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대통령을 이용해 판을 깔다(5)
박태종이 반대하자 김정림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한청호의 뜻을 이뤄 주기 위해서였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아까 학교와 도로를 짓던 것을 떠올려 보세요. 한 번 믿고 맡겨 봅시다. 지원은 우리가 조금씩 도우면 될 겁니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이 아닙니까?”
‘그렇지 잘한다! 십시일반! 그거 아주 좋은 말이죠!’
태수는 겉으로는 일부러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좋아서 크게 웃었다.
‘돈 냄새가 점점 진해지는구나! 이 분위기라면 한청호를 제대로 벗겨 먹을 수 있겠어.’
그때 한청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자원하는 일이니 일단 보내 주는 게 맞습니다. 하는 일을 보아 영 안 될 것 같으면 그때 다시 의논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박정환은 장준용에게 고개를 돌렸다.
“장 회장 생각은 어떤가?”
“저 친구가 제법 유능하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포항에 와서 부린 수완을 보니 더 그렇단 생각이 듭니다.”
박태종을 어찌 이렇게 구워삶았느냐는 뜻이다.
비서에게 전해 들었던 것 이상으로 수완이 좋은 태수를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지원이 필요하다면 해 주면 그만이지요.”
장준용은 꽤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정리되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차기범도 한마디 보탰다.
“쟁쟁한 인물들이 모두 이렇게 한 사람을 추천하고 있으니 한번 맡겨 보심이 어떠십니까?”
마침내 박정환은 태수에게 말했다.
“중동 공사를 한번 해 보겠나?”
“다들 지원을 약속하시는 겁니까?”
“하하하, 그깟 지원 해 주마. 다시 묻지. 중동 공사를 자네가 맡겠나?”
“좋습니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태수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려 대통령을 이용해서 깐 판이 아닌가.
제대로 뜯어먹지 못하면 아까워서 천추의 한이 될 터였다.
‘내가 밑그림을 그리고, 박태종이 바람을 잡았다. 대통령과 측근들, 재벌 총수가 참여해 완성한 큰 판이다. 이걸 안 먹고 남 줄 수는 없지.’
당장 지금만 해도 돈 냄새가 이렇게 풀풀 난다.
태수가 냄새가 너무 좋아서 환장할 정도로 말이다.
‘그럼 이제 수금할 시간인가?’
태수는 눈을 빛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한청호와 눈이 딱 마주쳤다.
박정환이 크게 웃으며 태수를 보았다.
“좋다, 무엇이 필요하냐?”
“먼저 청일 중공업에서 포크레인 40대와 덤프트럭 30대, 레미콘 25대, 불도저 30대, 관정 드릴 및 탐사 드릴, 코어 드릴, 분쇄기 따위를 지원받고 싶습니다.”
“뭣이?”
한청호가 용수철 튕기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찌나 놀랐는지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이 자식이 지금 나를 통째로 벗겨 먹으려 들어?”
오죽하면 박정환 각하를 앞에 두고 이를 갈았을까.
한청호를 보고 박정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앉아. 내 앞에서 언성 높이지 말고.”
“가, 각하! 지금 이자가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중장비가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자그마치······.”
태수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 모두를 할부로 사겠습니다. 그러니 전부, 당장, 팔아 주시죠.”
“뭣이?”
한청호는 표정을 와락 구겼다.
박태종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할부로 팔아 달라는데 이것도 거절할 거요? 하하하.”
한청호는 박태종을 매섭게 노려봤다.
한청호의 시선이 다시 태수에게 향하자 태수는 얄밉게도 씩 웃었다.
심지어 어깨도 으쓱한다.
“그럼 어쩝니까? 베두인족 싸움이 그친다고 해도 준공 기일이 워낙 촉박한 것을요. 공사할 도로가 농로도 아니고 동구 밖 과수원 길도 아니잖습니까. 장비라도 좋아야 제시간에 맞춰 완공할 것 아닙니까?”
박정환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맞는 말이야. 이왕 중동으로 떠났으면 준공 기한 이전에 공사를 끝맺을 각오 정돈 해야지.”
박정환은 태수의 말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서였다.
“한 회장, 인심 좀 쓰게. 저 친구가 달라는 대로 내어 줘.”
“각하!”
“할부도 집어치워. 솔직히 그건 판매지 지원이라고 할 수 없지. 재벌 기업이나 되어서 그깟 일로 쩨쩨하게 굴지 말게.”
“각하! 그깟 일이라뇨! 한두 푼이라뇨! 이건 자그마치······.”
쿵.
박정환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그러곤 한청호를 엄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작작해. 사우디 왕실 분노 이전에 내 분노를 받아 볼 참인가?”
한청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박정환은 딱 잘라 말했다.
“싫으면 청일이 알아서 기한 내에 중동 공사를 마무리하던가.”
“각하.”
“그건 자네가 이미 거절한 사안이야. 나도 이제 더는 안 봐줘.”
이건 대통령의 협박이었다.
박정환은 이미 짜증이 날 만큼 난 상태였다.
청일이 책임을 회피하는 바람에 사우디 왕실을 상대하게 된 박정환이 아닌가.
청일에게 아무리 정치 자금을 받았기로서니 제 말을 우습게 여기는 것까지는 용서치 못한다.
꽈악.
한청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박정환이 아예 못 박았다.
“이봐, 한 회장. 청일 중공업만 해도 그래. 누구 덕에 컸는지를 명심하게. 키우는 게 힘들지 없애는 게 힘들겠나?”
명백한 협박까지 나왔다.
청일 전자, 청일 정유, 청일 화학, 청일 중공업, 청일 건설 등등.
대통령의 비호 없이는 이렇게까지 클 수 없었다.
‘대통령의 비호가 걷힌다면 어찌 될까? 각하의 눈 밖에 난 청일은 순식간에 난도질당할 것이다.’
한청호는 눈을 감았다.
각하가 저렇게 나오는데 다른 방법은 없다는 걸 여기 있는 모두가 안다.
“각하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하나 만일 기한까지 공사를 제대로 끝내지 못해서 청일 정유에 불똥이 튄다면 전 이 모든 손해를 이자까지 쳐서 받아 내겠습니다.”
마지막까지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 않는 한청호다.
박정환도 그에 대해 더 나무라지 않았다.
“좋아, 그렇게 해. 근데 받아 낼 건 있고?”
“저자가 가진 전부를 청일이 가져가지요. 몰리브덴 광산 채굴권도 청일이 승계하겠습니다.”
박정환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 이 정도면 되겠지?”
박정환이 태수에게 묻자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제가 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받아들이지요.”
“손해?”
한청호가 고개를 홱 돌렸다.
한청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여기 있는 모두가 알 정도였다.
-중장비 값이 대체 얼만데!
-고작 몰리브덴 광산 10년 채굴권을 두고 뭣이 어째?
박정환 앞이 아니었다면 한청호는 아마도 이런 말을 했으리라.
부르르.
한청호가 주먹을 쥐고 눈가를 잘게 떨었다.
그걸 보면서 사람들은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 시원하구나! 어쨌든 책임 소지가 있는 청일이 가장 큰 부분을 지원해야 하는 법. 이만하길 어디야? 고마운 줄 알아야지.’
‘저 친구 이왕 부르는 거 통 크게도 부르는군. 청일이 내놓을 수 있는 한계선, 딱 거기까지 불렀어. 배짱도 그렇고, 계산도 절묘해.’
‘확실히 저 정도면 한청호가 게거품을 물 정도긴 하지, 큭큭큭.’
베두인족 싸움은 물론이거니와 준공 기한까지 촉박하여 실패할 확률이 매우 큰 중동 공사다.
이들 입장에선 성공한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게 없는데, 만일 실패한다면 사우디 정부로부터 가차 없는 보복을 떠안게 된다.
‘따지고 보면 리스크만 큰 폭탄이다. 괜히 다들 떠안기 싫다고 할까.’
‘청일이 폭탄을 남에게 떠넘기는 것치고는 그리 과한 조건도 아니야.’
‘그랬기에 각하도 그냥 두고 보는 거겠지.’
그때 태수는 금산의 장준용을 쳐다봤다.
“그리고 금산의 배를 빌리고 싶습니다.”
“금산의 배를?”
난데없는 요구에 장준용은 눈을 치떴다.
호기심과 경계심이 가득한 눈이었다.
“금산이 이번에 바레인에서 처음으로 석유를 공급받기로 하셨다지요?”
“그렇다네.”
태수는 씩 웃었다.
“그 배, 언제 출항합니까?”
“이달 말이네만.”
“그 기간을 조금 앞당겨 주실 수 없으십니까?”
“기간을? 왜?”
금산의 장준용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 어리둥절했다.
사우디 도로 건설에 바레인으로 갈 유조선 출항 날짜가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태수는 씩 웃었다.
“석유를 잔뜩 싣고 올 생각으로 여기선 빈 배로 출항하겠죠?”
“그렇지.”
유조선은 일반 화물선과 정반대로 수송한다.
공선(空船)으로 출발하여 도착, 그 이후 기름을 가득 싣고 만재(滿載) 상태로 돌아오는 방식이다.
“장 회장님, 이번에 물과 자재를 잔뜩 싣고 중동으로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바레인 가는 길에 사우디에 들러 물과 자재를 전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뭐야?”
태수의 뜻을 깨닫고 장준용이 크게 웃었다.
“물과 자재를 우리 유조선에 싣겠다고?”
“참, 중장비도 실어야 하는데. 유조선엔 실을 공간이 부족하겠죠?”
“하하하, 그럼 바지선도 지원해야 하겠군?”
“그렇게 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지요.”
“하하하.”
장준용은 크게 웃고 말았다.
태수도 속으로 웃었다.
‘금산의 장준용 회장, 이 방법은 당신이 나중에 바레인 조선소 공사 때부터 써먹는 수법입니다. 제가 당신 방법을 미리 좀 당겨쓰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장준용에겐 꽤 충격적인 제안이었던 모양이다.
장준용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자네, 잔머리가 아주 대단하군. 그 방법이라면 확실히 공사 기간을 파격적으로 단축할 수 있겠어.”
장준용은 무척 즐거워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더구나 유조선이라면 빈 배로 출발할 테니 물을 잔뜩 싣고 가도 상관없지. 중장비와 자재까지 전부 싣고 가서 공사한다? 기발한 착상이고, 뛰어난 발상이야.”
박정환 역시 태수의 생각을 듣고 즐거워하긴 마찬가지였다.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야. 어때? 장 회장, 가능하겠나?”
“좋습니다. 유조선에 바지선 몇 척 빌려 주지요. 거기까지 가는 기름값도 모두 제가 대겠습니다.”
장준용은 한청호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기름값이라고 해 봤자 청일이 지원한 것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한청호가 매섭게 장준용과 태수를 노려보았다.
태수는 슬쩍 덧붙였다.
“시일이 촉박합니다. 서둘러 바지선에 자재와 중장비를 실어야 합니다. 당장 정유 탱크에 물을 실을 수 있겠습니까?”
“좋아, 내 미리 준비해 놓겠네. 정유 탱크에 물을 실으려면 좀 더 공들여 꼼꼼하게 씻어야겠지.”
장준용은 태수를 보며 웃었다.
“하루나 이틀만 시간을 더 주게. 그런데 청일의 중장비가 제시간에 맞춰 내 배에 오를 수 있으려나 모르겠군.”
장준용이 대놓고 언급하자 한청호는 낯빛이 변했다.
박정환 각하가 한청호를 보며 웃었다.
“청일도 당장 바지선에 중장비 실어. 금산 해운과 청일 중장비는 마침 그리 멀지 않으니 바로 실을 수 있겠군. 할 수 있겠지?”
이번에도 답이 정해진 물음이었다.
한청호가 입을 다물고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태수는 속으로 몰래 웃었다.
‘박정환이 대놓고 압박하는데 도망갈 길은 없어. 한청호, 당신의 대답은 진즉 정해져 있었어.’
한청호는 한참 만에야 겨우 대답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늦지 않게 중장비를 배에 싣겠습니다.”
“자네가 직접 한 약속이란 점을 명심해.”
“명심하겠습니다, 각하.”
한청호가 주먹을 꽉 쥔 채 독기 품은 눈으로 태수를 노려본다.
‘한청호, 약 올라서 죽으려 하는군.’
태수가 박태종을 슬쩍 보자 박태종은 크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렇다면 포항 철강은 자재를 지원하겠소.”
“옳거니!”
박정환은 크게 기꺼워하며 손뼉을 쳤다.
“좋아, 아주 좋아. 이렇게 모두 조금씩 지원을 해 주니 일이 쉽게 풀리는군. 아주 좋아. 그래, 일은 이렇게 풀어 나가야지.”
그때 태수가 박정환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각하께서도 지원해 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박정환은 의아한 얼굴로 태수를 돌아보았다.
“내가? 내가 따로 지원해 줘야 할 게 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