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49화 (49/230)

49. 사우디 왕족의 초대(1)

금산 그룹의 총수, 장준용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손에는 사우디에서 날아온 여러 장의 전보가 들려 있었다.

“강태수, 이 친구가 일을 참 재밌게 한단 말이야.”

<황금 명함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유조선을 두 달만 이대로 정박할 순 없겠습니까?>

“내 명함을 이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는데. 만일 처음부터 이 명함을 내밀며 두 달 동안 사우디 항구에 정박해 달라고 청했다면 들어주지 않았을 거야. 그걸 꿰뚫어 봤구나.”

한청호와 극명히 대비되는 작은 청이기에 흔쾌히 수락했었다.

바레인 가는 길에 물과 자재를 싣고 가는 일쯤이야.

하지만 두 달 동안 항구에 유조선을 묶어두고 싶다고 했다면 대답은 달라졌을 터다.

“혹시나 해서 다른 유조선 스케줄을 조정해 한 척 더 띄웠으니 이 청을 수락하는 건 문제가 없어.”

이미 이렇게 될 줄 어느 정도 예상했던 장준용이다.

하지만 한청호 앞에서 체면을 지켰다는 게 중요했다.

장준용은 사우디 왕실에서 보내온 전보를 보며 피식 웃었다.

“명함을 회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이제 보니 사우디 왕실까지 움직일 줄 아는 친구였군그래.”

사우디 왕실에서도 같은 이유로 전보가 왔다.

<바레인으로 향하는 유조선의 발을 좀 더 묶고 싶습니다.>

<그것이 힘들다면 유조선을 사고 싶습니다. 사우디 왕실에 팔아 주시길.>

<사우디 국왕께서 이 일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립니다.>

<원하는 조건을 듣고 싶습니다. 빠른 회답 부탁드립니다.>

볼수록 흡족하다.

“생각해 보면 고작 유조선 하나에 든 물! 그것만 가지고 일을 이렇게까지 키우는 것도 재주구나.”

장준용은 무릎을 탁 치며 웃었다.

“강태수 덕분에 사우디 왕실, 그것도 국왕과 끈이 생기는구나. 이제껏 제대로 뚫기 힘들었던 사우디 진출을 시작할 수 있겠어.”

장준용은 비서 김환에게 말했다.

“사우디 주재 대사관에 전보를 보내게. 강태수에게 대답을 해 줘야지.”

“뭐라고 보낼까요?”

“수락.”

한 단어면 족하다.

“사우디 왕실에는 뭐라고 보낼까요?”

“공사 입찰을 원한다고 보내.”

장준용이 노리는 건 따로 있었다.

“주베일 산업항을 우리 금산이 지어야겠다.”

금산이 드디어 사우디에 한 발을 걸친다.

‘이게 다 강태수 덕분이다. 또 빚을 지고 말았어.’

강태수에게 보답할 길이자, 금산의 공사 입찰 확률을 높이는 방법이 떠올랐다.

“그럼 강태수에게 공동 입찰을 제안해볼까?”

유조선의 물만으로 사우디 왕실을 움직일 수 있는 수완이라면, 분명 주베일 산업항 입찰도 간단히 따올 수 있을 터다.

* * *

부르릉.

태수는 지프 차를 타고 항구로 향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홀쭉이가 싱글벙글 웃었다.

“우물 공사도 순조롭고, 석회 광산과 시멘트 공장도 제법 모습을 갖췄고, 시멘트 설비 시설도 이제 막 가동을 시작하고 있으니 걱정할 게 없다.”

“아직도 할 일이 많아.”

“하긴, 여태 마을 공사한다고 항구는 내버려 뒀었지. 가서 바지선에 실린 자재들을 내리고, 수로 공사할 자리를 정하면 되겠구나?”

“그래.”

홀쭉이과 낄낄대며 가다 보니 어느덧 항구에 도착했다.

유조선이 정박해 있는 항구는 근방에서 가장 큰 항구였다.

드나드는 배가 많고, 고기잡이 어선도 많았다.

“태수야, 난 여기 올 때마다 놀란다. 어선 몇 척 정박하는 가난한 동네인 줄 알았더니 항구는 왜 이렇게 크게 지어 놨대?”

“사우디 왕국에서 대규모 건설 투자를 하는 곳이야. 괜히 해외 건설사에 도로 건설 공사를 맡기는 게 아니거든.”

“그러기엔 근처 마을은 별 볼 일 없던데.”

“두고 봐. 이 항구에 우리가 만든 도로까지 제대로 자리 잡으면 이 근방은 지금보다 훨씬 큰 도시로 변하게 될 테니까.”

태수는 이 도시가 어떻게 성장할지 알고 있었다.

여기는 홍해와 접한 항구 도시로, 1975년 이전까지만 해도 작은 마을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2,500년 전부터 예멘과 이집트, 지중해 지역을 연결하는 향신료 중계 무역항 역할을 맡아 오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한마디로 예로부터 해상 무역을 해 온 거점 도시란 말이지. 그러니 사우디 정부가 이곳을 본격적으로 개발하려고 하는 것이고.’

이곳은 머지않아 주베일과 함께 석유 산업의 새로운 중심지 중 하나로 꼽히며 크게 발전한다.

‘이렇게 큰 항구도 만들고, 도로도 뽑았으니 앞으로 발전할 일만 남았어. 이곳에도 석유 산업의 새로운 바람이 불 거야.’

중동 전쟁 이후 사우디 정부는 외국 자본 세력을 내쫓는다.

헐값에 빼앗기던 석유를 되찾아 와서, 석유로 사우디의 부를 채우게 된다.

그로 인해 산유국의 헐값 석유 덕분에 누리던 서구 황금 자본기가 곧 막을 내린다.

‘중동 전쟁, 그리고 오일 쇼크. 내겐 기회다.’

3개월 단기 투자로는 최적이다.

‘외국 자본 세력이 쫓겨날 때 슬그머니 사우디 석유에 한 발 걸쳤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지만 태수도 안다.

‘거기까지 가려면 정말 천운이 따라 줘야 한다. 현재 내 상태로는 어림도 없어.’

그렇게 되려면 또 다른 변수가 필요하다.

‘어쩔 수 없지. 무리한 욕심은 내지 말자.’

금산의 배에서 크레인을 이용해 컨테이너를 내리고 있다.

트레일러와 지게차까지 동원되었다.

그때 누군가가 태수에게 다가왔다.

한국말이었다.

“강태수 씨?”

“네, 제가 강태수입니다.”

작업복을 입은 30대 남자가 안전모를 벗으며 웃었다.

“금산에서 나왔습니다.”

“반갑습니다. 태양 건설의 강태수입니다.”

“저는 금산 해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쪽은 금산 중공업에서 나왔고요.”

“금산 중공업이요?”

태수가 돌아보자 같은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손을 들었다.

“저기 크레인과 지게차, 트레일러가 보이십니까?”

“네, 저건 다 뭡니까?”

“금산의 회장님께서 따로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청일에서 보낸 중장비만으로는 부족할 테니 잘 쓰고 반납하라.’고 하시더라고요.”

뜻밖이었다.

“금산의 회장님께서 세심하게 도움을 주시는군요.”

“하하하, 저야 모릅니다. 그저 지원을 나왔을 뿐이죠.”

“감사하다고 전해야겠습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수의 생각은 깊어져 갔다.

‘장준용 회장이 왜 자꾸 호의를 베푸는 걸까? 외무부 장관에게 청탁을 넣은 일도 그렇고, 금산 중공업에서 지원 나온 것도 그렇고.’

대통령이 있던 자리에서 담판을 벌이지도 않았다.

태수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장준용이 먼저 도움을 주고 있었다.

‘호의는 호의로, 은혜는 은혜로 갚으면 그만이다. 그래도 먼저 손 내밀어 준 건 잊지 않겠다.’

마침 잘됐다.

안 그래도 물탱크를 가져오는 데 트레일러가 필요한 참이다.

중장비야 있으면 있는 대로 쓰는 것이 아니던가.

홀쭉이가 마침 코리노 족장을 발견했다.

“저기 코리노 족장님이다!”

한쪽에선 베두인족들이 코리노 족장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땅을 판다.

포클레인과 불도저, 덤프트럭도 합세해서.

[모두 수고하십니다.]

태수가 다가오자 몇몇 사람들이 반색했다.

코리노 족장이 제일 먼저 뛰어왔다.

[베두인족들은 수로를 깔고, 관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고생하십니다. 모두 베두인족 덕분입니다.]

[다들 충분한 양의 물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면서 좋아합니다. 임금도 후해서 형편이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고 있다는 군요.]

[다행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만큼 넉넉히 챙겨드리겠습니다.]

일하는 자의 삯은 함부로 깎는 게 아니다.

태수는 그들과 함께 상생하길 원한다.

[은인께서 말해 주신 대로 저쪽에 물탱크를 놓을 곳도 터를 다지고 있습니다.]

십여 대의 불도저가 중점적으로 땅을 고르는 곳이다.

[우리 부족의 이름으로 사우디 왕실에 한 번 더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얼마나 큰 저장 탱크를 보내 줄지 모르지만 대비는 해 두려고 합니다.]

[잘하셨습니다. 수로 공사도 깔끔하게 진행되고 있더군요. 제가 따로 지시할 것도 없겠던데요?]

[깡마른 자가 어젯밤 설계도를 들고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코리노 족장이 가리키는 사람은 홀쭉이었다.

[저 친구가 작업할 곳을 표시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덕분에 헤매지 않고 수월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코리노 족장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땅에 먹줄을 튕겨 수로 깔 곳을 표시해 둔 모양이다.

먹줄이 먹지 않는 모랫바닥엔 작은 쇠말뚝을 박아 줄을 꿰어 공사 자리를 표시했다.

[저 친구, 제법 야무지게 일을 잘합니다. 붙임성도 좋고, 잘 놀고, 그새 우리 부족 말도 제법 배웠더라고요. 우리 부족 애들이랑 금방 친해져서 다들 좋아합니다. 아, 물론 여자들은 아닌 것 같지만요.]

베두인족 여자들에게 들이대다가 매번 대차게 까이는 홀쭉이다.

홀쭉이가 베두인족들과 인사하며 껄껄 웃고 있었다.

‘박철완에게 달라붙어 며칠이나 끙끙대더니 이런 걸 배웠었구나.’

홀쭉이는 제법 일을 잘하는 녀석이다.

박철완이 가르쳐 준 건 태수가 맡은 도로 공사였을 테지만 홀쭉이는 수로 공사에도 몇 가지를 응용해 일을 처리한 모양이다.

‘홀쭉이는 보통 영업 쪽에서 두각을 드러냈었지만 무슨 일을 맡겨도 제 몫을 하곤 했지.’

잔머리도 제법 좋아서 요령껏 쉽게 일을 처리하곤 했다.

그랬기에 태수를 따라 청일 그룹에 들어왔을 때도 결국 임원진까지 올라갔었다.

‘한청호가 홀쭉이를 꽤 높이 사서 나이에 비해 출세도 빨랐었지.’

홀쭉이는 태수의 든든한 일 친구기도 했었다.

태수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을 써 주고, 언제나 태수를 도와줬었다.

그래서 홀쭉이가 먼저 죽고 나자 많이 외로웠었다.

오죽하면 술을 끊고 20여 년을 쳐다보지도 않았을까.

‘홀쪽이도 이번엔 청일에 안 보낸다. 한일권 손에 죽도록 두지 않겠어.’

그때였다.

항구 저쪽에서 엔진 소리와 함께 엄청나게 호화로운 유람용 크루저 한 척이 진입하고 있었다.

베두인족들도, 항구 시장 사람들도 일제히 크루저를 보았다.

[이야, 진짜 더럽게 크고 화려하네. 어떤 왕족이 여기까지 유람 나오셨나?]

[금장식이 아주 번쩍번쩍해. 저기 의자엔 보석을 박아 놓은 거겠지? 저게 다 얼마야?]

[이것이 바로 돈 낭비구나!]

코리노 족장이 슬쩍 다가와 태수에게 속삭였다.

[사우디 왕실에서 왕족이 온 것 같습니다.]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누군지 아십니까?]

[왕족이 너무 많아서 보통 그것까지는 잘 모릅니다만, 타고 다니는 유람선을 보아하니 한 명 짐작 가는 분이 있습니다.]

[누굽니까?]

[라흐만 빈 칼리드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서쪽 도시 개발을 담당하는 왕실의 인재라고 하더군요.]

이런.

생각보다 거물이 튀어나오셨군.

태수는 요란하게 등장하는 왕족을 다시 보았다.

‘저자가 바로 사우디 서부 도시 건설의 주역이었구나. 이 항구도, 삼원 건설의 도로도 그가 계획했다고 들었는데.’

삼원 건설의 해외 파트너인 쇼복시의 뒷배이자 사우디 서쪽 도시 개발 담당자.

차기 국왕의 12번째 아들이었다.

[은인, 아무래도 제가 왕실에 전보를 보낸 것 때문에 나온 모양입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상황을 잘 설명한다고 했는데, 전보만으로는 부족했나 봅니다. 그래서 서쪽에 주둔해 있던 왕족을 보낸 게 아닐까 싶습니다.]

태수도 동의했다.

‘고작 사실 확인을 하는 데 수도에서 사막을 건너오긴 너무 수고스럽지. 하지만 뜻밖이군. 파견된 왕족이 바로 문제의 그 남자라니.’

태수는 호화로운 크루저를 보면서 생각했다.

‘청일의 한청호가 붙여 준 외국인 스폰서가 바로 저 남자······.’

한청호가 청일 정유를 위해 중동에 만들어 둔 연줄일 것이다.

그렇다는 건.

‘저 남자의 영향력이 생각 외로 강하다는 거지. 한청호가 아무나 연줄이랍시고 공을 들이진 않을 테니까.’

또 하나.

‘한청호가 도마뱀 꼬리 자르듯이 삼원 건설을 버리면서 연줄도 같이 버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우디 왕실에서 항의 문서를 보낼 리 없다.

한청호는 박정환의 권유에도 고개를 저으며 빠져나가려고 했다.

또한 어마어마한 뇌물을 뿌려서 해당 공무원들을 청일의 방패로 만들었다.

‘한청호는 왜 저 남자와의 연줄을 잘라 버린 걸까?’

그게 의문이다.

‘저자의 아버지는 현직 국방부 장관이다. 게다가 차기 국왕이 될 자인데.’

한청호는 왜 권력자의 손을 먼저 놓아 버린 걸까?

그토록 악착같이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이.

‘한번 만나 보면 알 수 있겠지.’

기대된다.

태수는 중동 왕실에 새로운 연줄을 만들고 싶었다.

하늘에서 내려와 태수를 단숨에 저 위까지 끌어올려 줄, 크고 단단한 동아줄 같은 끈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