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33화 (33/230)

33. 대통령을 이용해 판을 깔다(1)

청와대 응접실에서는 은밀한 만남이 이뤄지고 있었다.

한청호는 대통령 비서실장 김정림에게 사과 박스 한 상자를 건넸다.

물론 사과 대신 다른 것으로 채워진 박스였다.

“각하께 청일의 한청호가 축하 인사드리러 왔었다고 전해 주십시오.”

“내 그리 전하리다.”

김정림은 웃으면서 사과 박스를 받았다.

분명 파릇파릇한 초록색 다발이 가득할 것이리라.

“분명 대선 직후에 각하께 인사드리러 왔었는데, 어째 며칠 만에 다시 찾아오셨소?”

“축하와 인사는 자주 받을수록 좋은 것이죠. 비서실장께서도 선거 치르느라 그간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한청호는 품에서 두둑한 봉투를 꺼내어 김정림에게 건넸다.

봉투를 선뜻 받으며 김정림은 호탕하게 웃었다.

“나라를 위해, 각하를 위해 당연한 일을 하였을 뿐인데 노고랄 게 뭐 있겠소. 하나 내 청일의 성의는 기억하지요.”

김정림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시오. 내가 어떤 노고를 해 줬으면 하시오?”

“강원도에 몰리브덴 광산이 있다는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몰리브덴 광산?”

“예, 몰리브덴은 군수 용품에 사용되는 국가 전략 광물이지요.”

한청호는 태수를 떠올리며 눈을 빛냈다.

“몰리브덴 연일 큰 폭으로 가격이 뛰었습니다. 예전 가격보다 열 배도 훨씬 넘게 훌쩍 뛰었다지요. 광산에서 떼돈을 벌어 간다고 합니다.”

“그 말이 사실이오?”

“물론이죠. 다른 것도 아니고 국가 전략 광물입니다. 나라의 자원을 팔아 치워 제 배만 불리는 것을 그냥 가만히 두어서야 쓰겠습니까?”

“으음.”

“각하께서 심혈을 기울여 육성하시는 중화학 공업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그놈이 사리사욕 채운답시고 농간을 부린 탓에 당장 공장이 멈출 지경입니다.”

“그런 문제가 있었소?”

한청호는 은근하게 웃었다.

“생각해 보시지요. 그 몰리브덴이라는 놈을 팔아 채워야 할 곳간이 누구의 곳간인지를.”

김정림도 은근하게 웃었다.

“채우게 될 곳간이 나라의 곳간이 될지 자네의 곳간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그놈의 곳간은 아니란 거지.”

“바로 그렇습니다.”

“내 각하께 말씀드려 보겠네.”

김정림이 일어서자 한청호도 따라 일어섰다.

“각하께서 허락하신다면 그 일을 제가 맡아 보고 싶군요. 곳간 청소 말입니다.”

“하하하, 그건 각하께서 알아서 정해 주실 일일세. 하지만 내 그것도 한번 넌지시 말씀드려 보지. 사과는 잘 먹겠소.”

사과 박스를 들어 올리며 김정림이 흐뭇하게 웃었다.

* * *

박태종은 태수를 떠올렸다.

“지금 어디까지 왔으려나?”

박정환 대통령이 보자 하신다는 연락을 넣었다.

태수는 시원시원하게 “그럽시다.”하고 출발하겠단 뜻을 밝혔다.

박태종은 태수를 기다리며 흐뭇하게 웃었다.

“욕심도 없고, 능력은 출중하고, 성격마저 시원시원하니 더할 나위가 없어.”

일본산 망종의 뒤를 캐던 능력은 중앙 정보국 이상이었다.

강원도 광산을 찾아갔을 때 별다른 조건 없이 시원시원하게 계약해 줬다.

심지어 국가를 위해 자원해서 광산을 헌납할 결심까지 하다니.

정말 보기 드문 청년이지 않은가.

“국가의 미래를 짊어질 동량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돈이 되는 상가나 병원 대신 학교를 짓겠다고 할 리가 있나.

이왕 짓는 거 대한민국의 미래를 키우겠다지 않나.

“심지어 한눈에 내 아들의 진가를 알아보고 제 회사로 빼돌렸단 말이지. 확실히 보통 안목이 아니었어.”

아들은 훌륭하게 학교를 짓고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더 제대로, 잘, 확실하게.

자신은 곁에 두고도 모르던 아들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봤으니 그 청년의 안목이야 말해 무엇하랴.

아마도 한청호 그 이상이지 않을까?

“생각할수록 참 대단한 자란 말이야. 앞으로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낼 것이야.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날카로운 직감만큼은 자신 있었다.

특히 범상치 않은 자를 눈앞에 두었을 때 더욱 힘을 발휘하는 직감이다.

그 직감이 여러 번 그에게 알려 줬다.

강태수는 정녕 나라에 꼭 필요한 비범한 인재라고.

“강태수, 그 친구를 열심히 키워 나라를 위해 크게 써야 할 텐데. 내 이참에 각하께 제대로 천거해야겠어.”

아마 박정환 대통령이라면 그를 보자마자 반색하실 게 틀림없다.

* * *

태수를 자동차를 몰아 포항으로 향했다.

“박정환 대통령이 굳이 날 보자고 하는 이유는 뭘까?

몇 가지 짐작 가는 일이 있다.

“박태종이 나에 대해 말해서 박정환의 관심을 끌었거나.”

태수 덕분에 제철소 건설 속도가 빨라졌을 것이고, 포항 철강에서 의뢰한 학교를 짓고 있다.

또한 요즘 크로몰리강과 스테인리스강을 팔아 돈 냄새 좀 맡아 봤을 박태종이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봐야지. 난 대통령이 관심을 가질 만한 급이 아니니까.”

고작해야 강원도 일개 광산주에 하청 건설사 사장이다.

“대통령이 박태종의 체면을 세워 주느라 그냥 지나가는 말로 날 언급했을 거야.”

박정환 대통령에게 박태종은 심복 중의 심복, 측근 중의 최측근이 아닌가.

“그게 아니면 한청호가 옆구리를 찔렀겠지.”

한청호라면 당장 돈 상자를 들고서 청와대로 달려갔을 것이다.

몰리브덴 광산을 빼앗아 제 배를 채울 생각으로.

“하지만 박정환이 한 입으로 두말할 위인은 아니니 몰리브덴 광산을 빼앗기진 않을 테고.”

박태종도 그 부분에 대해선 확답했다.

박정환은 속이 쓰릴지언정 말을 바꾸진 않을 것이다.

“흠, 역시 심복인 박태종을 만나 의논할 일이 생겼다고 봐야겠지?”

그건 박태종을 만나 한번 떠보면 알 일이다.

“이번에 박정환을 만나면 은근슬쩍 강남 개발에 대해 말을 건네 볼까?”

강남 개발.

박정환이 야심 차게 준비하는 커다란 도시 개발 계획이다.

아직 본격적으로 실행하는 단계는 아니지만 큰 그림은 이미 그렸을 터다.

“도로를 건설하는 것과 맞바꿔 대치동 아파트 계획을 승인해 주면 좋을 텐데.”

청일 건설은 대치동 청일 아파트를 지으면서 사방으로 삼성로, 영동대로, 남부순환로를 깔았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지금 헐값에 사들이고 있는 저습지 황무지가 순식간에 주거용 아파트 용지로 바뀔 테지.”

대치동.

사방에 도로를 끼고, 지하철 3호선 대치역을 사이에 둔 역세권이며 강남 교육의 메카 8학군을 끼고 있는 대한민국 교육의 중심지가 될 곳이다.

청일 아파트는 그 중심에서 36년 동안이나 강남 아파트의 상징이 된, 강남구 최대의 주거 전용 대단지 아파트였다.

“이번엔 청일 건설이 아닌 태양 건설이 아파트를 짓는다. 최고급 아파트 브랜드는 태양 건설이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강남땅은 곧 대한민국 땅값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아파트를 올릴 자금이 부족해. 자그마치 4천 5백 세대 가까이 한꺼번에 지을 예정이니까. 왕복 14선에 이르는 고속 도로 까는 것만 해도 돈이 엄청나게 들 텐데.”

몰리브덴 광산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족족 대치동 땅을 사들이는 데 쓰고 있다.

최소 확보해야 할 부지만 7만 2천 평에 달한다.

심지어 요즘 누군가 땅을 사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조금씩 돌면서 대치동 땅값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조만간 지금보다 땅값이 더 오를 터.

그 전에 은행 대출이나 사채라도 써서 부지를 확보해야 할 지경이다.

“자금이 필요해. 몰리브덴 광산만으로는 턱도 없어. 거액을 확 당겨 올 일이 없나?”

태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1973년도에 그럴 만한 이슈가 있긴 하다.

“오일 쇼크를 이용하면 딱인데.”

1973년 10월 세계 제1차 오일 쇼크가 터진다.

석유 가격이 석 달 만에 무려 네 배 가까이 껑충 뛰어 세계 경제를 한 방에 흔들어 버리는 글로벌 이벤트.

1950년대 선진국들이 누리던 자본주의 황금기를 한 방에 끝장낸 사건 말이다.

“위기는 곧 기회의 다른 말이지. 오일 쇼크 생각만 해도 벌써 돈 냄새가 진동하네.”

세계 제1차 오일 쇼크는 제4차 중동 전쟁 때문에 발생한다.

속칭 욤 키푸르 전쟁 혹은 10월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전쟁으로, 1973년 10월 6일부터 같은 달 25일까지 약 3주간 시나이 반도에서 발생한 전쟁이었다.

그로 인해 중동 각국이 참전하고, 여섯 개의 주요 산유국이 일제히 석유 공급 중단을 천명하면서 세계 석유 시장이 발칵 뒤집힌다.

당시 배럴당 2.9달러였던 석유가 3개월 후인 12월경에는 배럴당 11달러로 훌쩍 뛰게 된다.

그야말로 가격 폭등.

“오일 쇼크 이후에야 중동에 건설 붐이 일어나서 해외 건설 진출이 활발해지긴 하지. 하지만 지금은 시기상조야.”

오일 쇼크로 벌어들인 오일 머니로 건설을 적극적으로 일으키게 되는 건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의 일이다.

“아깝다. 당장 석유 회사를 차릴 수도 없고, 중동에 연결된 끈도 없어. 하필이면 지금 중동은 매우 배타적인 시기라서.”

사우디 왕실에서는 현재 사업하는 외국 업자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반드시 스폰서를 요구하곤 했다.

“외국인은 정부 관료와 직접 만날 수도 없는 데다 권력층과 연결되지 않고서는 사업을 맡기지도 않으니······. 어렵다, 어려워.”

아쉽다.

중동에 공사만 따낸다면 당장 달려가 달러를 왕창 벌어 올 텐데.

“중동에 한 번 진출하기만 하면 다음 공사는 훨씬 수월한데. 그 한 번을 뚫기 어렵단 말이야. 흐음.”

중동을 이용해서 강남 아파트를 뚝딱 올릴 자금을 벌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한 끗발 하는 박태종이라면 중동과 관련된 정보나 연결된 끈이 있을지 몰라. 중동 건설에 대해 한번 물어보자.”

부아아앙.

태수는 힘껏 액셀을 밟아 속도를 올렸다.

고속 도로를 질주하며 차는 밟는 족족 쭉쭉 달려 나갔다.

* * *

포항 철강에 들어서자 박태종이 두 팔 벌려 태수를 환영해 주었다.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소.”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제철소 건설 자금에 여유가 좀 생겼다면서요?”

“하하하, 이게 다 당신 덕분이오. 어떤가, 내 사무실에서 위스키 한잔할 텐가?”

“좋습니다.”

태수와 박태종은 오랜만에 위스키 잔을 들었다.

쨍.

기분 좋게 건배하고, 그간 있었던 사정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박철완이 능력을 십분 발휘하며 학교를 척척 지어서 제법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참이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태수가 본론을 꺼냈다.

“박정환 대통령이 이 시기에 굳이 포항까지 내려오시는 이유, 짐작 가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겉으로는 제철소 때문이오. 하지만 아무래도 당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소.”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저 때문은 아닐 겁니다.”

“아니라고?”

“첫째, 몰리브덴 광산은 이미 각하께 채굴 허락이 떨어졌죠. 각하의 관심거리가 아닐 겁니다.”

“음.”

“둘째, 학교 건설은 각하의 눈에 차지 않을 작은 일입니다.”

“그런가.”

“셋째, 전 지금 박 사장님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이름이 안 알려졌습니다.”

“하하하! 겸손하기는.”

“저는 각하께서 심중에 답답한 고민이 있으셔서 박 사장님께 의논하러 오시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박태종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곧 일리 있는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박태종은 턱을 괴며 곰곰이 생각했다.

“으음, 각하께서 심중에 답답해하실 만한 일이야 워낙 많으니.”

대통령이니 크고 작은 나랏일이 많기도 할 것이다.

박태종은 몇 가지 짐작 가는 일들을 떠올려 봤다.

“베트남전, 국회법 개정안, 제9대 국회의원 선거, 남북적십자 회담, 새마을 운동. 또 뭐가 있을까.”

“정치 쪽이 아닐 겁니다. 경제나 외교 쪽으로 골 아픈 일 중에 짚이시는 게 있습니까?”

“응? 정치 문제가 아니란 말인가? 왜 그렇게 보시오?”

“정치 쪽 일이라면 박 사장님과 의논하실 것 같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박태종은 포항 철강에 내려온 뒤로 정치권에 대해 일절 관심을 끊고 정경분리(政經分離)를 외치는 사람이다.

그런 박태종에게 정치권 일을 의논하러 포항까지 오진 않을 것이다.

굳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면 박태종이 주로 관여하는 경제 관련, 혹은 외교 관련 문제일 것이다.

박태종은 다시 한번 턱을 괴어 곰곰이 생각했다.

“그거라면 하나 걸리는 게 있소.”

“그게 뭡니까?”

“중동 도로 건설 문제 때문에 사우디 왕실은 지금 화가 이만저만 난 게 아니오. 사우디 왕실에서 각하께 비공식적으로 항의 서신을 띄웠다고 들었소.”

“사우디 왕실? 중동 도로 건설 문제요?”

설마, 이거 어쩌면?

태수는 눈을 빛냈다.

“그 얘기, 자세하게 들어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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