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한 큐에 쓰리 쿠션(2)
명동 큰손 장말동의 집.
꼬장꼬장하게 생긴 70대 노인 장말동은 비단 보료를 깔고 앉아 부채를 부쳤다.
“강태수가 왔다고?”
장말동은 부채를 살살 부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암, 그래야지. 이리 좋은 기회를 얻었는데 당장 달려오지 않으면 사내놈도 아니지.”
장말동은 한복 입은 남자를 슬쩍 돌아보았다.
태수가 온다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한복 입은 남자의 눈에선 생기가 도는 게 아닌가.
장말동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라이더러 들어오라고 해라. 서신의 답변을 얼른 듣고 싶구나.”
잠시 후 드르륵 탁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태수가 장말동을 보며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먼저 은행 설립하신 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어서 와서 앉아··· 있구나.”
태수는 이미 방바닥에 털썩 앉은 후였다.
거침없이 당당한 태도는 여전했다.
“어르신 선물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르신.”
대치동 땅 1만 평을 내준 것.
그리고 송진구를 빌려준 것.
태수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장말동은 고개를 홱 돌렸다.
“네놈 덕에 내 턱밑에 겨눠졌던 칼을 싹 치웠으니 목숨값을 갚은 것이라 치자.”
최무룡이 은행을 세운다고 귀띔해 준 덕분이다.
장말동은 최무룡 쪽으로 정보가 샌 것을 알고 피바람 나는 숙청을 감행했다.
장말동은 껄껄 웃었다.
“네가 곧 중동으로 떠난다지? 그래서 내 급히 서둘렀다. 보낸 건 잘 받았느냐?”
“이거 말입니까?”
태수는 품 안에 든 문서를 꺼내었다.
장말동이 보내온 바로 그 문서였다.
태수가 장말동의 좌탁 위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이상한 걸 보내셨더군요.”
태수는 시큰둥했다.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어르신은 제가 뭐 중동에서 천 년 만년 눌러앉을 줄 아십니까?”
다들 왜 이렇게 10년은 못 볼 사람 대하듯이 합니까?
금방 돌아온다는 제 말은 왜 못 믿습니까?
“삼원 건설도 꽁지 빠지게 도망간 공사라지 않느냐. 하루아침에 마무리될 일이 아니야.”
“정보가 참 빠르십니다.”
“내 명색이 정보 상인이다. 박정환이를 대체 어찌 꼬드겼을꼬? 그 만만찮은 놈이 뭣에 그리 호락호락······. 참 대단한 수완이로구나.”
“확실히 제가 너무 안일했군요. 이럴 줄 알았다면 포항에서 당장 비행기 잡아타고 중동으로 날아갈 걸 그랬습니다.”
“예끼! 농담도.”
“진심입니다.”
진심이다.
중동에 간다니까 다들 조급해져서 난리가 아니더라고.
장말동은 눈을 빛내며 태수를 요모조모 뜯어봤다.
“먼저 내가 보낸 서신에 대한 대답부터 듣고 싶구나.”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태수는 장말동이 보냈던 문서 위를 톡톡 두드렸다.
장말동은 태수에게, 아니 태수 부모님께 편지를 보냈다.
바로 청혼서였다.
“갑자기 이건 다 뭡니까?”
“적혀 있는 그대로지 뭐 다른 게 있을까.”
“제가 까막눈이라 묻습니까? 어르신의 의도를 묻는 겁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게야? 당연히 좋은 인연을 맺자는 게지.”
“좋은 인연이라. 좋습니다. 까짓것, 우리 동맹 맺지요.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장말동이 신나서 손뼉을 쳤다.
“그렇지! 그래서 이왕이면 끈끈하게 혼인 동맹을 맺자고 그 서신을 보낸 거다. 예로부터 동맹은 혼인 동맹이지. 아니 그러냐?”
“그건 좀 곤란합니다. 결혼은 빼고, 그냥 동맹으로 하죠. 아무리 그래도 인륜지대사인데 너무 급하지 않습니까?”
장말동은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
“누군들 이러고 싶어서 이러나? 갑자기 중동 가는 날짜가 워낙 촉박하게 잡힌 탓에 이러는 것을.”
물론 빨리 귀국할 예정입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죠.
“그리 급하시다면 저 말고 다른 좋은 집 안에 시집보내시죠.”
“일없다! 네놈이 아니라면 우리 쪽에서 먼저 청혼서를 보낼 일도 없다.”
장말동은 은근하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그냥 눈 딱 감고 하는 게 어떤가? 눈 돌아가게 아름다운 팔방미인이, 이 장말동이의 재산을 바리바리 싸 들고 간다네. 어때? 상상만 해도 즐겁지 않은가?”
장말동이 얄밉게 웃었다.
‘네놈이 탐나서 다른 놈은 눈에 안 차는 것을 어쩌누? 우리 집 아가씨를 한 번 보기만 하면 껌뻑 넘어갈 것이야. 흐흐흐.’
장말동은 부채를 살살 부쳤다.
독사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집요하게 태수를 훑어본다.
“필요 없습니다. 얼굴 뜯어 먹고살 것도 아닌데. 제 여자는 제가 구하겠습니다.”
“에잉, 고집은. 그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네놈은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 어디까지 갈 생각이야?”
당연히 청일 그룹을 뛰어넘고 대한민국 최고까지.
실제로 청일 그룹을 그렇게 만들기도 했다.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네놈이 광산에 만족하고 적당히 벌어먹을 생각이라면 됐어. 그럼 나 역시 청혼서를 보낼 생각이 없으니까. 하지만 아니지?”
장말동은 음흉하게 웃었다.
“자넨 장차 청일 그룹을 넘어서 대한민국 최고가 될 생각이 아닌가. 이 장말동이가 잘못 보았다고 할 참이냐?”
장말동은 웃었다.
“이 장말동이의 눈을 속일 생각은 하지 마라. 네놈이 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누구를 노리고 있는지 다 안다. 내 그걸 어찌 모르겠느냐?”
‘내 속을 떠보려고? 제대로 알고 있는지 한 번 찔러볼까?’
태수도 아무렇지 않게 씩 웃었다.
“몰리브덴 납품 때문에 넘겨짚으셨습니까?”
“지금껏 네 행보가 그러했다. 지나간 정보를 모아 보면 앞으로의 일이 보이는 법이지.”
“그 끝에 무엇이 보입니까?”
“야망.”
‘제대로 모르고 있군. 하긴, 당연한가. 내가 왜 한청호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지 모르니까.’
태수는 피식 웃었다.
‘장말동이 모를 정도라면 뒷조사에서 한 끗발 밀리는 한청호는 전혀 감을 못 잡고 있겠어.’
한청호가 계속 헤매길 바란다.
계속 의심하고, 찾아보고, 고민하고, 괴로워하길 바란다.
“우리가 네 그늘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걸 왜 몰라?”
“됐습니다. 처가 그늘 얻으려고 장가갑니까?”
태수는 말했다.
“험로를 걷는 것은 처음부터 이미 각오한 일입니다. 그늘이 없으면 재주껏 만들면 그만입니다.”
“······.”
순간 장말동은 말문이 막혔다.
정말 태수는 그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말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놈은 용케도 그늘을 잘 만들긴 하더구나. 하지만 언제까지 남의 그늘을 빌려 숨을 돌릴 수 있을꼬?”
장말동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다.
“쉽게 가세나. 굳이 어렵게 갈 필요가 있는가? 목표는 하나만 정하면 되는 것을.”
태수는 그 속이 뻔히 보였다.
‘날 앞세워서 일을 도모하고 싶은 모양이야. 내가 호락호락 넘어갈 애송이로 보이나 보군.’
장말동은 음지에서 일을 꾸미는 자.
그가 은행을 세워 양지로 나오면서 여러 가지 제약이 생긴 게 틀림없다.
‘덩달아 숨겨 뒀던 기반이 드러나게 생겼으니 똥줄이 탈 만도 하지.’
한마디로 태수를 앞세워서 신분 세탁 겸 자금 세탁 겸 사업 세탁을 하고자 하는 거다.
‘내 갈 길도 바쁜데 남의 뒤치다꺼리에 쏟을 시간은 없다. 슬슬 시작해 볼까?’
이렇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
태수는 무척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씩 웃었다.
“어르신, 제 결혼과 미래 계획은 이렇습니다. 한번 들어 보시죠.”
“옳거니! 한번 들어 보자!”
장말동이 기뻐하며 귀를 기울였다.
태수가 말했다.
“일단 어르신의 도움을 얻기 위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결혼부터 하는 겁니다.”
“그렇지!”
“물론 우리 사이에 사랑도, 의리도 없습니다. 그럼 제가 이 댁 귀한 아가씨를 어찌 대할까요?”
“당연히 귀히 대하고 예뻐해 줘야지!”
“때리고, 이용하고, 먹고, 버리고, 굴리고, 괴롭히고, 화풀이하고, 방치하고, 가둬 두고, 모욕하고, 막말하고.”
“······.”
장말동은 입을 떡 벌렸다.
태수는 진지했다.
“저는 이 여자 저 여자 옆에 끼고, 즐길 거 다 즐기고, 놀 거 다 놀고, 어르신 주신 재산 펑펑 쓰면서, 여기저기 일 벌여 보겠습니다. 처가 그늘 덕 좀 제대로 봅시다.”
“······.”
“저한텐 인질이 있잖습니까. 전 어르신 도움 받아 행복하고, 이 댁 귀한 아가씨께서도 저 만나 참으로 행복하겠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상상만 해도 너무 끔찍해서 장말동은 손이 벌벌 떨렸다.
“네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처가 덕 보려고 하는 결혼인데 아주 사골 우려먹듯 이용해야죠. 뭐 어떻습니까? 그런다고 이미 한 결혼, 무를 수도 없고.”
“이······!”
태수는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까?”
“어디 그러기만 해!”
“그러니 결혼 말고, 동맹 맺자고 했잖습니까? 아직도 같은 생각입니까?”
“끄응.”
“결혼할까요?”
“끄응!”
장말동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때였다.
“하하하.”
한복 입은 남자가 크게 웃었다.
장말동이 눈을 크게 뜨고 홱 돌아보았다.
당황한 장말동에게 한복 입은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저런 말을 듣고도 어찌 결혼을 밀어붙일 수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장말동은 끙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태수를 한참이나 아쉬운 눈으로 본다.
몇 번이나 쩝쩝 입맛을 다시던 장말동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이 맞다. 결혼은 내 욕심이었다. 그냥 동맹이라도 맺자. 끄응.”
“좋습니다.”
그게 딱 제가 원하던 바입니다!
‘이번 생엔 결혼 대신 연애다. 싱글 라이프를 화려하게 즐겨야지.’
태수는 활짝 웃었다.
얄밉기 그지없는 웃음이었다.
“어르신이 원하시는 건 뭡니까? 제가 앞에서 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끄응, 이미 알고 있었구나.”
장말동은 입을 삐쭉이며 말했다.
“은행을 세우며 졸지에 양지로 나오는 바람에 사채업으로 위장했던 애들이 갈 곳이 없어졌다. 그놈들을 은행원으로 쓸 수도 없고. 그래서 네놈더러······.”
덤터기 쓰기 전에 태수는 재빨리 말했다.
“그건 제가 간단히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엥?”
“안 그래도 손발이 부족했거든요.”
송진구가 참 쓸 만하던데요. 그런 놈들이 어르신 밑에 바글바글한다는 거 아닙니까.
태수가 굳이 장말동을 찾아온 이유 중 하나였다.
“내가 우리 애들을 어찌 키웠는데 네 손발로 보내랴? 싫다! 그놈들은 독자적으로 할 일이 있는 놈들이야.”
태수는 씩 웃었다.
“이해합니다. 맘 같아서는 제가 데려다 쓰고 싶지만 어르신 사정이 그러하니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저도, 어르신도 동시에 만족할 방법이 있습니다.”
장말동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런 방법이 있느냐?”
태수는 말했다.
“용역 업체를 하나 세웁시다.”
“용역 업체라는 게 뭐냐?”
지금은 좀 생소한 단어일 것이다.
민간에서 운용하는 게 아니라 보통 정부에서 운용한 단체니까.
하지만 쓰임을 모르는 건 아닐 것이다.
“정부에서 쓰는 용역 깡패 말입니다. 그걸 민간 회사로 만드는 겁니다.”
“그런 방법이!”
장말동이 그 말을 듣자마자 무릎을 탁 쳤다.
“용역 깡패라면 우리 애들한테 딱이다!”
용역 깡패.
국가나 지자체 철거반이나 구사대에서 재개발 사업 등을 위하여 파견하는 용역 일꾼들이다.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부에서 고용한 용역인데, 일의 특성상 깡패처럼 무력 진압을 많이 써서 보통 그리 불렀다.
도심 재개발 초기이던 70, 80년대에는 민간이 아니라 정부가 주도적으로 개발 및 철거 사업을 해 왔고, 그 과정에서 용역 깡패들을 많이 보냈다.
주로 불법 판잣집이나 노점상 철거, 노동 운동 진압에 투입되곤 했다.
“그런데 우리가 업체를 설립해도 되는가? 보통 정부에서 하는 일인데······.”
“정부에서 독점 사업권을 내건 것도 아닌데, 뭐 어떻습니까?”
민간 최초의 용역 업체는 1986년 12월에 생긴다.
민간 용역 업체 중심의 철거 사업이 본격적으로 개시된 건 1987년 6.29 선언 이후.
정부가 재개발 사업 분쟁을 민간에 일임한 게 계기였다.
“그럼 우리 애들도 정부한테 일거리 받아서 용역 깡패 짓을 해야 하는 게냐?”
“굳이 그러실 필요 있습니까? 독자적으로 굴릴 일이 있다면서요. 간판만 다는 겁니다. 양지로 나왔으니 그럴듯한 간판이 필요해서 절 앞세우려 하신 거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용역 깡패에서 깡패만 빼면 말 그대로 용역입니다. 공사를 도와도 용역이고, 잡일을 도와도 용역이고, 심부름꾼을 해도 용역입니다.”
“흐음.”
“비정기적인 일을 받아 그때그때 처리한다는 명분도 있으니 독자적인 세력으로 어르신 일을 돕기에도 딱일 겁니다. 여차하면 그냥 대기하고 있어도 되잖습니까?”
구미가 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