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베두인족을 만나다(2)
태수가 고개를 돌려 송진구를 찾았다.
저쪽 야자수 그늘 아래 두 다리를 뻗은 채 계속 욕만 중얼대고 있는 송진구.
“어르신이 보낸 차, 저거 맞습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도 오늘 중동에 처음 왔는데!”
송진구가 짜증을 버럭 내다가 아차, 한다.
송진구는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맞는지 내가 확인하고 온다! 잠깐만 기다려!”
땡볕이 내리쬐는 도로로 허둥지둥 뛰어가는 송진구.
송진구를 발견한 지프차가 멀리서 멈춰 섰다.
송진구와 운전자가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송진구는 이쪽을 향해 두 손 높이 들어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맞나 봅니다. 잠시만.”
“네? 어어?”
태수가 벌떡 일어나서 걸어가자 송창준이 헐레벌떡 따라왔다.
“저기, 통역을······.”
송진구가 지프차에서 커다란 트렁크들을 끙끙대며 꺼낸다.
“어르신이 네가 부탁한 거 전부 구했다고 하신다! 부족함 없이 넉넉하게 보냈다니까 걱정할 것 없겠어!”
태수가 송창준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차에 뭘 좀 실읍시다. 괜찮을까요?”
“그럼요, 물론이죠. 차 가져오겠습니다.”
부르릉. 끼익.
송창준은 두말하지 않고 트럭형 지프차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송창준이 끌고 온 차에 물건을 옮겨 실었다.
“다 실었습니다.”
태수는 물건을 가져왔던 운전자에게 말했다.
“다음 차량은 약속했던 장소에 바로 도착할 수 있도록 협조 부탁합니다.”
“오케이.”
장말동의 심부름으로 온 남자가 손가락으로 오케이를 만들었다.
송창준이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저건 대체 뭡니까? 트렁크가 꽤 크고 제법 많던데요.”
“베두인족과 만나기 위해 준비한 겁니다. 이제 출발할까요?”
“숙소로 가시는 겁니까?”
“아뇨, 그 전에 들렸으면 하는 곳이 있습니다.”
“아, 다른 약속이 있군요?”
태수는 씩 웃었다.
“그건 아닙니다만,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현장을 확인하는 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니까요.”
태수는 정중히 부탁했다.
“삼원 건설이 짓고 있던 도로에 데려다주시길 바랍니다.”
“좋습니다.”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중장비도 그곳에서 받아야 할 텐데요. 그 연락도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송창준이 따라온 외무부 직원에게 지시를 내린다.
그리고 태수에게 차에 오르길 권하며 말했다.
“마음이 급하신 모양인데, 현지 상황은 이동하면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일 처리가 마음에 든다.
괜히 대사의 심복이 아닌 모양이다.
부르릉.
차가 출발하고, 송창준의 보고가 시작되었다.
“먼저 공사 상황입니다. 고작 30%도 채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베두인족의 싸움이 벌어지면서 삼원 건설 공사 현장이 졸지에 싸움터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후 공사가 중지된 게 몇 달째입니다.”
태수는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었다.
“왜 하필 공사장에서 싸우게 된 겁니까?”
“두 가지 이유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첫째, 지리적 이유입니다. 도로를 뽑는 곳이 평탄하고 시야가 넓게 트인 데다, 그곳을 중심으로 비슷한 거리에 두 부족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싸움터로 딱 좋은 지형이란 거다.
“다른 이유는 뭡니까?”
“사막 부족들의 텃세라고 할까요? 삼원 건설이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보더군요. 사막 부족과 삼원 건설은 크고 작은 마찰이 빈번하게 생기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가뭄을 이유로 식수 공급을 꺼린다거나, 각종 이유를 들어 돈을 요구한다거나, 인부들과 시비가 붙는다거나 하는 일들이었습니다.”
다른 건 사소한 일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곤 하니까.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식수 공급을 꺼린다.’였다.
태수가 굳이 유조선 가득 물을 싣고 온 이유이기도 하다.
“삼원 건설이 꽤 곤란했겠군요.”
“쩔쩔맸지요. 공사 진행 속도는 더디고, 당장 식수부터 부족해서 인부들이 하나둘씩 도망가곤 했나 봅니다. 나중에 싸움이 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들 흩어졌고요.”
눈으로 보지 않아도 상황을 알 것 같다.
‘사막 부족이 삼원 건설을 상대로 행패를 제법 부렸던 모양이군. 그들의 기세를 한 번은 꺾어 둬야 공사를 편하게 하겠구나.’
태수는 물었다.
“베두인족들은 어쩌다 싸우게 된 겁니까?”
“심각한 가뭄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송창준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곳의 유목 민족은 인구의 5% 정도 됩니다. 대부분 반유목 민족인데, 옛날과 달리 기반이 제법 잡힌 터라 물을 찾아 터전을 옮기기 쉽지 않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물을 중심으로 마을을 짓습니다.”
“가뭄 때문에 그 우물이 말라 버렸다는 거군요. 이런 경우가 흔합니까?”
“아뇨, 이 정도는 드문 일입니다. 이번 가뭄은 유례가 없는 가뭄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삼원 건설도 예상치 못한 재난 상황에 직면한 건가.
“작은 우물들이 대부분 말라 버리자 가장 크고 깊은 우물을 두고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사막에서 물은 곧 생명과도 같죠.”
“그 과정에서 사상자가 많이 났고, 어느 순간 부족의 사활을 건 자존심 싸움이 된 것 같습니다. 지금은 거의 보복 전쟁에 가깝습니다.”
이해관계로 시작된 전쟁이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는 의외로 흔하다.
“싸움이 장기화하면서 물자가 부족해졌습니다. 덕분에 지금은 총알이나 폭탄 대신 칼과 도끼 같은 냉병기로 싸우고 있습니다.”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 부족의 특이점이 있습니까?”
“특이점이랄 건 모르겠고, 하코넨 부족은 문제의 우물을 차지해 방어에 전념한 상태입니다. 코리노 부족은 방어에 유리한 석산을 차지해 야습이나 기습으로 약탈을 자행하는 모양입니다.”
기습으로 우물을 노린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코리노족은 물이 많이 부족하겠군요?”
“석산에서 나오는 옹달샘으로 연명하는 모양인데, 버티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약탈을 시도하는 텀이 점점 잦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팽팽한 접전을 벌여 온 모양이다.
“부족의 기반 사업은 뭡니까?”
“기반 사업이랄 것까지도 없습니다. 먹을 가축들을 기르고, 거기서 만든 치즈와 술 같은 부산물을 내다 팔고, 바구니나 양탄자 직물 같은 것을 짜서 팔고는 합니다.”
“산업이 크게 발달하지 않은, 가난한 부족들이군요.”
태수는 내심 흡족했다.
‘어쩌면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겠어. 이 정도 경제 상황이라면 베두인 부족들은 내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 테니까.’
생각보다 전반적인 상황이 훨씬 마음에 든다.
“반유목 민족 대부분이 그렇죠. 하지만 이 두 부족은 조금 다릅니다. 유능한 전사들을 용병이나 호위로 보내 돈을 벌어 오고 있으니까요.”
“몇몇 전사가 부족 전체를 먹여 살린다는 말입니까?”
송창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으로 나간 사막 전사의 수가 상당한 모양입니다. 부족에 남아 있는 나머지 사람들 역시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대단한 전사들입니다. 사우디 왕실에서 특히 그들을 선호하지요.”
“사우디 왕실에서요?”
“신의를 중시하는 전사들이거든요. 실력도 뛰어나고, 무척 충성스럽다고 하더군요. 그런 까닭에 주로 왕족을 전담하는 엘리트 경호원들로 갑니다.”
송창준이 한숨을 내쉰다.
“베두인족이 숫자에 비해 왕실 지지 세력으로 영향력이 높은 이유죠. 사우디 왕실 역시 엘리트 경호원들의 청을 외면하기 힘든 모양입니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그래서 고작 도로 공사 지연되는 일에 사우디 왕실에서 비공식적으로 공문을 띄운 것이었구나.’
이번 일에 얽힌 이유가 많다.
-첫째, 삼원 건설의 스폰서라는 사우디 왕족의 체면을 위해.
-둘째, 베두인족 싸움에 휘말린 삼원 건설 사람들로 인한 외교 마찰을 피하고자.
-셋째, 베두인족 싸움을 말릴 외부 지원을 기대하면서.
-넷째, 왕실 경호원들의 청을 들어주려는 것.
부르릉. 끼익.
송창준이 지프차를 멈췄다.
광활한 사막 모래 지형 가운데 짓다 만 도로 공사 현장이 눈에 들어온다.
“다 왔습니다. 이렇게 방치된 지 꽤 됩니다. 쓸 만한 것들은 베두인족들이 전부 가져간 모양이고요.”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프차 뒤를 따르던 군용 수송 트럭에서 사람들이 내린다.
주변을 둘러보더니 혀를 찬다.
“막막하네.”
“난장판이구만.”
소감은 다들 비슷했다.
태수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도로를 가운데 두고 베두인족이 살고 있다고 했죠?”
“저기 석산이 있는 곳이 코리노 부족이고, 저쪽이 하코넨 부족입니다.”
“거리는 얼마나 떨어졌죠?”
“음, 한 2킬로 정도 떨어졌나? 확실하게는 모르겠습니다.”
“멀지는 않다는 말이군요.”
태수는 사람들에게 트렁크를 내리도록 했다.
태수는 송창준을 찾았다.
“송 서기관님이 저를 좀 도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뭘 도와드릴까요?”
“아주 커다란 플래카드를 준비하고 싶습니다. 현지 글자를 아는 분을 소개받고 싶은데요.”
“마침 제가 현지어를 제법 압니다.”
아주 든든했다.
“현지 글자로 뭘 적고 싶으신가 보군요.”
“네, 영어와 현지어로 병기하고 싶습니다.”
“대체 뭘 하시려고요?”
“광고하려고요.”
“······?”
송창준이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댄다.
“베두인족에게 뭘 파시려고요? 대체 뭘 광고한다는 겁니까?”
태수는 주머니에서 수첩과 펜을 들어 뭔가를 슥슥 적어 내려간다.
그리고 수첩 한 장을 북 찢어 송창준에게 내밀었다.
<베두인족을 위한 우물 공사를 시작합니다>
<가뭄 걱정 없게 크고 깊은 우물을 만듭시다>
<수로를 깔아 집집마다 편히 물을 사용합시다>
<도로 공사 책임자: 대한민국 태양 건설 강태수>
송창준은 눈을 크게 떴다.
“우물과 수로 공사를 하신다고요? 도로 공사하러 오신 거 아니었습니까?”
“도로 공사하러 온 거 맞습니다.”
태수는 태연했다.
“하지만 현지 사정상 우물과 수로 공사를 안 할 수가 없게 됐군요.”
“왜 굳이 시간과 돈을 잡아먹는 공사를 하시려는 겁니까? 가뜩이나 도로 공사 기한도 촉박한데요.”
송창준은 우려를 표했다.
“공사를 더 빨리 진행하기 위한 일입니다. 이걸 해야만 기한 내에 마칠 수 있을 겁니다.”
말이 안 된다.
“도로 공사에만 매달린다 해도 기한을 맞추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삼원 건설이 너무 많은 시간을 허공에 날렸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필요한 공사입니다. 안 그래도 바쁜데 베두인족의 텃세까지는 감당하기 힘드니까요.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내야죠.”
그 말을 들으니까 더 모르겠다.
베두인족이 전장으로 택한 곳에서 설쳤다간 텃세가 아니라 공격을 받게 될 것 같은데.
“설명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음, 이걸 보고 곧 베두인족이 올 테니 그때 들으시면 될 겁니다. 지금은 일이 바쁘니 이것부터 도와주세요.”
송창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글자 쓰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천은 이거면 되겠습니까?”
일부러 준비한 사막 부족의 옷감이 꽤 된다.
둘둘 말린 흰색 옷감을 보면서 송창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합니다.”
“그럼 즉석에서 플래카드를 만들기로 하죠.”
태수를 따라온 사람들이 재빨리 트렁크를 열어 자재를 꺼낸다.
검은 페인트와 페인트 붓이 나오고, 봉을 조립하여 지지대를 만든다.
용역 업체로 간판을 바꿔서 그런가 빠릿빠릿하게 잔일을 잘한다.
“여기 끝났습니다.”
“여기도 끝났다.”
순식간에 뚝딱 플래카드가 만들어진다.
모래바람에 펄럭펄럭 깃발처럼 휘날린다.
“잘 만들었네?”
“상당히 그럴듯해.”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태수는 송창준을 돌아봤다.
“전에 출발했다던 중장비 말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오래 걸립니까?”
“생각보다 항구가 가깝습니다. 얼마 안 걸릴 겁니다.”
“곧 도착하겠군요.”
“아마 그럴 겁니다. 사람을 보냈으니까요.”
다행이다.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저쪽에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자들이 있었다.
“베두인족인가 보군요.”
“정찰을 나왔던 모양입니다.”
거친 사막의 전사들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다가온다.
[너희들은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