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청일 그룹에서 나왔소(3)
송진구가 품속에서 문서 꾸러미를 내주었다.
태수는 흡족하게 웃었다.
“역시. 장말동 어르신은 은원이 확실하신 분이군요. 덕분에 수고를 덜었습니다.”
장말동이 태수에게 보낸 선물은 땅문서였다.
집안에 들어앉은 배신자를 색출하고, 사채를 회수해 파산을 면하게 한 은혜를 땅으로 갚은 거다.
‘장말동이 인물은 인물이야. 수완도 좋고, 일 처리도 확실하군.’
태수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을 보내 힘을 실어주는 거다.
태수는 선물로 받은 땅문서를 들추었다.
“대치동 땅 1만 평이라. 아주 좋습니다. 마침 제가 사려고 했던 땅이군요.”
“허, 뭔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어르신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줄줄 읊냐?”
태수는 그저 씩 웃었다.
“어르신이 전하셨을 말이 하나 더 있을 텐데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냐? 진짜 환장하겠다.”
“당신을 얼마나 빌려 써도 된다고 하시던가요?”
“컥! 너 설마 독심술 할 줄 아냐?”
이쯤 되자 송진구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반 년.”
장말동이 수족을 빌려주는 기간이다.
장말동으로서는 큰맘 먹고 내준 것일 터.
“돈만 보내. 강원도에서 귀찮게 서울 오갈 것 없어. 내가 너 대신 강남땅을 사서 보낼 테니까.”
“어르신께 정말 감사히 잘 쓰겠다고 전해주시죠.”
“대체 어떻게 알았냐? 아직도 내부에 배신자가 남아 있었나?”
송진구는 작게 중얼대며 눈알을 부라렸다.
태수는 피식 웃었다.
‘장말동은 송진구에게 필요한 정보만 내주고 있다.’
송진구에게 선물을 보내는 이유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송진구는 내가 은밀히 대치동 땅을 사 모으고 있다는 사실과 규모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럼 송진구에게 그 정보를 알려준 이유가 있다는 뜻. 바로 대치동 땅을 사는데 송진구를 쓰라고 보낸 거다. ’
이유는 간단하다.
‘장말동은 일부러 송진구에게 대치동 땅 문서까지 들려서 강원도로 보내 얼굴 도장을 찍게 했어. 내 의사를 확실하게 받아오라고. 그 뜻, 잘 알아들었다.’
태수는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할 말도 다 전했고, 줄 것도 다 전한 것 같은데. 서울까지 가는 길 살펴 가십시오.”
“망할 놈. 용건이 그것뿐인 건 또 어떻게 알았대? 진짜 별걸 다 알아맞히는구나. 내가 졌다.”
송진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일어섰다.
태수는 손에 든 문서 더미를 보며 웃었다.
‘장말동이 이렇게 뒤를 밀어줄 줄이야. 안 그래도 서울과 강원도를 오가기 힘들었는데.’
최고의 선물이었다.
더구나 사채업으로 잔뼈가 굵어서 수완 좋기로 유명한 명동 하이에나 송진구가 도우미로 붙었다.
아마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태수에게 필요한 강남땅을 구해올 것이다.
‘장말동 덕분에 가장 시점에서 내가 필요한 도움을 얻었다. 앞으로 수월하게 일이 진행되겠어.’
태수는 벽에 걸린 서울 지도를 보았다.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간다. 강남으로. 시작은 대치동부터.’
더할 나위 없이 뿌듯했다.
* * *
청일 그룹 회장실에선 고함이 터졌다.
이게 다 몰리브덴 때문이다.
“몰리브덴 광산이 지구 반대편에 있을 때도 이렇게까지 구하기 어렵지 않았어!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몰리브덴 없으면 당장 생산을 멈춰야 하는 공장이 몇 군데나 되는지, 자네가 더 잘 알 텐데!”
한청호는 손에 집히는 대로 김봉남에게 던졌다.
재떨이였다.
사방으로 담뱃재를 날리며, 재떨이는 한쪽 벽에 부딪혀 와장창 깨졌다.
김봉남은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훔쳤다.
‘그 몰리브덴, 다른 기업들엔 까탈 안 부리고 잘만 팝니다. 우리한테만 안 파는 겁니다. 일부러!’
김봉남은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꿀꺽 삼켰다.
‘왜 우리한테만 안 파는지 그 이유를 모르니, 감히 섣불리 입을 열어 보고할 수가 없구나.’
때로는 입 닫고 보고 자체를 않는 게 더 나을 때가 있는 법이다.
청일 그룹에 몰리브덴을 일부러 안 파는 이유를 모른다는 것 자체가 무능력을 증명한다.
그땐 재떨이 대신 물이 가득 든 주전자가 날아올 게 확실하다.
‘아무리 또라이라고 해도 그렇지. 청일 그룹과 원수라도 지지 않은 이상, 그자가 굳이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나올 이유가 없는데.’
안 그래도 답답해서 젊은 광산주의 뒷조사를 샅샅이 마친 후였다.
‘청일 그룹과 얽힌 일 자체가 아예 없는데, 난들 알 게 뭐냐고.’
생각할수록 억울하다.
‘또라이가 괜히 또라이겠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니 또라이지. 또라이를 상대로 어쩔 수 없이 매일 찾아가 팔아 달라 설득하는 게 아니꼽고 더럽다. 사장이면 뭐 해, 에잇.’
그걸 또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니,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이 답답하다.
김봉남은 연신 식은땀만 훔쳤다.
변명조차 제대로 안 하니, 한청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지금 박태종이는 몰리브덴으로 크로몰리 강과 스테인리스강을 찍어 떼돈을 번다더라! 박태종이가 해낸 일을 왜 우리는 못 해! 뚫린 입 갖고 변명이라도 해봐!”
와장창.
이번에는 난 화분이었다.
그것도 일본 기업에서 선물로 받아 고이 모셔온 비싼 일본산 춘란 화분.
‘회장님이 꼭지가 돌 정도로 화나셨네. 애지중지하던 일본산 춘란 화분만큼은 절대 건들지 않으셨는데 말이야.’
김봉남은 한겨울에 비 오듯 쏟아지는 식은땀을 연신 닦고 또 닦았다.
죽을 맛이다.
‘어쩌겠어. 이 자리를 보전하려면 아니꼽고 더러워도 회장님 눈밖에는 나지 말아야지. 참아야지.’
사장이면 뭐하누.
회장님 앞에는 결국 봉급쟁이 직장인인 것을.
한참을 씩씩대던 한청호.
그가 벌컥벌컥 소리가 나도록 급하게 냉수를 마셨다.
드디어 한청호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길었던 화풀이 시간이 끝나고, 이제야 대화의 시간이 돌아왔다.
“그래, 새파란 애송이 하나 구워삶지 못하면서 지금까지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닌 거야? 자세하게 말을 좀 해봐, 이 답답한 친구야.”
여태 눈치 보던 김봉남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회장님, 저는 할 만큼 다 했습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트럭 몰고 광산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찾아갈 때 빈손으로 갔으니 허탕을 치고 돌아오는 것이겠지.”
“사정이 이리 급박한데 제가 미쳤다고 빈손으로 갔겠습니까? 당연히 두둑한 봉투를 들고 찾아갔지요.”
“그렇다면 돈이 부족한 것이겠지. 돈으로 못 뚫을 곳이 어디에 있다고.”
김봉남은 고개를 저었다.
“말도 마십시오. 정치 자금 건네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청와대와 군부대까지 전부 돈으로 뚫었어. 내 앞에서 돈으로 못 뚫을 곳이 있다는 개소리는 하지를 마.”
“말단 직원들까지 돈 봉투를 죄다 거절합니다.”
동생이 경리 엉덩이 좀 만졌다고 저만 보면 눈 부라리면서 곡괭이 들고 뛰어오거든요.
이걸 말하면 동생이 바로 잘릴 테니 또 말 못 하고.
한청호는 혀를 찼다.
“돈다발을 들고 가서도 제대로 꼬여내지 못한 자네 입심이나 반성하게.”
“지금 몰리브덴으로 떼돈을 벌 텐데, 그깟 푼돈이 눈에 들어올 리 있겠습니까?
“목에 기브스한 것처럼 빳빳하게 구는 거물급 정치인들도 돈 박스 들고 가면 버선발로 뛰어나와 손부터 잡는다.”
“박스째로 가져다줘도 싫다고 고개를 돌립니다.”
“돈 박스까지 마다한다고?”
한청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돈이 안 되면 여자라도 붙여보던가.”
“제가 여잘 안 붙여봤겠습니까? 끄떡도 없습니다.”
“거기가 강원도라며? 가는 길 험하다고 예쁜이들이 안 간대? 최고급으로 붙여. 거 가수나 탤런트. 보기 좋은 애들 있잖아.”
“가수부터 탤런트, 모델에 아나운서까지 전부 끌고 갔죠. 전부 물바가지 맞고 울면서 돌아갔습니다.”
이쯤 되자 한청호조차 기가 찼다.
“그 광산주라는 놈, 한창 팔팔한 20대 남자라고 하지 않았나?”
“결혼도 안 했습니다. 근데 눈 한 번을 안 깜빡입니다.”
“그 새끼, 고자 아냐?”
“저도 그 점이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한청호는 턱을 쓰다듬었다.
김봉남은 제법 수완이 좋은 자다.
오죽하면 사고뭉치 동생을 부사장 자리에 앉히는 것마저 눈 감아주고 있을까?
웬만해서는 믿고 맡길 수 있는 능력 좋은 놈이라, 이처럼 속수무책으로 털린 경우는 처음이었다.
“사채업자를 들쑤셔 보는 건 어떤가? 사업한다는 놈이라면 사채 한 푼 안 빌렸을 리 없으니까.”
“제가 왜 그 생각을 안 해봤겠습니까. 그놈은 정말 사채 한 푼을 안 빌렸답니다.”
“사채를 안 빌렸다고? 그럼 은행은?”
“은행 대출도 없답니다. 너무 깨끗합니다.”
한청호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광산 운영한다는 놈이 사채도 안 쓰고, 은행 대출도 안 쓴다고? 그게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그게 사실인 걸 어떡합니까?”
“심지어 재벌이라는 나도 사채 쓰고, 은행 대출도 당길 수 있을 만큼 당겨쓰는데?”
한청호는 고개를 갸웃댔다.
“알아주는 부잣집 자식인가? 어디 재벌의 숨겨놓은 자식 놈이라거나.”
“전혀 아닙니다. 달동네 판잣집에서 살다가 10만 원에 집이 철거되고 길바닥에 나앉을 뻔했다던데요. 반년도 채 안 된 일입니다.”
들을수록 가관이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소리다.
한청호는 표정을 굳혔다.
“자세히 말해 봐. 하나도 빠짐없이.”
* * *
태수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들은 한청호는 헛웃음을 지었다.
-도박판에서 15년이나 굴러다니던 폐광산을 10만 원에 사들여 몰리브덴 광맥을 찾아냈다.
-8.3 사채 동결조치를 이용해 알짜배기 대양 중석과 대양 시멘트를 꿀꺽했다.
-미국 몰리브덴 석출 중단 이후 몰리브덴으로 벼락부자가 되었다.
-사채는커녕 은행 대출 하나 없이 몰리브덴 제련 시설 및 광부들을 수급했다.
헛웃음이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다.
“황당할 정도로 운이 좋구나. 아니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거나.”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가 없는 업적들이다.
한청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되겠다. 내가 직접 가봐야겠다.”
이쯤 되니까 궁금해서라도 한번 봐야겠다.
그 난공불락이라는 운 좋은 몰리브덴 광산주, 어떤 놈인지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판단하지.
“기사 대기 시켜.”
강원도까지 먼 길 달려가게 만든 값, 내 톡톡히 받아낼 테다.
* * *
태수는 송진구가 보내온 땅문서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벌써 대치동 땅 1만 4천 평을 더 사들였다. 확실히 송진구가 대단하긴 하구나. 서울로 돌아간 지 얼마나 됐다고.’
덕분에 태수에게도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다.
몰리브덴이 날개 돋친 듯이 팔리고 있는 것을 즐길 마음의 여유는 덤이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단정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40대 남자가 들어왔다.
“금산 화학에서 왔습니다. 장준용 회장님께서 감사의 인사를 전하셨습니다.”
남자는 품에서 명함을 꺼내 태수에게 건넸다.
금빛이 번쩍이는 특별한 명함으로, 뒷면에 만년필로 <금산의 장준용이 빚을 하나 졌소.>라고 적혀 있었다.
“이걸 가지고 찾아오시면 회장님께서 청 하나 들어주시겠답니다.”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좋은 건 마다하지 않는 태수였다.
빈말로도 한 번쯤 사양하는 법이 없었다.
명함을 전한 비서는 그런 태수를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꽤나 호탕한 자로군. 눈빛만 봐도 범상치 않은 인재라는 걸 알겠어. 흥미롭구나. 회장님께서 보시면 무척 좋아하실 것 같군.’
비서는 태수가 썩 마음에 들었다.
“장 회장님께서는 이참에 정기적인 납품 계약을 맺고자 하십니다. 약소하지만 이건 인사 차원으로.”
남자는 품에서 두둑한 봉투도 건넸다.
“거절하시면 장 회장님께서 무척 섭섭해하실 겁니다. 성의니까 그냥 받아주시지요.”
“그러죠. 이것도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걸?
태수가 받은 봉투를 비서의 손에 도로 쥐여 주는 게 아닌가.
봉투를 되돌려 받은 비서는 의아했다.
“감사히 잘 받으신다면서 이걸 왜?”
“회장님을 대신해 강원도까지 직접 찾아오셨으니,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잖습니까.”
“허-, 이게 얼만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봉투를 받은 즉시 되돌려줬는데, 얼만지 알 리가 있나.
태수는 씩 웃었다.
“대신 당신 명함과 바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