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사막의 뜨거운 밤(3)
송창준은 작게 감탄했다.
‘아주 손바닥 위에서 갖고 논다. 사납기 그지없는 베두인족을 쥐락펴락하는구나.’
그러고 보니 태수의 호칭이 계속 바뀌고 있었다.
[당신을 부족의 영원한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
이게 베두인족 입에서 먼저 나온 소리였다.
네놈에서 당신이 되었다가, 손님과 귀인을 거쳐 은인까지.
고작 몇 시간 만에 이토록 대우가 달라지는 경우가 또 있을까?
‘베두인 부족에게 은인 소리 듣기는 무척 어렵다고 들었는데. 심지어 사우디 초대 국왕조차도 은인 소리는 못 들었다고 알고 있건만.’
베두인족들은 초대 국왕을 도와 나라를 건국했고, 지금도 왕실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다.
사우디 왕실에서 보물처럼 아끼는 강력한 전사들이자 충성스러운 왕실의 호위들.
그런 베두인족이 태수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자다. 삼원 건설의 일 처리와는 차원이 다르구나. 진작 이 남자를 이곳에 삼원 건설 대신 보냈으면 애초에 이런 난리도 안 생겼을 것 같다.’
한편으로 기대가 되었다.
‘베두인족의 우물과 수로, 거기다 도로 공사까지 떠맡게 되었으니 이걸 어떻게 해치울까? 나였다면 불가능한 일인데.’
태수는 오히려 도로 공사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현재 도로 공사 진행은 30%, 기한은 고작 1년도 채 안 남았어. 저 많은 중장비를 동원해 당장 내일부터 도로 공사에 착수한다고 해도 빠듯해.’
현실적으로 안 된다는 걸 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돼도 않는 기대가 자꾸 생긴다.
송창준으로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왠지 이 남자라면 그것도 멋지게 완수해 낼 것 같단 말이지. 상식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인데, 어떻게 쉽게 해치울까 기대되다니.’
아까 베두인족과 담판을 짓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이다.
‘전력으로 서포트한다. 이 남자를 믿고 끝까지 가 보는 거다.’
오래 쌓인 앙금 때문에 틈만 나면 신경전을 벌이곤 하는 베두인족을 능숙하게도 규합해낸다.
‘입에 강제로 당근 쑤셔 넣고, 여차하면 채찍으로 사정없이 후려치는구나. 저러니 정신이 반쯤 나갈 만도 하지.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하니까.’
그렇게 서로 칼을 겨누던 자들이 몇 시간만에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공사를 의논한다.
일제히 의기투합해서 미래를 논하고 있다.
서로를 인정하고, 의견을 존중한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그저 감탄만 나온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화해와 일을 동시에 추진하다니.'
시소 받침대를 날려버리고 두 부족을 안전하게 내리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남자는 문제를 이렇게 쉽게 풀고 있었다.
* * *
태수는 느긋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하코넨족이 떠나려는 태수를 붙들고 늘어져서 어쩔 수 없었다.
-은인, 제발······. 부족 회의는 끝내고 가세요. 안 그러면 이 밤에 우리 애들이 사막을 횡단해야 합니다.
-하룻밤만 여기 묵어 주십시오. 무슨 문제가 생기면 물어보러 가기엔 호텔까지 거리가 너무 멉니다. 그러니 제발.
울 것 같은 장로들의 만류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행들을 송창준과 함께 준비한 숙소로 보내고, 태수만 부족에 남았다.
‘내가 너무했나? 시일이 상당히 빡빡하니까 부족 전체에 비상이 걸려 버렸네.’
하지만 금산 조선의 배를 빌렸으니 어쩔 수 있나.
바레인에 석유 실으러 갈 배를 물 좀 실어 달라고 부탁한 태수가 아닌가.
금산의 장준용은 호의를 베풀어 출항 날짜를 앞당겨 주었다.
또한 태수가 공사를 빨리 시작할 수 있도록 전속력으로 항해하도록 하여 며칠 빨리 항구에 당도했다.
'이번에 그걸 쓰게 될 줄은 몰랐군.'
태수는 예전에 받았던 황금 명함을 떠올렸다.
예전에 장준용이 몰리브덴 납품을 고마워하면서 태수에게 건네준 것이었다.
-이걸 가지고 오면 청을 하나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태수는 송창준에게 황금 명함을 들려 보냈다.
덧붙여 금산의 비서실장 김환의 명함도 함께.
아마 대사의 심복이 분명한 송창준이라면 확실하게 일을 처리할 것이다.
‘적어도 두 달만 항구에 정박해 주십사 청을 드렸는데, 과연 수락해 주실까? 만일 거절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어쩔 수 없이 항구에 커다란 저장소를 만들 수밖에.’
도저히 보름 내로 마칠 수 있는 공사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겁을 주지 않았으면 느긋한 베두인족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터였다.
‘전보를 부탁했으니 곧 답이 오겠지.’
외무부에서 일하는 송창준에게 두 군데에 전보를 보내도록 했다.
한 곳은 금산의 장준용에게.
다른 한 곳은 사우디 왕실로.
'사우디 왕실에서도 나서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텐데.'
태수는 그러면서 아까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부족 회의를 한다면서 새파랗게 질린 족장이 태수에게 사정했다.
-도저히 공사 기간을 맞출 길이 없습니다, 은인.
-이렇게 눈앞에서 물을 놓칠 수는 없습니다, 은인.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제발 무엇이든 좋으니 말씀 좀 해 주세요.
태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몇 달은 충분히 먹고도 남을 많은 양의 물입니다. 이참에 선심 쓰세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누구한테 선심을 쓰라는 겁니까?
-옆 부족도 물이 없어서 난리가 났다면서요? 물 줄 테니까 도울 사람들을 보내라고 하세요.
-옆 부족에 말입니까?
-일당으로 물을 나눠 준다면 바글바글 몰려올 겁니다. 물 한 자루씩 준다고 가죽 부대 자루도 지참해 오라고 하세요. 아주 좋아할 겁니다.
-아, 그런 방법이! 아주 좋습니다.
그 길로 베두인족들은 발칵 뒤집혔다.
이 밤중에 낙타를 타고 사막을 횡단하며 소식을 전하질 않나.
훈련된 독수리 발에 편지를 묶어 날리질 않나.
가까운 부족에 보낸다며 당장 사막을 내달리라 하질 않나.
-당장 내일 새벽부터 공사한다. 연회고 뭐고 발 닦고 일찍 잠이나 자.
-노인들에게 애들 맡기고 여자들도 전부 동원한다. 이건 비상사태야.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보름 내에 공사를 완성해야 한다. 이건 부족의 미래가 달린 일이야.
타임 리미트가 걸리자 베두인족은 엄청난 속도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잡소리가 낄 여유가 없었다.
반대 의견이 나오기만 하면 모두 입 모아 가차 없이 혼낸다.
어쩔 수 없이 두 부족은 생사를 함께 걸고 이 대공사를 보름 내로 끝내기로 대동단결하고 말았다.
태수가 일부러 겁을 준 또 다른 이유였다.
-은인, 당장 우물 공사는 그렇다 쳐도 석회 광산과 시멘트 공장을 돌리려면 코리노 부족원들은 어찌합니까?
-공사하는 동안 하코네 마을에서 함께 살지요. 그럼 마을을 지킬 치안 인력도 줄 겁니다.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은인. 역시 대단하십니다. 두 부족이 힘을 합쳐 이참에 아주 커다란 우물과 물 저장고를 만들 겁니다. 물을 왕창 채울 겁니다.
그들은 오랜 전쟁으로 서로 감정이 좋지 않다.
물 때문에 일시적으로 화해했지만, 또 다른 급박한 문제가 아니라면 서로 뭉치지 않을 터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화의 시한폭탄 스위치를 켠 채 일할 수는 없는 법.
내란(內亂)은 외란(外亂)으로 수습하는 건 고래로부터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일부러 겁을 준 목적은 전부 이뤘다. 그러니 이젠 내가 서포트할 차례다. 그들이 공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나머지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벌써 밤이 깊었다.
‘하루 종일 이동하고, 협상한다고 피곤하군.’
이제 태수도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막 입구가 슬쩍 열렸다.
[누구십니까?]
호리호리한 그림자였다.
[쉿, 그렇게 크게 말하면 사람들이 깬답니다.]
무척 아름다운 목소리로 영어를 말하는 여자.
부족의 수뇌부들만 영어를 할 줄 아는 거로 봐선 지위가 꽤 높은 여자였다.
[이 밤에 제 천막에는 왜 오신 겁니까?]
[제 끈을 받아 주시고선.]
[아······.]
이제 보니 무희였다.
젊고 아름다워서 남자들의 혼을 쏙 빼놓았던 바로 그 여자다.
그녀가 나지막하게 웃는다.
[제 춤을 아름답다고 하셨다면서요?]
[네, 하지만 족장님께서 끈을 돌려주신 거로 아는데······.]
여자가 싱긋 웃으며 끈을 들어 올린다.
[이거요?]
아까와는 조금 다르다.
이번엔 여자의 옷자락 매듭으로 묶은 끈을 길게 늘인 거였다.
꼭 저고리 고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냄새.’
아까 맡았던 좋은 향이 은은하게 풍긴다.
그녀가 태수에게 다가오며 작게 속삭였다.
[처음엔 몰랐다고 해도, 이번엔 이게 무슨 뜻인지 잘 알겠죠?]
그녀가 태수에게 다시 끈을 들었다.
볼록한 가슴이 눈에 확 들어왔다.
태수는 끈을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누가 제 시중을 들라고 보냈다면 그냥 돌아가도 좋습니다.]
[제가 억지로 온 것처럼 보이나요?]
그녀가 슬쩍 머리를 풀어헤친다.
폭포수처럼 길고 풍성한 머리가 넘실댄다.
[남자의 잠자리에 숨어들어오는 건 처음이에요.]
그녀는 작게 꺄르르 웃었다.
태수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으며 그녀는 태수를 그윽하게 바라본다.
[난 똑똑한 남자가 좋아요. 사막의 전사들은 대부분 단순하지요.]
그녀가 태수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댄다.
[당신이 날 바라보는 눈빛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끈을 준 거예요.]
그녀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코가 닿을 것처럼 가깝다.
[하룻밤의 이유로 충분하지 않나요?]
그녀가 먼저 태수의 입술을 훔쳤다.
[밤은 짧아요. 누구 덕분에 새벽에 공사를 나가야 하니까요.]
태수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그녀가 태수의 손에 끈을 쥐여준다.
[당신이 내 끈을 받아 주지 않는다면 후회하겠죠.]
그녀가 태수의 손을 잡고 끈을 잡아당긴다.
매듭이 풀리며 옷이 스르르 벗겨진다.
놀랍게도 그녀가 걸친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태수는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온 걸 후회하지 않게 해 드려야죠.]
* * *
사우디 왕궁에서 열리는 왕실 새벽 회의가 마무리될 때였다.
평소와 달리 사우디 국왕은 흥미로운 얼굴로 짤막한 종이쪽지를 내려다보았다.
간밤에 날아온 몇 통의 전보였다.
<코리노 족과 하코넨 족은 휴전했습니다. 마을 우물과 수로 및 도로 공사를 시작하려 합니다.>
<유조선 가득 물을 싣고 왔습니다. 사막 부족에 나눠줄 물입니다.>
<하지만 유조선은 곧 바레인으로 향할 예정이라 다급한 상황입니다.>
<그런 이유로 커다란 저장 탱크 및 정수 전문가들이 필요합니다.>
<많은 이들의 생사가 달린 일입니다. 사우디 왕실의 빠른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사우디 국왕은 다들 전보를 확인하도록 했다.
모두 전보를 읽고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로 죽일 듯이 싸우던 두 부족이 아닌가? 왕실에서 그토록 화해를 주선했건만 들은 체도 않던 자들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다니.]
왕실 비서실장이 고개를 숙였다.
[확인해 보니 두 부족뿐만 아니라 사막 각지에서 베두인족들이 몰려들어 공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중장비까지 동원된 대공사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물과 수로, 도로 공사까지 한다고 전해 왔다.
[대공사? 고작해야 마을 공사가 아닌가?]
[아닙니다. 무려 항구에서부터 두 부족의 마을까지 공사한다고 합니다.]
사우디 국왕이 눈을 크게 떴다.
[그 정도란 말인가? 그럼 일개 마을에서 감당하기 힘든 대공사가 아닌가.]
[말 그대로 대수로 공사인 듯하옵니다.]
[가뭄이 극심하니 두 부족이 한마음 한뜻으로 미래를 도모하기로 한 모양이군. 장하다!]
흡족하다.
사우디 국민이 싸움 대신 가뭄 극복을 위해 두 팔을 걷어붙였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다.
[국민들이 이처럼 솔선수범하여 공사를 시작하는데 나라에서 이를 지원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여봐라, 재경부 장관, 건설부 장관.]
[예, 폐하.]
[수로 및 도로 건설에 관한 예산을 짜오라. 국가에서 경비를 지원해야 할 것이다.]
[어느 정도의 지원을 예상하십니까?]
[일단 공사에 필요한 총액부터 산출하도록 하라. 국고에서 당장 지원할 수 있는 액수를 가늠하여 최대한 도울 것이다. 서두르라.]
[알겠사옵니다.]
이번엔 산업부 장관을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내어 줄 수 있는 기름 탱크와 물탱크를 모조리 알아보라. 여차하면 그들을 지원해 줄 수 있도록. 분명 화급을 다투는 일이기에 이와 같은 요청이 들어왔을 것이다.]
[바로 알아보겠사옵니다.]
[정수와 관련된 전문가들도 불러 이들을 지원하도록 하라.]
[알겠사옵니다.]
다음은 외무부 장관이었다.
[항구에 정박한 유조선의 주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정박 기간을 늦출 수 있도록 하라. 가뭄을 이겨낼 물이라지 않느냐. 이참에 아예 유조선을 사 버리는 것도 방법이다.]
[알겠사옵니다.]
안 그래도 유조선이 부족하던 참이다.
유조선을 사 버리면 정박 기간부터 물 문제까지, 모든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된다.
사우디 국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벽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다. 모두 돌아가서 업무를 시작하라!]
태수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사우디 왕실에 닿았다.
물론 그 공은 대한민국의 금산 그룹, 회장 장준용에게도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