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42화 (42/230)

42. 베두인족을 만나다(1)

장말동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박태종을 이용했습니다.”

“박태종이 뒷배일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장말동은 단언했다.

“박태종은 포항으로 내려가면서 박정환의 정책 의논 과정에서 멀어졌지요. 긴급 조치로 내려진 8.3 사채 동결 조치마저 까맣게 몰랐습니다.”

“흐음. 강태수의 뒷배, 쉽지 않다.”

확실히 그 뒷배란 놈이 어렵다.

반년이나 이 잡듯이 뒤졌으면 그림자 꼬리라도 밟아야 하는데, 단서가 전혀 없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물처럼.

“우리보다 더 은밀하게 움직이는 세력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박정환의 최측근에 도사리고서 강태수와 끈을 연결한 놈. 그놈은 누굴까?”

이건 반드시 잡아야 한다.

이런 흑막이 있다는 걸 안 이상, 위험은 사전에 제거해야 하는 법이다.

“정보 상인 체면이 영 말이 아니군.”

씁쓸하다.

한복 입은 남자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향이 영 좋질 못해서 입에 안 맞는다.

“그 깐깐한 박정환이까지 강태수 손에 놀아날 줄은 몰랐다.”

박정환은 여러모로 어려운 자다.

그러니 저리 오랫동안 독재를 계속하는 게 아닌가.

제 손에 들어온 권력을 쉽게 놓치지 않고, 제 주변 사람들 손에 별로 휘둘리지도 않는다.

그러니 만만치 않은 자다.

그런데 그런 박정환을 강태수가 꼬여 냈다니.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박정환이가 비서실장 김정림을 앞세워 지원한다? 흔치 않은 일이다.”

“그 일은 저도 놀랐습니다.”

청와대에서 보내온 소식이었다.

장말동은 그간 포항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보고했다.

그 말을 유심히 듣는 한복 입은 남자.

들을수록 흥미로웠다.

“뇌물은?”

“없습니다. 분명 빈손으로 들어갔습니다. 박정환이가 품에 든 돈 봉투 따위에 흔들릴 위인도 아니고 말이죠.”

“박정환이는 두둑한 사과 박스조차 눈에 안 차는 놈이니까 말이지.”

여차하면 기업을 빼앗아 가로채고, 토막 내어 나눠 주는 위인이다.

그러니 그깟 푼돈 따위에 어찌 흔들리겠나.

청일의 한청호가 박정환을 만나러 올 때마다 쥐여 주는 돈 박스는 말 그대로 성의였다.

박정환도 그 성의를 어여삐 보아 그저 체면치레만 해 주는 것이고.

“정말로 대단한 놈이야. 박정환이가 그걸 두 눈 뜨고 호락호락하게 당할 놈이 아닌데.”

“제가 보고를 듣는 데도 너무 기가 차고 황당해서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할 정도였습니다. 에잉!”

장말동은 혀를 내 둘렀다.

“대체 그 또라이는 박정환을 무슨 말로 구워삶은 걸까요? 궁금해 죽겠습니다.”

“나 역시. 보통 술수가 아니었을 거라 짐작하는 수밖에.”

박정환의 행보로 보아 그의 마음을 제대로 움직인 것 같다.

태수가 박정환을 꾀어냈던 말은 모른다.

포항 철강 사장실에 들어간 사람들까지는 손이 미치지 않은 탓이다.

그도 그럴 게, 포항 철강 사장실에 있던 멤버 면면이 만만치 않다.

“강태수가 그 자리에 있게 된 이유는?”

“듣자 하니 박정환이가 강태수를 콕 짚어 소개해 달라고 했다더군요.”

“박정환이가 먼저?”

그게 말이 되나?

박정환이가 뭐가 아쉬워서 그놈을 먼저 보자 청했단 말인가?

강태수는 고작해야 강원도 광산 주인에 학교 공사나 하청받는 작은 건설사 사장에 불과한데.

“믿기진 않지만 사실인 모양입니다.”

장말동은 자세한 상황을 전했다.

한복 입은 남자는 헛웃음을 흘렸다.

들으면 들을수록 말이 안 된다.

혀를 내 두르는 일만 줄줄이 나온다.

“기가 차는군.”

“예, 저도 그렇습니다. 중동에서의 일은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해 죽겠습니다.”

“으음.”

한복 입은 남자는 손가락으로 좌탁을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런 띄엄띄엄한 정보로는 성에 차질 않는다. 보다 자세하고 생생한 이야기가 듣고 싶다. 그 재밌는 녀석이 어찌 처리하는지 알고 싶군.”

곰곰이 생각하던 한복 입은 남자는 마침내 씩 웃었다.

좋은 생각이 난 것이다.

* * *

사우디 공기는 건조하고 뜨거웠다.

한국에서 사우디로 가는 직항 노선이 없어서 방콕을 경유하여 도착했다.

처음으로 외국 땅을 밟아 보는 홀쭉이는 감회가 남달랐다.

“태수야, 서울은 늦겨울인데 여긴 여름 같다.”

“그래도 지금 겨울이야.”

“이렇게 더운데?”

“여긴 겨울에도 20도쯤 되거든. 습도도 낮고.”

보통 사우디아라비아의 겨울 기온은 14도에서 23도 정도다.

국토 대부분이 사막과 초원이라 한국과 비하면 많이 건조하다.

홀쭉이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봤다.

“왠지 중동이라고 하면 야자수와 낙타, 페르시아 양탄자 같은 게 곳곳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근데 여긴 좀 삭막하다. 모래가 많아.”

“사막의 나라니까.”

70년대 사우디아라비아는 21세기만큼 발전된 곳이 아니었다.

오일 머니를 쏟아부어 건설한 21세기 두바이와는 차원이 다르다.

지금은 그냥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 나올 법한 사막 도시 중 하나로 보인다.

‘인디아나 존스 배경은 요르단이었지만.’

요르단이나 사우디아라비아나.

홀쭉이는 한숨을 쉬었다.

“중동 미녀들은 육감적이라던데, 어째 죄다 가렸냐?”

광부들도 주변을 돌아보며 한마디씩 했다.

송진구도 가뜩이나 험악한 인상을 팍 찡그렸다.

“사채 걷다, 대출하다, 땅 사다, 강원도까지 심부름 출장 다니다. 이젠 하다 하다 중동에서 광부 일까지 하라고? 에이, 시발.”

대체 저놈이 어르신에게 뭐라 했기에 용역으로 중동까지 오게 됐는지 모르겠다.

“우리 어르신이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하여튼 수완도 좋은 놈이라니까.”

그때였다.

“혹시 강태수 씨, 맞습니까?”

회색 양복을 입고 있는 30대 후반 남자가 태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까무잡잡한 얼굴, 제법 영리해 보이는 자였다.

한국말이 아주 능숙한 사람, 그러니까 한국인이다.

“맞습니다. 그쪽은 누구십니까?”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태수를 찾아 공항으로 나올 만한 한국인은 딱 두 종류다.

호의 아니면 악의!

‘내게 물건을 전하라고 장말동이 보낸 자라면 송진구가 알아봤을 것이다. 이자는 김정림이 보낸 자인가?’

강태수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제가 강태수입니다. 한국분이십니까?”

“네,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대사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2등 서기관 송창준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태수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눴다.

“2등 서기관께서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위에서 강태수 씨를 도우란 지시가 내려왔거든요.”

송창준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렇군요.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까?”

“물심양면으로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기본적인 통역, 길 안내뿐만 아니라 전보를 치거나, 수화물을 부치거나, 숙소나 식당을 알아보는 일까지 전부 도울 겁니다.”

“기대 이상의 도움을 받겠군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서기관 송창준은 묘한 얼굴로 태수를 보았다.

“백이 참 대단하십니다. 도움을 주라는 지시를 내린 분은 대통령 각하로 동일한데, 어째서인지 구체적인 지시가 제각각이었습니다.”

“그랬습니까?”

“대체 어떻게 거물 셋을 움직여 대사관에 각각 따로 연락을 넣으셨습니까?”

“거물 셋?”

의아했다.

‘김정림 비서실장 말고 또 다른 자들이 지시를 넣었다고? 대체 누구지? 무슨 지시를?’

서기관 송창준은 묘한 얼굴로 태수를 보았다.

“김정림 비서실장, 최장길 외무부 차관, 김상섭 외무부 장관. 2 대 1로 나뉘어 내려온 지시가 상당히 다르더군요.”

“지시가 다르다는 건 어떤 뜻입니까?”

“말 그대롭니다. 쉽게 말하자면 극단적으로 다른 지시였습니다. 한쪽은 훼방을, 다른 한쪽은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했으니까요.”

뜻밖이었다.

송창준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제가 어느 쪽 라인인지 짐작하십니까? 소속만 따져 봐도 아실 테지요.”

물론 태수는 그 말뜻을 단박에 알아들었다.

‘김정림 비서실장이 아니라 외무부 차관과 장관의 입김이 더 셌다는 뜻이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곳 대사관 소속 자체가 외무부니까.

“감사합니다. 제가 운이 좋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사께서도 기대하시는 바가 무척 큽니다.”

태수는 생각했다.

‘명함은 2등 서기관인데, 알고 보니 대사의 심복이었군.’

그렇지 않고서야 2등 서기관이 이런 고급 정보를 알고 있을 턱이 없다.

‘대통령 비서실에서 내려온 지시를 거부하기 힘들었을 텐데.’

송창준은 사정을 짐작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외무부와 비서실 사이에 골이 좀 있던 터라. 운이 좋으셨습니다.”

그러더니 넌지시 말한다.

자신의 직속 라인을.

“우리 대사께서는 차관님과 꽤 각별하십니다. 또한 포항 철강의 건설 진행 상황을 궁금해하십니다.”

은근히 입김의 출처를 알려 주는 송창준.

‘박태종이 보낸 사람이었구나.’

이렇게 적극적으로 외무부에 연락했을 줄은 몰랐다.

박태종의 사무실에서 한번 본 적이 있다.

당시 박태종은 외무부 차관 최장길과 통화했었다.

미국의 몰리브덴 석출 중단 소식도 그래서 빨리 알 수 있었다고 들었다.

“요즘 포항 철강은 하루가 다르게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완공 예정일보다 조금 빨리 공사를 마무리 짓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저희 대사께서도 관심이 많으시더군요. 포항 철강 준공식에 참여하고 싶으시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에서 옮겨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단 뜻이었다.

그건 태수가 어찌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박태종은 다를지 모른다.

“전 아직 그 정도 힘은 없고, 대신 대사께 준공식 초청장을 보내드리는 게 어떠냐고 넌지시 물어보겠습니다.”

하지만 차관을 통해 먼저 부탁한 건 박태종이다.

아마도 대사의 바람은 이뤄질 것이다.

“그래 주신다면 대사께서 참으로 좋아하실 겁니다.”

“그런데 외무부 장관을 움직인 곳은 어딥니까?”

이번에도 송창준은 은근하게 대답했다.

“금산 해운과 금상 정유에서 배가 항구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금산의 장준용 역시 태수에게 호의적으로, 외무부 장관을 움직였단 뜻이다.

‘박태종은 그렇다 쳐도 장준용이 날 위해 움직일 줄이야. 흐음.’

까짓것, 어떤가.

어떤 의도로 왜 움직였는지는 모르지만 좋다.

당장 태수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니까.

‘먼저 호의를 보였으니 나중에 호의로 갚으면 된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 이상으로 되돌려 주면 그뿐이다.’

하지만 계산과 맞지 않아 의아한 면이 있었다.

“금산의 배요? 아직 며칠 이를 텐데요?”

태수가 일부러 중동행 날짜를 배 도착 시간과 비슷하도록 잡았다.

어차피 중장비와 물이 없으면 공사를 제대로 진행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전속력으로 쉬지 않고 달려왔다고 합니다. 확인해 보니 물과 중장비 등 모두 공문과 다름없습니다. 대사께서 바삐 움직여 통관 및 세관 문제까지 전부 처리해 놓으셨습니다.”

태수는 송창준에게 부탁했다.

“금산에서 온 배에서 내린 중장비들을 이쪽으로 이동시켜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미 오는 중입니다. 금산에서 시일이 촉박할 것이라며 당부한 사항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금산이 제법 일 처리를 시원시원하게 하는군.’

태수는 씩 웃었다.

“여러모로 대사께 감사하다고 인사드려야겠군요.”

“대사께서는 삼원 건설 문제가 하루빨리 매듭지어지길 바라십니다.”

“그래야죠. 그러기 위해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이니까요.”

송창준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태수가 그 손을 잡고 악수했다.

송창준은 빙그레 웃었다.

“이번 불미스러운 일로 대사께서 고심이 많으십니다. 덩달아 아랫사람들도 바쁘고요.”

“감사 인사를 제대로 드리려면 최대한 빨리 문제를 해결해야겠군요.”

“아마 대사께서 이 얘길 들으셨다면 무척 좋아하셨을 겁니다. 열심히 서포트 하겠습니다.”

아주 좋다.

‘안 그래도 현지에 익숙한 사람을 수소문하려 했는데, 수고를 덜었군.’

신원도 확실한 외교부 서기관이 통역 및 길잡이로 붙었다.

게다가 서기관은 대놓고 말했다.

비서실과 라인이 다르니 전적으로 도울 생각이라고.

낯선 외국에 나와 이것처럼 든든한 도움이 또 어디 있을까.

‘첫 출발부터 조짐이 좋다.’

진짜로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팍팍 든다.

“절 따라오시죠. 숙소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잠시만. 그 전에 접선할 사람이 있어서 말입니다.”

장말동에게 부탁한 물건을 여기서 받기로 했다.

부르릉.

마침 저기 멀리서 모래바람 휘날리며 달려오는 차가 한 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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