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50화 (50/230)

50. 사우디 왕족의 초대(2)

잠시 후 크루저가 항구 끝에 정박했다.

크루저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내려 태수에게 다가온다.

태수와 코리노 족장은 그를 기다렸다.

코리노 족장은 그를 알아보는 눈치였다.

[안녕하십니까, 코리노 족장님. 오랜만입니다.]

[이제 보니 하코넨 사람이었군.]

[예, 여기로 오면서 마침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족 전쟁을 끝내기로 하셨다니, 정말 큰 결심을 하셨습니다.]

[다 여기 계신 은인 덕분일세.]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이 힐끔 태수를 본다.

중요한 인물로 여기지는 않는 눈치다.

[사우디 왕실에서는 현재 상황을 자세히 알고 싶어 하십니다. 잠시 배에 오르셔서 사정을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지.]

[감사합니다, 코리노 족장님.]

[여기 이분도 함께 배 위에 오르는 건가?]

[아닙니다. 족장님 한 분만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코리노 족장이 태수를 돌아봤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잠시 후.

경호원은 크루저에서 다시 내려 태수에게 달려왔다.

헉헉대면서 잠시 숨을 고르던 경호원은 태수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은인을 몰라뵙고 큰 결례를 범했군요. 코리노 족장님으로부터 자세한 사정은 전해 들었습니다. 부족의 한 사람으로서, 사우디 왕국의 국민으로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경호원은 정중하게 인사한다.

[라흐만 님께서 당신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자 하십니다. 초대를 받아들여 유람선에 올라 주시지 않겠습니까?]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기꺼이 초대에 응하죠.]

홀쭉이도 태수를 따르려고 할 때 경호원은 고개를 저었다.

[오로지 저분 한 분만 초대하셨습니다.]

* * *

경호원을 따라 호화로운 유람선형 크루저에 올랐다.

크루저 가장 상석.

차양까지 쳐서 금과 보석으로 장식한 의자에 앉아 있는 30대 남자.

그는 금실로 수놓은 화려한 옷으로 온몸을 휘감은 채 각종 보석 장신구로 잔뜩 치장했다.

멋들어진 콧수염에 선글라스까지.

‘중동 멋쟁이군.’

태수를 본 라흐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어서 오시오. 내 배에 오른 걸 환영하오.]

코리노 족장이 말했다.

[저분이 라흐만 님이십니다. 현직 국방부 장관의 12번째 아드님이시자 서부 도시 개발을 담당하고 계십니다.]

태수는 정중히 인사했다.

[대한민국에서 온 강태수라고 합니다.]

[당신이 바로 우리 왕국에 오자마자 사막 전역을 발칵 뒤집어 놨다는 인물이로군.]

라흐만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활짝 웃었다.

‘아니, 이자는?’

하지만 태수가 놀라는 건 다른 의미에서였다.

‘Mr.아브라함?’

태수는 이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두바이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행사에는 반드시 참석하는 유명 인사 중 한 명이니까.

‘장차 두바이 도시를 계획하고 건설하여 이름을 떨친 남자가 어째서 사우디 서쪽 도시를 건설하고 있는 거지?’

그래서 좀 혼란스러웠다.

‘신상이 전부 베일에 싸인 남자였는데, 알고 보니 사우디 직계 왕족이었단 말인가?’

두바이는 아랍에미리트를 구성하는 일곱 개의 토호국 중 하나이자 최대 도시로 유명하다.

21세기에는 아랍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보다 더 유명하게 되는 항구 도시이자 관광 도시가 된다.

‘어째서 사우디 왕족이 두바이에서 도시를 건설하고 있었을까? 따로 숨겨진 속사정이 있었나?’

라흐만은 선글라스를 등 뒤의 시종에게 건넸다.

그리고 느긋하고 여유롭게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라흐만 빈 칼리드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초대 국왕 폐하이신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의 다섯 번째 아들인 칼리드의 열두 번째 아들인 라흐만이오.]

소개가 길었지만 이미 예전의 기억으로 익숙한 태수는 그러려니 했다.

그들은 이렇게 조상을 기억하며 자신의 조상과 제 이름을 자랑스러워 했다.

‘라흐만은 그나마 초대 국왕부터 시작하니까 이름이 짧아서 다행이지.’

몇 대 위의 할아버지 이름까지 넣는 경우가 흔했다.

심한 경우는 8대를 거쳐 이름 짓는 사람도 있었다.

라흐만이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여기 앉으시오.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척이나 많으니까.]

[좋습니다.]

태수는 라흐만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코리노 족장이 재빨리 태수의 옆자리에 앉으려 했다.

하지만 라흐만이 손을 들었다.

[아니, 코리노 족장은 나서지 마시오. 우리의 대화는 오로지 둘만이 함께할 것이오.]

라흐만이 코리노 족장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코리노 족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너희들도 전부 물러서라. 중요한 대화를 할 것이다.]

라흐만은 경호원들도 손짓으로 물렸다.

경호원들은 무덤덤하게 인사하고 몇 발자국이나 뒤로 성큼성큼 간다.

이윽고 화려하게 장식된 선상 위 응접실엔 태수와 라흐만만 남겨졌다.

[그거 아나? 사우디 왕실엔 총 32부서가 있고, 그중에 대한민국에 우호적인 부서는 오로지 세 곳이다.]

태수도 알고 있다.

라흐만은 세 개를 편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국방부, 외무부, 그리고 바로 내가 있는 건설부.]

라흐만이 완전히 접힌 주먹을 흔들며 차갑게 웃었다.

[어쩌나? 이번 일로 대한민국에 우호적인 부서가 전부 사라지고 말았네?]

시작부터 말 속에서 뼈가 느껴진다.

[일단 내 배로 불렀으니 주인 된 도리로서 마실 것 한 잔은 내줘야지.]

라흐만은 와인 병과 잔을 집어 와인을 따르기 시작했다.

[와인은 어떤가?]

[좋습니다.]

태수도 오랜만에 와인 잔을 들었다.

[이 와인, 어때 보이지? 싸구려 같은가, 고급 같은가?]

라흐만의 시험이다.

하지만 태수는 고위층을 상대해야 하는 청일 그룹 총괄 비서실장이었다.

당연히 와인에 대해 제대로 교육받았고, 오랜 세월 동안 마신 덕분에 조예도 제법 깊다.

[레드 와인의 색을 보면 숙성 연도와 품질, 생산지 등을 알 수 있죠. 루비색을 띤 걸 보니 상당히 잘 숙성된 최고급 와인이군요.]

태수는 눈을 감고 와인을 음미했다.

[쉬라즈(Shiraz) 품종을 베이스로 소량의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을 포함한 와인이군요. 혹시 펜폴즈 그렌지(Penfolds Grange), 1951년산입니까?]

라흐만이 거만한 포즈로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린다.

[정확하네. 한 병에 4만 달러나 주고 사 온 놈이지. 제법이군.]

펜폴즈 그렌지는 전 세계 와인 애호가가 손꼽는 최고의 호주 국보급 와인이다.

오죽하면 2001년 호주 국가 문화재로 등재됐을까.

1951년부터 매년 출시하는 빈티지마다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데, 그중에서도 1951년을 최고로 쳐 준다.

‘2018년인가, 19년인가? 미국의 와인 셀러에서는 750밀리 한 병에 9만 달러에 팔고 있었지. 우리 돈으로 억이 넘는 비싼 와인을 손님맞이로 내왔군.’

역시 중동의 왕족. 이게 갑부의 씀씀이인가.

오랜만에 입이 호강하는 기분이다.

[상당히 좋은 와인이군요.]

[좋은 와인? 나 역시 그런 줄 알았지. 호주 최고의 와인이라는 브랜드와 그에 걸맞은 비싼 가격. 최소한 기본은 할 줄 알았다.]

갑자기 라흐만이 눈썹을 와락 구기면서 입을 뗐다.

[하지만 싸구려 와인보다 맛이 없어. 떫고 쓴맛이 나. 우웩, 도저히 마셔 줄 수가 없군.]

그가 와인 잔을 뒤집어 와인을 바닥에 쏟아 낸다.

그리고 태수를 노려보는 눈빛이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아무리 비싼 돈을 주고 사 왔어도 못 마시면 쓰레기야. 음식물 쓰레기.]

라흐만이 레드 와인 병을 집어서 바닥에 내던졌다.

흰 천이 깔렸던 바닥에 레드 와인이 붉게 번져 간다.

[삼원 건설. 3년짜리 공사를 2년 내에 마친다고 약속하고선 고작 1/3도 채 짓지 않고 줄행랑쳤다.]

라흐만은 이를 갈았다.

[1,250만 달러짜리 공사였어. 서부 도시 개발의 신호탄이 될 고속도로 공사였다. 내가 왜 이 항구를 공들여 개발하고, 쇼복시를 만들었는지 아는가? 바로 이 항구를 석유 산업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서였어! 그걸 네놈들이 쓰레기로 만들어 버렸지!]

라흐만이 제 목을 답답하게 덮고 있던 옷깃을 잡아당긴다.

[젠장, 너희들 때문에 내 숨통이 다 막히는군.]

라흐만은 옷깃을 북 찢어 버렸다.

마치 태수를 찢어 죽이고 싶다는 것처럼.

라흐만은 찢어 낸 옷깃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네놈들 때문에 내 체면이 바닥에 떨어졌다. 내 자존심은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지고. 내 평판은 이 옷처럼 너덜너덜해지고 말았지.]

그가 맹수처럼 으르렁댄다.

[서부 도시 건설 계획은 곧 중단될 상태고, 짓다 만 도로는 방치되었다. 나 역시 이 자리에서 끌어내려지게 생겼다. 바로 네놈들 때문에!]

태수는 피식 웃었다.

‘라흐만, 짖는 개는 무섭지 않다.’

정말 무서운 개는 침묵 속에서 달려들어 단번에 목덜미를 물어뜯는 녀석이다.

‘한일권이 두려워했던 맹견 Mr.아브라함. 그런데 지금은 강아지에 불과하구나.’

산전수전 다 겪고 두바이 높은 곳까지 기어 올라갔던 Mr.아브라함.

그는 침묵 속에서 칼을 꽂는 무서운 인물이었다.

사우디 국방부 장관의 보호 아래서 호의호식하는 지금의 라흐만과는 확실히 달랐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도 맹견은 맹견. 집 지키는 애완견으로는 자라지 않는다.’

태수는 두바이에서 만났던 그를 똑똑히 기억한다.

그래서 탐난다.

‘아직 어릴 때 잘 길들여 내 편으로 만들어 둘 수만 있으면 천군만마를 얻는 것일 텐데.’

한번 해 보지, 뭐.

태수는 와인 잔을 살펴보며 말했다.

[향도 좋고, 색도 좋고, 생산지와 품종이 확실한 최고급 와인이 싸구려 맛을 낸다면 둘 중 하납니다.]

태수가 와인 잔을 뱅글뱅글 돌린다.

[당신이 사기당해서 처음부터 싸구려 와인을 샀거나, 당신이 최고급 와인을 제대로 다룰 줄 모르거나.]

[네놈이 지금 나를 모욕하는 거냐? 사기당해도 병신이고, 최고급 와인을 다루지 못해도 얼간이가 아닌가!]

태수는 바닥에 내던져진 와인 병을 가리켰다.

[최고급 와인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디켄팅(Decanting) 해야 하는 법이죠. 바다 위에서 고속으로 달리는 크루저를 타고 왔으니 와인 병 속은 침전물로 뒤죽박죽이 됐을 겁니다.]

하지만 라흐만은 그걸 확인하지 않았다.

[레드 와인은 우아하지만 까탈스러운 미인과 같습니다. 오랜 숙성으로 침전물이 섞여 있는 걸 그냥 서비스하면 당연히 떫은맛이 날 수밖에요. 시간을 들여 침전물을 분리해야 그 맛과 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법입니다.]

쾅.

[지금 나를 가르치려 들어?]

태수는 테이블에 올린 와인 디켄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제대로 최고급 와인을 마실 준비를 해 놓고, 너무 서두르셨습니다. 아마도 제가 항구에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겠죠.]

태수는 라흐만의 사정을 한눈에 꿰뚫어 보고 있었다.

[침전물이 가라앉는 1시간을 기다릴 수 없어서 애가 타셨습니까? 텁텁하고 떫은맛을 보셨다고 최고급 레드 와인을 버리다니. 아깝지 않습니까?]

[그깟 4만 달러짜리!]

[그럼 1,250만 달러짜리 도로 공사도 화가 난다고 버릴 겁니까?]

라흐만이 도로 공사를 버릴 수 없다는 누구보다 잘 아는 태수다.

‘애초에 도로 공사를 버릴 수 있었다면 비공식적인 서신을 띄워 박정환을 괴롭히지도, 외무부를 닦달하지도 않았겠지.’

게다가 라흐만은 본인의 입으로 털어놨다.

-나 역시 이 자리에서 끌어내려지게 생겼다. 바로 네놈들 때문에!

라흐만이 이렇게 분노하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라흐만은 지금 반드시 도로 공사를 완공해야 하는 처지라는 거지.’

태수는 자신만만했다.

‘네 패를 너무 일찍 깠다, 라흐만. 나를 상대하려면 좀 더 여유롭게 굴었어야지. 예전의 당신처럼.’

태수는 확신했다.

‘라흐만은 지금 절벽 끝에 몰린 상태다. 그러니 나를 위협하는 수밖에 없는 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사를 완공해야 하는 처지가 네 약점이다. 그러니 넌 절대로 내 제안을 뿌리치진 못할 것이다.’

뻔히 보이는 패에.

뻔히 보이는 칩에.

뻔히 보이는 결과.

‘라흐만 넌 이미 나와 한배에 탔다. 그리고 그 배를 모는 건 바로 나, 강태수다.’

둘 다 목적이 같다.

도로 공사를 기한 내에 끝마쳐야 한다는 점에서.

라흐만은 태수와 무조건 함께할 수밖에 없는 동맹이다.

그러니 저렇게 서둘러 달려온 것일 테고, 협박으로 포장하여 공사를 재촉하는 것이다.

태수가 서둘러 공사를 완공해야 라흐만이 살 수 있으니까.

‘라흐만 여기까지 친히 와서 속사정을 털어놔 주다니, 정말 고맙다. 기대에 부응해주마.’

이번엔 태수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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