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대통령을 이용해 판을 깔다(4)
박정환은 한청호를 돌아보았다.
“한 회장, 청일에서 수고 좀 해 줘야겠어.”
“각하, 억울합니다. 저는 삼원 건설이 해외 입찰을 하겠다고 나서기에 좋은 뜻으로 제 인맥을 동원해 연결해 주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일로 청일은 이만저만 곤란해진 게 아닙니다.”
한청호는 말했다.
“삼원 건설이 무책임하게 나 몰라라 하니 청일 정유까지 불똥이 튀고 있습니다. 연일 항의가 빗발치고, 석유를 끊겠다는 으름장까지 들었습니다. 저도 골치가 아픕니다.”
엄살이긴 했지만 엄연한 사실이기도 하다.
사우디 왕실이 박정환 대통령에게 항의 서신을 보내올 정도인데, 삼원 건설을 소개한 청일 그룹에 어찌 항의하지 않았겠나.
“그럼 청일이 나서서 도로 건설을 마무리하면 될 일이 아닌가. 잘됐군.”
“각하, 삼원 건설의 일입니다. 청일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한청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삼원 건설이 오죽하면 공사를 내팽개치고 도망갔겠나.
베두인족의 싸움은 정말로 위험하다.
태수는 바로 한청호의 속셈을 꿰뚫어 보았다.
‘한청호는 피해를 무릅쓰고 마무리할 생각이 없구나. 그러니 저렇듯 몸을 사리는 거지.’
한청호는 한숨을 쉬었다.
“오히려 청일은 피해잡니다. 그런데 책임까지 지라는 말씀입니까? 정말 너무하십니다.”
“청일의 정유와 석유 화학은 사우디 왕국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지 않나. 이 일로 사우디 왕실이 등을 돌리면 청일의 타격이 클 텐데 이대로 수수방관하겠다는 건가?”
“그러니 각하께서 청일의 사정을 헤아려 주시길 이렇게 바라겠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삼원 건설이 해외 진출을 하건 말건 돕지 않았을 겁니다. 이미 전에 보고했듯이 말입니다.”
그 보고 때 받은 것이 제법 많은 박정환은 한청호를 더 밀어붙이지 못했다.
이때다 싶어 김정림이 냉큼 끼어들었다.
“그렇습니다, 각하. 청일은 삼원 건설의 무책임한 행동에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책임은 삼원 건설이 혼자 져야죠.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셔야 합니다.”
“듣고 보니 그렇긴 하군.”
한청호로부터 막대한 정치자금을 받아 선거를 치른 박정환이 아닌가.
선거 이후 축하 선물로 사과 박스를 몇 박스나 챙겼으니 한청호의 체면을 봐주지 않을 수가 없다.
한청호는 읍소했다.
“청일을 위해서라도, 사우디 왕실을 위해서라도,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도, 각하께서 이 일을 조속히 마무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태수는 피식 웃었다.
‘한마디로 난 잘못이 없으니 다른 놈보고 이 일을 해결하게 만들라는 소리네.’
박정환은 금산 그룹의 장준용을 돌아보았다.
“어쩔 수 없군. 이번 중동 공사는 기술과 자금이 확실한 금산 건설이 나서 줘.”
“각하, 죄송합니다. 저흰 지금 조선소 건설에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장준용은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두려워 재빨리 발을 뺐다.
금산 조선소는 박정환이 직접 지시를 내린 거대 건설 프로젝트였다.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의 일환으로 대한민국에 조선소를 지어 해외 조선 사업을 장악하자는 박정환의 포부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박정환은 땡전 한 푼 내놓지 않으면서 장준용을 윽박질러 해외 차관을 끌어오도록 내몰았다.
“각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조선소 건설 자금을 끌어오기 위해 제가 해외를 몇 해나 돌아다녔습니까? 얼마 전에야 간신히 중동에서 돈을 끌어올 수 있었습니다. 하여 올해 안에 배를 건조해 내야 합니다. 그게 약속이었습니다.”
“으음.”
박정환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장준용은 중동 왕족에게 조선소 건설 자금을 빌리며 계약을 따냈다.
그리고 그 배를 올해 안에 중동 왕실에 내놔야 한다.
박정환은 이번엔 박태종에게 눈을 돌렸다.
폭탄 돌리기가 따로 없다.
“각하, 저는 제철소를 지어야 합니다. 제철소 건설일이 워낙 시일을 다투고 위험한 까닭에 도로는 저기 저 친구에게 하청 줬습니다.”
“저 친구라면······.”
박정환의 눈에 가장 말석에 앉아 있는 태수가 눈에 딱 들어왔다.
박정환은 태수를 보며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갓 건설사를 차린 젊은이에게 중동까지 가란 건 무리겠지.”
아무리 갈 사람이 없어도 그렇지.
박정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봐, 이렇듯 서로에게 미루기만 할 건가? 지금 대책을 세우자고 부른 것이지 서로 얼굴 붉히자고 부른 건가?”
장준용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각하께서도 저희 사정을 좀 고려해 주시지요. 일부러 빠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당장 지어야 할 제철소와 조선소 때문에 꼼짝을 못한다는 겁니다.”
박태종이 한청호를 노려보았다.
“청일이 삼원 건설을 보증했습니다. 보증이란 게 뭡니까? 여차하면 책임을 지겠다는 소리 아닙니까? 청일 건설이 책임지면 되겠군요.”
“지금 뭐라 했소? 말이면 단 줄 아시오?”
“사실이 그렇잖소. 자신이 없었으면 보증을 서질 말았어야지. 안 그렇소?”
“박태종, 네놈이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각하께서도 인정하고 넘어간 일을 끝내 트집 잡아 걸고넘어지다니!”
박태종과 한청호가 보란 듯이 서로를 노려봤다.
동갑인 둘은 예전부터 자주 부딪쳤다.
성격도 안 맞고, 가치관도 다르고, 하나서부터 열까지 전부 맞지 않았다.
박정환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들었다.
“지금 내 앞에서 언성을 높여서야 쓰나. 그만들 하지.”
박태종과 한청호는 서로 눈을 돌렸다.
금산의 장준용이 조용히 물었다.
“그럼 각하께선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누군가는 반드시 이 일을 완수해야 한다.”
“그쪽 왕가의 중요 인물이 이 일로 곤란에 처했다니 각하께선 그 체면을 생각하시겠다는 거군요.”
“그래, 다른 누구도 아니고 칼리드의 아들이 얽혔어. 칼리드가 누군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직계 왕족이며 현재 국방 장관을 맡고 있는 실세 중의 실세야. 이자를 무시할 순 없지.”
“그렇다면 서울에 올라가 100대 기업 총수들을 모아 놓고 의견을 구해 보심이 어떠십니까?”
“헛, 음.”
박정환이 헛기침을 하며 의견을 묵살했다.
내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한청호가 박정환에게 말했다.
“각하, 100대 기업까지 갈 필요 있습니까?”
박정환이 원하는 바를 냉큼 건드린 한청호.
그는 아부와 뇌물로 박정환과 퍽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한청호는 웃으며 태수를 가리켰다.
“아까 제철소와 마을을 돌며 각하께서 칭찬하신 주인공이 여기 있잖습니까? 도로도 널찍널찍하게 아주 기가 막히게 잘 뽑았다고 하셨지요?”
“이제 막 건설사를 차린 애송이야.”
“경험이 좀 부족하다뿐이지 제가 보기엔 아주 잘할 것 같아서 그럽니다. 이자를 보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사람 보는 안목이라면 대한민국에서 제일이라는 한청호다.
한청호가 대놓고 적극적으로 인재라 밀어주니 박정환이 눈을 반개하며 태수를 다시 보았다.
“흠, 믿고 맡겨도 될 인재라 생각하나?”
“인재지요. 아마도 중동 건설 문제도 훌륭히 해결할 거라 생각합니다.”
한청호가 몰래 태수를 매섭게 노려봤다.
태수는 그 속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내게서 몰리브덴 광산을 빼앗을 계획이 눈앞에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으니. 한청호가 약이 바짝 올랐구나. 날 사지로 보내려고 아주 작정했군.’
일단 뇌물을 먹였다면 몰리브덴 광산이 아니라면 다른 것이라도 반드시 받아 내야 하는 게 한청호였다.
박태종도 속으로 코웃음 쳤다.
‘인재라는 소리 하기 싫어 저리 박박 떨면서. 어떻게든 젊은 친구를 중동으로 보내려고 수를 쓰는구나.’
지금 중동 공사 현장은 아주 살벌할 것이다.
그러니 건설로 잔뼈가 굵은 삼원 건설이 줄행랑을 놓았고, 금산과 포항 철강, 청일까지 전부 폭탄 돌리기 하듯이 마다하는 게 아닌가.
박정환이 태수에게 눈을 돌렸다.
“자네, 청일의 한청호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나?”
“물론입니다.”
“사람 보는 안목으로는 대한민국 최고라 일컬어지는 이지. 그가 자네를 인재라 칭했다네. 어찌 생각하는가?”
“청일이 직접 보증하였으니 이걸 부인한다면 청일의 체면이 손상되겠군요. 그냥 스스로 금칠을 하고 말겠습니다. 한청호 회장님께서 친히 보증하신 인재라고 치지요.”
“하하하.”
박정환이 크게 웃자 한청호는 표정을 작게 구겼다.
태수가 언변으로 아예 못 박아 버렸다.
-한청호가 보증한 인재, 강태수.
한청호는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 와서 아니라고 부인할 수도 없다.
태수는 속으로 크게 웃었다.
‘딱 내가 원하는 구도로 잘 돌아가는군. 어디 이참에 한청호한테서 왕창 뜯어내 볼까?’
태수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보통 인재라 함은 한 사람이 열 사람 몫을 해내기에 그런 말을 붙입니다.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건설사로 지금 당장 중동에 간다면 삼원 건설 이상의 몫을 해낼 수 있을까요? 제가 열 사람 몫을 해낸다 치고 드리는 말입니다.”
“으음.”
개인의 역량 차이가 아니라 건설사 규모 차이를 꼬집는 태수였다.
“이제 반년도 채 안 된 중소 건설사와 중동 진출을 노리는 삼원 건설, 차이가 꽤 크지 않겠습니까?”
박태종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 이제 갓 시작한 작은 건설사와 관급 공사로 십여 년간 덩치를 불린 중견 건설 기업. 둘이 비교가 됩니까?”
“으음.”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자금력, 데리고 있는 직원 수, 보유한 중장비, 가진 기술과 실적 등등. 둘의 차이를 말하려면 끝도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불가능합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개인의 역량을 떠나 회사의 기본적인 수준이 너무 다릅니다. 그 차이를 누군가가 메워 주지 않는다면 지금으로선 저도 딱히 방법이 없습니다.”
한청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차이를 메워 준다? 그게 무슨 뜻인가? 우리 보고 자네 건설사에 투자하란 소린 아니겠지?”
태수는 씩 웃었다.
“제 건설사를 삼원 건설만큼 키워 달란 뜻은 아닙니다. 다만 어느 정도의 지원을 요청하는 겁니다.”
“지원을 요청한다고?”
“네, 이곳에 모인 분들은 모두 제법 많은 것을 도와주실 수 있는 분들이 아닙니까? 지원을 해 주신다면 저도 까짓거, 한번 덤벼들어 보겠습니다.”
대통령에 그의 최측근, 재벌 총수들이 모인 자리가 아닌가.
태수의 입에서 긍정적인 말이 튀어나오자 순간 분위기가 변했다.
안 그래도 처리하기 난감한 일이었다.
폭탄을 누군가에게 떠넘길 수만 있다면 당장 떠넘기고 싶었다.
“지원이 있다면 중동 공사를 해 보겠다는 뜻인가?”
“젊은 사장이 패기가 좋구나. 암, 젊을 땐 달려들어 일해야지.”
“듣던 중 반가운 말입니다. 하하하.”
모두 얼씨구나 좋다 하는 분위기가 잡혔다.
그때 박태종이 일부러 퍽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애송이의 객기라 생각합니다. 덩치 큰 삼원 건설이 괜히 줄행랑친 게 아닙니다. 베두인족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으음, 그게 문제지.”
“베두인족은 배타적인 부족입니다. 외부인이 싸움 한복판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자들이 아니지요. 그러니 보통 지원으로는 부족할 겁니다.”
한마디로 막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