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대통령을 이용해 판을 깔다(6)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행정 절차, 외교 절차, 특수 요원에 관해섭니다.”
“으음?”
“삼원 건설이 입찰을 따낸 공사입니다. 제가 함부로 공사를 재개한다면 여기저기서 잡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우디 왕실에서 이를 문제 삼을 수도 있고요.”
“그렇겠군.”
“그러니 각하에서 사우디 정부에 정식으로 공문서 하나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태양 건설을 삼원 건설 협력 업체라고 해도 좋고, 삼원 건설의 공사를 승계한 건설사라 해도 좋습니다.”
태수는 이곳에 있는 기업 총수들을 슬쩍 보며 말했다.
“제가 아니라 다른 기업에서 중동으로 가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실종된 삼원 건설 수뇌부를 찾을 길이 없으니 어찌 인수인계를 제대로 받겠습니까?”
“좋아, 사우디 정부에 삼원 건설은 태양 건설이 인수했다고 공문 보내지.”
“감사합니다.”
졸지에 태양 건설은 정부의 승인하에 삼원 건설을 인수한 꼴이 되었다.
아마도 임시로 명분을 주는 모양인데, 박정환이 마음먹어서 안 될 일은 없다.
‘이건 생각지 못한 이득인데? 잘만 하면 이대로 삼원 건설을 꿀꺽할 수 있을지도.’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못할 일도 아니다.
박정환은 슬쩍 웃었다.
“그럼 외교 문제도 해결된 건가?”
“제가 이번에 한국에서 인부들을 한꺼번에 왕창 중동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대통령께서도 아시다시피 비자라든가, 여권이라든가, 출국 허가라든가, 출국 관련해서 시일이 지체될 여지가 크기에······.”
21세기에는 여행 자유화가 되어 해외로 출국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지만 70년대만 하더라도 사정이 달랐다.
해외 출국에 관해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했다.
박정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사 문제 해결하러 당장 간다는데, 내가 편의를 봐주지. 김 실장.”
“네.”
김정림이 대답하자 박정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문과 출국에 관련된 건 자네가 직접 맡아서 처리해.”
“알겠습니다.”
박정환이 태수를 보며 웃었다.
“그런데 특수 요원은 또 뭔가? 건설 현장에 특수 요원이 왜 필요하지?”
“실종된 삼원 건설 수뇌부들을 찾으셔야죠.”
“고작 겁나서 숨은 사람 몇몇 찾는 일이다. 특수 요원을 투입하기엔 과해.”
태수는 씩 웃었다.
“삼원 건설 수뇌부들 말입니다. 연락도 없이 몇 달이나 실종 상태로 생사를 알 수 없다면 당연히 베두인족에 붙잡힌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누군가는 그들을 빼 와야 합니다.”
박정환의 안색이 순간 살짝 변했다.
그가 눈썹을 슬슬 문지르다 말했다.
“그래서? 어찌하겠다는 것이야?”
“베두인족과 제대로 담판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뭣이?”
박정환은 기가 차서 웃었다.
“담판? 지금 외교 분쟁 해결하라고 보내 놨더니 먼저 전쟁 일으키겠노라 선전 포고하는 것은 아니겠지?”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선전 포고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럼? 특수 요원을 끌고 가서 짓겠다는 담판은 평화 회담을 말하는 것이냐?”
“물론 저는 평화 회담을 청할 겁니다. 하지만······.”
뒷말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사막의 전사라는 베두인족도 평화를 사랑할까요?
-삼원 건설 수뇌부를 두고 베두인족이 호락호락하게 내줄까요?
-그럼 삼원 건설 수뇌부들을 포기할까요?
태수는 씩 웃었다.
“사우디 왕실보다 우리가 그들을 먼저 찾아와야 대통령께서 체면치레하실 겁니다.”
그건 그렇다.
그놈들을 사우디 왕실에 직접 넘겨주든, 이 모든 책임을 물어 분풀이로 처리하든.
일단 그놈들을 데리고 있어야 큰소리칠 수 있다.
“또한 이 일이 성공한다면 장차 언론에는 ‘특수 요원을 파견해 외국에 피랍된 국민들을 구해 낸 영웅 대통령’으로 알려지게 될 겁니다.”
“영웅 대통령?”
“분명 이미지 쇄신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안 그래도 유신 헌법과 군사 독재라는 타이틀로 이미지가 영 안 좋은 박정환이다.
박정환은 ‘이미지 쇄신’, ‘영웅 대통령’이란 단어가 아주 마음에 쏙 들었다.
박정환은 한 손으로 턱을 괴며 흥미로운 눈으로 태수를 보았다.
“지금 네 말은 그 공을 내게 바치겠다는 뜻이냐?”
“아닙니다.”
태수는 씩 웃었다.
“원래부터가 제 공이 아닙니다. 특수 요원을 파견해 인질을 구출한 작전입니다. 그게 성공한다면 공은 원래 그들을 파견한 사람의 것이 아닙니까?”
“하하하.”
박정환은 웃고 말았다.
“이거, 공이 탐나서 특수 요원을 파견하지 않을 수 없구나. 하하하.”
박정환은 무척 기꺼워서 소파 팔걸이를 내리치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 사우디 왕실 일을 해결하면서 국민들에게 좋은 이미지까지 심어 준다? 일석이조로구나. 내 고민을 한 번에 깔끔히 날려 버릴 수 있겠어! 하하하!”
박정환이 어찌나 기꺼워하는지 그 웃음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마침내 박정환이 호탕하게 외쳤다.
“좋아, 특수 요원은 필요한 만큼 데려가! 중동에서 문제 해결하고 당당히 돌아와! 그럼 내 그 공은 잊지 않을 테니까! 하하하.”
박정환의 마지막 말에 다들 놀라 표정을 굳혔다.
‘박정환 대통령이 공을 잊지 않겠다고 단언을?’
‘대단하군. 고작 10분 만에 박정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도록 만들다니.’
‘저 친구, 성공만 하고 돌아오면 뒷일은 걱정이 없겠어. 박정환이 장담했으면 못 이룰 일이 없을 테니까.’
박정환이 크게 기꺼워하자 별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경호실장 차기범이 슬쩍 끼어들었다.
“각하, 그 특수 요원은 제가 뽑아도 되겠습니까?”
“각하!”
박태종이 다급히 입을 열려고 했지만, 한발 늦었다.
박정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범이, 자네가 알아서 해.”
“알겠습니다. 실력 있는 놈들로 몇 놈 추려 보내겠습니다.”
박태종이 급히 말했다.
“각하!”
“됐네. 다른 말은 듣지 않겠어.”
박정환은 손을 들어 올리며 단호하게 박태종의 입을 막았다.
박태종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고 태수를 힐끔 보았다.
태수는 슬쩍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면 됐다는 뜻이었다.
‘한청호, 장준용, 박태종, 박정환, 김정림과 차기범까지. 여기 있는 인물들한테서 전부 받을 수 있는 것은 전부 받았다.’
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그럼, 잘 다녀오겠습니다.”
깔끔한 마무리였다.
그러자 금산의 장준용이 참지 못하고 풉 웃고 말았다.
“김 비서가 보통 비범한 자가 아니라고 보고하더니, 과연.”
다른 건 몰라도 수완 하나만큼은 보통이 아닌 게 확실하다.
‘박태종에 이어 박정환 대통령의 환심을 사다니. 그것도 별다른 아부도, 뇌물도 없이. 이건 나도, 한청호도 못하는 일이다. 정말 대단한 자군.’
장준용의 눈은 태수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 * *
대통령 일행을 모두 떠나보낸 후.
박태종의 사장실엔 태수와 박태종의 아들 박철완만 남았다.
박태종은 신이 나서 위스키를 깠다.
“하하하, 한청호 그놈이 당황하는 꼴을 보게 될 줄이야. 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다!”
박태종은 기분 좋게 위스키 마셨다.
얼굴에 술기운이 붉게 피어올랐다.
“한청호가 그리 나올 줄은 어찌 짐작했나? 진짜 무당이 따로 없더군. 하하하, 자네가 미리 내다본 상황과 똑같이 흘러갈 줄이야.”
박태종이 술김에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비틀대는 것이 제법 취한 모양이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평소보다 많이 마신 까닭이었다.
그 탓에 근엄하고 진지했던 박태종의 말투 역시 한껏 풀어져 있었다.
“자넨 각하께서 포항까지 내려온 연유도 꿰뚫어 보았어. 게다가 한청호가 각하를 들쑤셔 광산을 노릴 거라 짐작했지. 대체 그걸 어찌 알았는가?”
태수는 빙그레 웃으며 위스키 잔을 입에 대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박태종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러자 고갯짓에 따라 몸이 휘청대었다.
“아니야, 운이 아니었어. 자네는 내게 미리 얘기했었네. 광산을 지킬 힘이 없다고.”
박태종은 태수가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겐 광산을 지킬 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국가 전략 광물이라는 이유를 들먹이며 실제로는 몰리브덴으로 폭리를 취하려고 하는 자들이 나타날 겁니다.
“자네 말대로 정말로 광산을 노리는 자들이 나타났어. 자네가 경계하던 바로 그 이유로 말이야.”
박태종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자네는 정말 대단히 똑똑해. 이럴 줄 알고 미리 각하께 광산 채굴권을 보장해 달라고 청을 넣은 거였어. 한청호가 손을 쓸 줄 알고서. 내 그걸 이제야 알았네, 하하하.”
박태종은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사람처럼 좋아했다.
오래된 앙숙이 오늘 된통 깨지는 꼴을 보았으니 말이다.
“하하하, 자네 광산을 노리던 한청호가 외려 자네에게 제대로 뜯겼어. 지금껏 한청호를 상대했던 자 중에 자네만큼 손쉽게 벗겨 먹은 자가 없었는데 말이야.”
그 말을 듣고 박태종의 아들, 박철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아암, 한청호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찍소리 한 번 제대로 못 한 채 중장비를 왕창 내줘야 했다. 그것도 금산 해운의 배에 직접 실어 줘야 한다니. 하하하, 꼴좋다.”
“네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각하께서 직접 못을 박으셨지. 한청호는 감히 각하의 명령을 거스르지 못해. 눈 밖에 나길 두려워하니 그 많은 돈을 수시로 상납하는 게 아니냐.”
박태종은 정말로 즐거워했다.
지난 세월 한청호와 참 많이도 부딪쳤었다.
“철완아, 시소 얘기를 아느냐?”
“시소요? 놀이터에 있는 그거 말씀입니까?”
“그래, 두 발이 떠 있는 시소는 한쪽이 땅에 닿으면 끝나는 법이지.”
“네? 갑자기 얘기가 왜 이렇게 팍 뜁니까?”
다짜고짜 없는 시소 얘기에 박철완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더는 설명하지 않는다.
박태종은 태수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나는 저 친구가 어떤 방법으로 시소의 끝을 볼지 그게 궁금하구나.”
“······?”
태수는 말없이 위스키 잔을 기울였다.
독한 위스키가 매우 썼다.
‘한청호. 인제 보니 대통령 비서실장 김정림과 사이가 특히 좋군. 김정림을 청일의 개라 불러도 될 만큼 구워삶았던데.’
70년대의 한청호가 누구와 끈이 어디까지 닿았는지는 태수도 정확히 몰랐다.
태수가 청일 그룹에 비서로 입사해 일하게 된 시기와 맞지 않아서.
‘김정림은 78년 말에 박정환 대통령의 눈 밖에 난 자야.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 흐음.’
그랬기에 태수도 잘 모른다.
태수가 한창 일할 때는 그는 이미 권력을 잃었으니까.
‘다시 말하면 78년 말 박정환 대통령의 눈 밖에 나기 전까지 권력을 휘두른 자란 말이기도 해.’
그러니 한청호가 저리 공을 들이는 것이겠고.
‘한청호는 김정림과 어떤 커넥션을 가지고 있는 걸까? 얼마나 깊게, 얼마나 넓게.’
궁금했다.
태수가 청일 그룹에 입사했을 때가 78년도.
신입 비서에게는 정보의 제한이 많았다.
지위가 올라가며 제법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80년대 중반 이후.
한청호가 죽고 한일권이 총수 자리에 오른 이후에야 청일 그룹의 정보를 전람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한청호의 치부책은 끝내 내게 전해지지 않았어. 아마도 그 모든 걸 아는 자는 한일권이 유일할 거야.’
하지만 상관없다.
그딴 거 몰라도 청일 그룹을 잡아먹는 데는 지장 없으니까.
‘돈 때문에, 위세 때문에 달라붙는 똥파리들은 먹을 것이 사라지만 제일 먼저 등 돌리는 것들이니까.’
그런 자들을 지겹게 상대했던 태수다.
태수는 웃었다.
‘차기범은 끝내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입을 다물었지. 그는 누구의 사람일까? 청일이나 금산이 아니라면? 설마 또 다른 기업인가?’
차기범이 누구의 편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차기범이 직접 특수 요원을 뽑겠다고 나섰다. 만일 그가 적이라면 특수 요원 속에 암살자를 심어 놓을 테고. 만일 우리 편이라면······.’
태수는 흥미로운 얼굴로 웃었다.
‘이거 재밌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