지 않는 배짱까지 갖춘 남자였다.

‘그는 내기를 좋아하지. 상대방의 자존심을 정면으로 뭉개면서, 동시에 이득을 챙길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내기를 제안했다.

분명 통할 거란 걸 확신하니까.

‘당신은 이 내기를 절대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전부 당신에게 유리하게 들릴 테니까.’

태수는 말했다.

[제가 기한 내 도로 공사를 완공하지 못하면 삼원 건설에 마저 지불하셔야 할 1,250만 달러의 70%인 875만 달러를 포기하겠습니다.]

[뭐라고?]

라흐만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한 푼도 받지 않고 공사를 완공하겠다고? 제정신인가?]

태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기란 원래 그런 겁니다. Winner takes all.]

라흐만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태수를 본다.

아까의 노기는 완전히 걷히고, 태수의 제안에만 집중한다.

그만큼 태수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약속하겠습니다. 제가 내기에서 지면 한 푼도 받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물론 국제 소송을 걸지도 않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라흐만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태수를 보았다.

[좋아, 그렇다면 네놈이 이기면? 내가 무엇을 해 줘야 하지?]

[공사 대금을 석유로 주십시오.]

여기까지 석유 때문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일 쇼크 때 화끈하게 한몫 제대로 벌어 보고자 이 고생을 자처했다.

그러니 석유를 내놓을 수 있는 자에게 석유를 왕창 뜯어내야 한다.

[현재 석유 시세대로 쳐서 875만 달러어치를 제가 요구할 때 무조건 주셔야 합니다.]

[현재 시세대로 석유 875만 달러어치? 그럼 얼마나 되나?]

[현재 석유 가격이 1배럴당 2.8~2.9달러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한 302~312만 배럴 정도 되겠네요. 여기에 관세랑 수수료 같은 건 빼 주십시오. 안 그래도 완공까지 한 푼도 못 받고 공사하게 생겨서 속 쓰리니까요.]

태수는 씩 웃었다.

[가능하시겠죠?]

돈 대신에 현물로 갚는다니, 가능하다 뿐인가.

[흠··· 석유로 갚는다는 부분이 꽤 마음에 드는데?]

사우디에서 넘치는 건 석유고, 부족한 건 달러다.

지어야 할 건물도, 사 와야 할 물건도 전부 달러로 치른다.

그러니 달러 대신 석유로 달라는 태수의 제안은 라흐만의 입장에서 무척 유리한 제안이었다.

‘아주 좋아. 마음에 들어.’

라흐만은 기분이 좋아졌다.

[만일 공사를 기한 내로 끝내서 대가를 석유로 치를 수 있다면 내가 선심 써서 뒷부분을 덧붙여 350만 배럴에 맞춰 주지.]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그 정도는 내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있는 정도라서.]

라흐만이 그제야 만족스럽게 턱을 쓸며 웃었다.

[그런데 내기라면서 왜 일방적으로 내게 유리한 것만을 제안하는 거지?]

[뭐긴 뭐겠습니까?]

[호의, 로비, 뇌물, 연줄, 조공? 하하하, 뭘 좀 아는 친구로군. 그거라면 아주 싸게, 제대로 먹혔다.]

라흐만은 기분 좋게 웃었다.

태수는 씩 웃었다.

‘지금은 네가 유리하다고 웃지. 하지만 이제 중동 전쟁까지 반년 정도 남았다. 세계 제1차 오일 쇼크가 터지면 석윳값은 석 달 만에 네 배나 껑충 뛴다. 그때가 돼도 웃을 수 있을까?’

하지만 누구도 당장 반년 후에 오일 쇼크가 올 거란 걸 모른다.

오직 태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내가 이 제안을 꺼내기 위해 모든 것을 떠안고 한국에서 날아온 거다.’

사우디 왕국은 중동 제일의 산유국.

중동 전쟁으로 산유국들이 석유 수출을 금하는 바람에 온 게 오일 쇼크다.

따라서 언제든 석유를 내준다는 약속은 반드시 받아 둬야 한다.

[어떠십니까? 저와 내기하시겠습니까?]

[물론이다. 그런 내기라면 기꺼이 받아들이지, 하하하.]

라흐만은 눈을 빛냈다.

[좋아, 그 내기를 계약서로 작성할 수 있겠나? 이왕 하는 거 확실해야지.]

유리한 내기를 붙잡고 싶은, 그 얄팍한 수작질을 모르는 태수가 아니다.

[계약서로요? 까짓것, 그럽시다.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할 수야 있겠습니까.]

[역시 마음에 들어. 좋아, 그럼 당장 작성하지.]

태수는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내가 나서서 부탁해야 할 일을 오히려 먼저 해 주겠다니 참 고맙군. 오일 쇼크 때 계약서가 없으면? 석유를 내어 달라고 아무리 말해도 너희들은 입 닫고 꿀꺽할 게 뻔하지.’

라흐만이 경호원을 시켜 종이와 펜을 내오도록 했다.

이어 내기 계약서는 영문으로 작성해 각자 한 부씩 나눠 가지기로 했다.

태수는 계약서를 쓰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판을 좀 더 키웁시다.]

도발적인 눈빛이다.

라흐만도 지지 않았다.

[그거야 괜찮다만, 너는 나한테 무엇을 더 줄 수 있지? 어차피 빈손이라고 도로 공사도 내팽개치고 고국으로 도망가면 내가 곤란해. 국제 소송이라도 걸라는 말이냐?]

태수는 씩 웃으며 품속에서 문서를 몇 장 꺼냈다.

[이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석회 광산 권리증? 시멘트 공장도 갖고 있었나? 그것도 사우디 왕실이 공식적으로 증명하고, 왕가의 인장까지 찍혀 있는?]

태수가 저 멀리 서 있는 코리노 족장을 슬쩍 보았다.

[코리노와 하코넨 족장님들이 힘을 좀 쓰셨죠.]

바로 오늘 받은 따끈따끈한 공식 인증 문서를 이렇게 내기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필요할 때 요긴하게 잘 쓰다가 중동 사업을 완전히 정리하고 떠날 때, 그들에게 전부 물려주고 떠날 예정이었다.

라흐만은 크게 웃었다.

[네놈, 수완이 정말 대단하구나. 우리 사우디 땅과 자원을 네놈이 꿀꺽했다는 것이지?]

[공짜로 먹은 건 아닙니다.]

태수는 저쪽 항구에 일하는 베두인족들을 가리켰다.

[누구 돈으로 수로와 도로 공사가 진행되는 줄 아십니까?]

전부 태수의 돈으로 한다.

게다가 태수는 베두인족들에게 임금을 후하게 주고 있었다.

일하는 자들의 삯은 올려주면 올려줘야지, 단 한 푼도 깎지 않는다는 게 태수의 신념이었다.

[서쪽 도시를 건설하시는 분이라면 이게 얼마짜리 공사인지 대충 아실 텐데요?]

알다마다.

사우디 국왕이 친히 명을 내려 직접 이번 공사의 총액을 산출한 자가 바로 라흐만이었다.

라흐만은 눈 딱 감고 반으로 후려쳤다.

[적어도 1,250만 달러짜리 도로보다는 비싼 공사겠지.]

[반으로 후려치는 거 누가 모를 줄 압니까? 2,500만 달러짜리 공사죠.]

태수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라흐만은 태수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여러모로 대단한 자군. 한청호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거물이구나.’

라흐만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는 석유를 더 올리지.]

[석회 광산과 시멘트 공장입니다. 못해도 도로 공사 금액보다 10배 가치는 더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태수는 씩 웃었다.

[그럼 어디 보자. 3,500만 배럴이 되는군요.]

[끄응. 생각보다 너무 부담스러운 양이군.]

이럴 땐 도발이 최고다.

[쫄리면 그만 두시죠.]

[설마. 그까짓 것.]

어차피 막다른 길에 몰린 라흐만이다.

Winner takes all.

현재 라흐만의 입장과 딱 들어맞는 말이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도로 공사를 반드시 끝내야 한다. 아니면 사우디 왕실에 내 자리는 없을 테니까. 개선장군으로 돌아가야지.'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다.

라흐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약서에 서명하고 사인까지 마쳤다.

[네놈의 배짱이 참으로 대단하다. 도저히 따를 수가 없구나. 불가능한 공사를 반드시 마쳐야 하니 나 역시 내기를 핑계로 방해할 수도 없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저처럼 배짱이라도 있어야 이런 짧은 기간 동안 공사를 마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맞다.

[라흐만 님의 체면과 자존심, 평판, 앞길, 서부 도시 개발 계획이 다 제 도로 공사에 달려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비록 내기를 하긴 했지만 많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라흐만이 한숨을 푹 쉬었다.

[부디 네가 호언장담한 대로 공사를 기한 내로 마무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 공사에 내 모든 것을 걸었다. 나는 이제 물러설 곳이 없다. 그걸 명심해라.]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렇겠어. 먼 타향에서 이곳까지 와서 여태 받은 돈 하나 없이 내내 돌아다니기만 했으니까.]

사실 요즘 시멘트를 독점으로 팔고 있어서 주머니는 두둑하다.

하지만 태수는 시치미를 뚝 떼었다.

[그럼 지원 좀 해 주십시오.]

[조금만 기다려라. 사우디 왕실에서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모양이니까. 공사에 보조를 해 줄 모양이야.]

기쁜 소식이었다.

[어찌 그리 잘 아십니까? 마치 직접 공사비를 산정하신 분처럼.]

라흐만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말았다.

[이거야 원, 내가 아주 네놈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었구나. 그래, 내가 직접 공사비를 산출했다. 총 공사비는 네가 말한 그대로다. 정확히는 2,405만 달러.]

태수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걸 정확히 아시면서 아깐 1,250만 달러로 후려치신 겁니까?]

[앞에 붙은 말은 잊은 모양이지? ‘적어도’ 1,250만 달러는 든다고 했다.]

[하하하, 그렇군요.]

[네놈 뱃속에는 능구렁이 수십 마리가 들어 있을 것 같다. 아니면 전갈이 수백 마리.]

라흐만이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마지막 기회가 될 거야. 부디 이번엔 날 실망시키지 마라. 반드시 도로 공사를 기한 내로 끝마쳐야 한다.]

태수가 라흐만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태수는 씩 웃었다.

[사실 라흐만님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내기라는 탈을 썼지만, 사실 우리는 동맹 관계라는 것을요.]

라흐만이 다시 평소대로 느긋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변했다.

[내기와 동맹은 엄연히 다르지.]

[물론 다르죠. 내기는 승자가 모든 걸 독식하지만, 동맹은 함께 승리의 영광을 누리니까요.]

라흐만이 만족스럽게 웃는다.

[지금 내게 영광을 함께 나누자는 건가? 동맹 제안이라······.]

[보시다시피 우리는 지금 한 배를 탔습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일이죠.]

태수는 크루저를 가리켰다.

[우린 반드시 도로 공사를 완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목표가 똑같습니다. 내기는 완공 시기를 두고 한 것이지, 도로 공사 성사 여부를 두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건 사실이다.

만일 도로 공사 성사 여부를 내기 대상으로 두었다면?

라흐만은 절대로 내기를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동맹이 되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힘을 합칩시다.]

어찌하여 이자는 매번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내놓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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