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대통령을 이용해 판을 깔다(3)
장준용 옆에는 비서실장 김환이 붙어 있었다.
김환은 태수에게 슬쩍 웃어 보이고는 귓속말로 장준용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장준용이 태수를 슬쩍 보더니 손을 들었다.
“이게 누구신가? 강원도에 있어야 할 사람을 여기서 다 보는군. 하하하, 어쨌든 반갑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강태수라고 합니다.”
“난 금산의 장준용일세.”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보내 주신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장준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제일 만나기 힘든 자가 몰리브덴 광산주라더군. 하하하, 돈은 제법 만지셨는가?”
“덕분에 조금 벌었습니다.”
쿵.
그때 신경질적으로 차 문을 닫는 자가 있었다.
바로 청일 그룹의 총수, 한청호였다.
한청호가 손가락을 쫙 폈다.
“5일 지났다. 넌 좋은 기회를 놓쳤어.”
말 같지도 않은 제안과 협박을 하고서는 대답을 듣겠다며 5일 준 한청호다.
“똑똑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실망이 커.”
한청호는 등을 돌려 박태종과 박정환을 따라가 버렸다.
장준용은 멀어지는 한청호의 등을 보면서 입을 뗐다.
“나도 각하를 따라가야 하니 나중에 보세나.”
“알겠습니다.”
장준용도 한청호 뒤를 따라 제철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수는 포항 철강 사무실 앞에 남아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박정환이 금산의 장준용 회장과 청일의 한청호까지 대동하고 포항으로 내려왔다. 정말 사우디 공사 때문인가?’
청일의 한청호는 삼원 건설과 얽혔으니 두말할 필요 없다.
금산의 장준용은 금산 조선소를 건설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동의 부자에게 선박 수주를 따내며 오일 머니를 끌어온 전적이 있다.
그래서일까?
‘박정환 대통령이 아주 작정을 하고 포항에 내려오셨군.’
태수는 씩 웃었다.
* * *
포항 철강 사장실.
중요 인물들이 한데 모였다.
가장 상석에는 박정환 대통령이 앉고, 박정환의 옆에 경호실장 차기범이 서 있다.
박정환의 오른쪽에는 박태종과 금산 그룹 총수 장준용이 앉았다.
박정환의 왼쪽에는 비서실장 김정림과 청일의 한청호가 자리를 잡았다.
마치 두 편으로 편 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박정환이 박태종에게 말했다.
“자네가 소개해 준다는 사람, 들어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각하.”
박태종이 벌떡 일어나 사장실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박태종 뒤로 태수가 들어왔다.
“강태수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네. 일단 자리에 앉지.”
태수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박태종 쪽 말석 자리에 앉았다.
한청호와 마주 보는 자리였다.
박태종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태수를 소개했다.
“이 친구가 바로 학교를 짓고 있는 건설 회사 사장입니다. 아까 다들 둘러보셨지요?”
“그래, 제법 지었더군. 거기 현장에 있던 부사장이랑 인사도 나눴네. 아주 젊던데? 동생인가?”
박정환이 짓궂게 웃자 박태종이 조금 난처한 듯 웃었다.
“각하, 실은 아까 각하께서 만난 부사장은 제 아들입니다.”
“오, 그랬나? 그 젊은이가 자네 아들이었어?”
“네.”
“이것 보라지. 태종이 자네는 내게 아들을 이런 식으로 소개하는군?”
박정환이 크게 웃으며 한청호를 바라보았다.
“한 회장, 자네도 보았지?”
“예, 보았습니다.”
“아까 보자마자 청일 건설에서 영입한다고 하지 않았나? 하하하.”
실제로 박철완을 보고 한청호는 노골적으로 탐내었다.
“그 청년이 박 사장의 아들인 줄은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어찌 청일 건설로 들어오라 제안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영입 제안을 건넸던 것도 사실이지. 그리 탐나던가?”
“···예.”
답이 정해진 물음이었다.
한청호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박정환은 크게 기꺼워했다.
“하하하, 이것 보라지. 청일의 한청호가 사람 보는 안목으로는 대한민국 제일이야. 한 회장이 보증하는 인재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지. 박태종이, 아들은 잘났구나. 하하하.”
“송구합니다. 강태수, 이 친구가 제 아들을 냉큼 채간 겁니다.”
“하하하, 이제 보니 사람 보는 안목이 남다른 친구였군. 장차 청일의 한 회장 뒤를 이을 수 있을까 기대돼.”
박정환은 짓궂은 표정으로 박태종을 보았다.
“솔직히 말해 보게. 저 친구는 바지사장이고, 실은 자네 아들이 사장인가?”
“아닙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야 보는 눈들이 있으니까. 안 그런가?”
“제 아들에게 뭔가를 해 주고 싶었다면 포항 철강을 물려주고 싶다고 각하께 청을 올렸을 겁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박정환이 태수에게 눈을 돌렸다.
“강태수라 했던가?”
“네, 그렇습니다.”
“자넨 왜 굳이 태종이의 아들을 부사장으로 삼았나? 아들을 인질로 박태종을 흔들려는 속셈인가?”
박정환은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실제로 박태종을 들쑤셔 내 앞에 섰으니 그리 틀린 말도 아니지. 괘씸한 놈이로군.”
태수는 싱긋 웃었다.
“박태종 사장님과 별개로 그 아드님이신 박철완 씨는 실로 대단한 인재입니다. 장차 대한민국 건설에 큰 획을 그을 사람입니다.”
“그래?”
“그런 자를 만났는데 어찌 탐나지 않겠습니까? 누가 채갈까 두려워서 당장 영입했지요.”
“그래? 흐음.”
한청호가 보자마자 탐냈을 인재다.
하지만 박정환의 눈에는 아직도 의심이 가득했다.
권력을 잡은 이후 의심이 무척 많아진 박정환이었다.
그걸 보고 한청호가 옆에 앉은 김정림의 옆구리를 슬쩍 건드렸다.
“음?”
김정림이 돌아보자 한청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정림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각하, 전에 말씀드렸던 몰리브덴 광산을 기억하십니까?”
“몰리브덴 광산?”
“국가 전략 광물을 일개 개인이 독점해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다지요. 각하께서 추진하시는 중화학 육성 정책에 반하여 기업들에 농간을 부린다는 얘기, 기억나십니까?”
“기억하지. 내 어찌 그런 괘씸한 짓을 잊겠나.”
“몰리브덴 수출 중단으로 인해 기업들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대기업 수출량이 큰 폭으로 줄 것이고, 이는 경상수지 적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겁니다.”
“경상수지 적자? 그리 심각한 상황인가?”
“맞습니다, 각하. 이게 다 어떤 파렴치한이 몰리브덴을 독점했기 때문입니다. 실로 매국노나 할 법한 짓이 아니겠습니까?”
김정림이 태수를 가리켰다.
“그리고 저자가 바로 그 몰리브덴 광산주랍니다!”
“뭣이?”
태수를 바라보는 박정환의 눈에 노기가 어렸다.
“네가 감히 국가의 전략 비출 자원으로 사리사욕을 채우며 나라에 해악을 끼쳤단 말이냐?”
그때 박태종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김 실장, 현재 대한민국 경상수지가 적자 상태요, 흑자 상태요? 사실 관계부터 바로 합시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다음 분기, 혹은 그 이후······.”
“가정이셨군. 옆에서 듣기엔 어처구니가 없소. 수출 품목에 몰리브덴이 들어가는 제품이 몇 가지나 있으며 몰리브덴 사용량이 몇 %나 되는지 궁금하오. 모두 몰리브덴 탓이 맞소?”
김정림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박정환 대통령은 이미 노한 눈으로 태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박태종은 박정환을 돌아보았다.
“각하, 제가 일전에 드렸던 청, 기억나십니까? 어떤 자가 일제 시대 때 버려진 폐광산을 개발했고, 장차 국가에 자진 헌납하겠다는 청을 전해 올린 적이 있습니다.”
박정환은 태수를 보는 눈에서 노기를 풀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그때 그 광산주가 바로 저 청년, 강태수입니다.”
“아니, 그때 그 광산이 몰리브덴 광산이었단 말인가?”
박정환은 박태종을 돌아보았다.
“태종이, 자네는 왜 그런 중요한 일을 쏙 빼고 보고했단 말이냐?”
“각하께서 급히 회의에 들어가야 하신다며 요점만 간단히 말하라 하셨기에 그렇습니다. 중요한 건 광산을 자진 헌납하겠다는 뜻인지라 요점만 급히 보고 올렸습니다.”
“흠. 이거 하필이면······.”
하필이면 그 폐광산이 몰리브덴 광산일 게 또 뭔가.
일제 시대 때 일본 놈들이 오죽 싹싹 긁어 캐갔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박정환 대통령이다.
그러니 일제 시대 폐광산이라기에 대수롭지 않은 줄 알고 흔쾌히 10년 독점 채굴권을 허락했었다.
박태종은 말했다.
“제가 그 얘기를 꺼낸 건 8월 중순, 벌써 5달 전입니다. 몰리브덴 문제가 터지기 훨씬 전입니다.”
“그랬던 것 같군. 맞아, 확실히 그랬어.”
박정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지금에 와서 그 광산이 몰리브덴 광산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다.
“각하께서 오해하셨습니다.”
“음.”
태수를 바라보는 눈에는 노기가 걷혀 있었다.
박정환은 태수를 보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이거 뭐라 나무랄 수가 없군. 내 입으로 약속하였으니 두말할 생각은 없다. 광산 일은 자네가 알아서 계속해. 내 이것으로 더는 입에 올리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다 네 복이고, 애국의 보답이다. 운이 좋았다.”
박정환 대통령이 웃으면서 광산 일을 마무리하겠다고 하자 한청호의 안색이 변했다.
그 옆에서 눈치를 보던 김정림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각하, 이게 다 무슨 소립니까? 다른 광물도 아니고 국가 전략 광물인 몰리브덴입니다. 개인이 소유해서는 안 되는 중요 자원입니다.”
“그만.”
박정환이 손을 올렸다.
표정은 단호했다.
“이미 내가 승인한 일이다. 10년간 누구도 이자가 광산에서 무엇을 채굴하던 간섭하지 마라.”
“정녕 10년이나······.”
“그래.”
“그 말씀은······.”
모두 태수를 주목했다.
‘이미 대통령에게 손을 써서 10년 채굴권을 보장받았다는 말인가? 수완이 대단한 자군.’
‘여러모로 대단한 청년이구나. 미래를 예상하고 치밀하게 일을 처리했어.’
‘흥미롭군.’
박정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예전에 이자에게 직접 10년 독점 채굴권을 허락했다. 또한 몰리브덴 광산은 10년 후 나라에 귀속될 것이다.”
“으음.”
한청호가 작게 신음을 내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태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박태종과 장준용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한청호가 이미 몰리브덴 광산을 노리고 돈을 뿌려 댔었구나. 쌤통이다.’
김정림은 받은 돈이 있었기에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저기, 각하.”
난처한 목소리로 박정환에게 재차 청하려는데, 박정환이 손을 들어 그 입을 막았다.
“그만. 모두 그런 줄 알고, 앞으로 이에 관한 잔소리는 입에 올리지 마.”
“···예.”
어쩔 수 없이 물러서는 김정림.
한청호는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눈으로 태수를 슬쩍 노려보았다.
그걸 보고 박태종이 화제를 돌렸다.
“각하, 중동에서 이상한 잡음이 들려오던데. 어찌 처리하기로 하셨습니까?”
박정환이 심각한 표정으로 돌변했다.
몰리브덴 광산 따위 일은 이제 안중에도 없다.
“안 그래도 내 그 문제 때문에 포항까지 내려온 것이라네. 일부러 금산과 청일도 함께 불렀고.”
“그랬군요.”
박태종 속으로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강태수, 저 친구가 짚은 것이 틀림없었군. 과연 중동과 관련된 일 때문에 각하께서 내려오신 것이었어.’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어찌 젊은 친구가 이렇듯 앞을 내다보는 것인지.
박정환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우디 왕실에서 내게 항의 서한을 보냈어. 물론 비공식적인 항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외면할 수는 없지.”
모두 박정환을 주목했다.
“사우디는 남한과 단독 수교를 맺고 있는 흔치 않은 중동 국가이며 현재 석유를 많이 생산하는 중동의 강호이지. 난 이 문제를 좌시할 생각 없네.”
꿀꺽.
모두 긴장하여 마른침을 삼켰다.
드디어 박정환이 칼을 꺼내 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