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청일 그룹에서 나왔소(2)
청일 화학 사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형님!”
봉두난발 거지꼴을 한 김정남이 몸 여기저기에 붕대를 칭칭 둘러 감고 뛰어왔다.
일부러 보란 듯이 대충 감고 온 게 한눈에 보인다.
결재서류를 확인하던 김봉남은 눈썹을 찌푸렸다.
“꼴이 왜 이 모양이야? 이번엔 또 무슨 사고 쳤어?”
“형님, 제가 사고를 치긴 무슨 사고를 쳐요. 하나뿐인 동생이 이 꼴로 돌아왔는데, 어떻게 자초지종 하나 안 물어보시고. 저 섭섭합니다.”
“보나 마나 또 예쁜 여자랍시고 손대다가 얻어터진 거겠지.”
“······.”
정확하다.
하지만 김정남은 억울했다.
“저를 뭐로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형님, 전 몰리브덴 사러 무려 강원도! 영월군! 상동! 에 있는 광산! 까지 다녀온 사람입니다.”
“몰리브덴은 얼마나 사 왔어?”
“······안 판답니다.”
그러면 그렇지.
이놈은 어떻게 가는 곳마다 일은 그르치고, 원성만 산다.
‘어깨 펴고 살라고 그럴듯한 명함 하나 들려 자리에 앉혀놨더니. 하필이면 지금 이 시기에 몰리브덴을 두고 사고 치다니.’
김봉남은 옆에 서 있던 비서를 노려봤다.
“누가 이 물건 강원도까지 보냈어?”
“사장님 앞으로 몰리브덴 광산에 직접 가서 판매망 뚫어오란 회장님 지시가 있으셨단 걸 아시고는······. 죄송합니다. 설마 거기까지 가시겠나 싶어 안일했습니다.”
일 잘하던 비서가 허리를 굽혀 사과한다.
철딱서니 없는 동생을 보면서 김봉남은 혀를 차야 했다.
“자네가 사과할 일이 뭐 있나? 다 이 물건이 변변치 못한 탓이지.”
“형님!”
“쯧쯧쯧, 거기까지 갔으면 제대로 사 오던가, 제대로 사 오지 못할 거면 가질 말던가.”
“형님, 정말 억울합니다.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해보고 멱살부터 잡혔어요.”
김정남이 스스로 멱살 잡히는 시늉을 한다.
“이렇게 잡혀서 맨바닥에 요렇게 내동댕이쳐졌어요! 어이쿠! 거기다 멍석말이 하듯이 이렇게 데굴데굴 굴려지면서······.”
아주 실감 나게 사장실 땅바닥까지 구르는 김정남이다.
오랜 세월 고자질을 일삼느라 연기 레벨이 높은 탓에, 상황이 훤히 보인다.
“형님, 그 새끼들이 얼마나 험악한지 아세요? 이 동생, 까딱하면 그대로 이승 하직할 뻔했다니까요?”
“힘쓰는 놈들 여럿 대동하고 갔다면서? 어쩌다 멱살을 잡혀?”
“그쪽도 광부들을 아주 바글바글 끌고 왔으니까 그랬죠. 중과부적이었습니다. 그나마 싸움에 일가견이 있는 저니까 이 정도지, 같이 갔던 어깨들은 줄초상 나게 생겼습니다, 형님. ”
싸움에 일가견은 개뿔.
김봉남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네놈이 먼저 여자보고 군침 흘렸어, 안 흘렸어?”
“커피를 영 이상하게 타 와서 한마디 한 것뿐인데요.”
“손댔어, 안 댔어?”
“엉덩이만 살짝. 근데 진짜로 그걸로 끝이에요. 속옷이라도 벗겨봤으면 제가 이리 억울하지도 않아요.”
“에라이!”
김봉남이 들고 있던 결재 서류를 탁 덮었다.
안 그래도 일이 복잡해서 힘들어 죽겠는데, 하나 있는 동생이 저 모양이라니.
“회장님이 신신당부하신 일을 여자한테 지분대느라 경솔하게 그르쳐 놓고, 뭘 잘했다고 징징대고 있어! 당장 네 방으로 꺼지지 못해?”
“형님!”
“회장님한테까지 내 직접 이 일을 보고 드려야겠어? 그땐 그 자리, 보전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갑니다, 가요! 정말 너무하십니다, 형님! 저 진짜 서러워요!”
김정남은 억울해하면서 사장실을 나섰다.
한심한 동생의 뒷모습을 보던 김봉남.
동생을 나무라기는 했지만, 속이 영 안 좋다.
암만 부족한 놈이라도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다.
제 딴에는 형 일을 도와주겠다고 강원도까지 다녀왔다지 않나.
그런 기특한 놈을 감히 해코지하다니.
“여직원 엉덩이 한 번 만졌기로서니, 광부들로 둘러싸 개망신을 줘? 이런 고얀 놈이 있나.”
김봉남은 생각할수록 속이 부글댔다.
“어디 감히 청일 그룹에 성깔을 부려? 후환이 어떤 것인지 내 똑똑히 보여주마. 건방진 새끼.”
김봉남은 비서에게 말했다.
“차 대기 시켜! 지금 당장 강원도로 간다!”
“네.”
“어깨들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불러. 경찰과 검찰에도 연락해 놔. 그 새끼들 싹 잡아들이게. 얼을 쏙 빼놓을 땐 권력의 힘도 곁들여야지, 멍청하게 어깨들만 끌고 갔으니 저 꼴이 난 거야.”
“알겠습니다.”
몰리브덴 판매망을 뚫는 김에, 버르장머리 없는 놈 버릇도 한 번 제대로 고쳐주지.
그때였다.
따르릉.
비서가 전화기를 건넸다.
“회장님입니다.”
“회장님이?”
전화기를 들자마자, 한청호 회장의 고함이 들려왔다.
-몰리브덴 납품 계약은 왜 아직 소식이 없어! 강원도까지 갔다 왔다는 놈이 왜 빈손이야!
“죄송합니다. 이번엔 제가 직접 강원도로 가겠습니다.”
-지금 몰리브덴이 없어서 공장이 멈추게 생겼어! 어떻게든 회유해! 몰리브덴 받아와!
“사장님, 몰리브덴이 거기에서밖에 못 구하는 것도 아닌데······.”
-그럼 자네가 다른 데서 구해보던가! 전 세계가 몰리브덴 없다고 이 난린데, 무슨 수로? 비행기 타고 가려면 가! 사장 자리부터 내놓고!
“······.”
김봉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미국이 갑자기 몰리브덴 석출 중단만 안 했어도 이런 상황은 안 왔을 텐데.
-뭘 꾸물대고 있어! 당장 가서 납품 계약을 따 와! 계약서 받아오기 전까진 서울에 얼씬댈 생각도 하지 마! 거기서 뼈를 묻는 한이 있더라도 계약서부터 가져와!
“회장님!”
-자네가 잘하는 거 있잖아! 돈으로 찌르고, 여자로 쑤시고, 말로 꾀어내고, 어깨들로 뭉개고!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달까지 몰리브덴 최소 30톤, 받아 와!
대답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김봉남은 길고 긴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지. 개인적인 감정은 뒤로 미뤄두고 우선 몰리브덴 계약을 따내는 것에 집중하는 수밖에.’
결정했다.
회사 일이 우선이다.
지금 자리보전하느냐 마느냐 하는 마당에 자존심 따질 때가 아니다.
‘계약서를 따낼 때까지 굴욕을 감내한다. 개인적인 원한은 그 이후에 풀어도 늦지 않아.’
옆에서 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찌할까요? 회장님 진노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비행기 표 끊을까요?”
“강원도로 간다.”
“어깨들을 몇이나 부를까요? 버스로 데려갈까요? 강원도 지검이랑 경찰청 어디까지 손을 쓸까요?”
김봉남은 고개를 저었다.
“어깨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워. 아가씨들로 불러. 가수, 탤런트, 아나운서, 모델. 취향별로 골고루 골라서 강원도로 보낸다.”
김봉남은 외투를 입으며 눈을 빛냈다.
“돈 봉투 준비해. 금액 두둑하게 넣어서 여러 개 준비해. 사과 박스도 가져간다.”
“사과 박스까지요? 그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거물급 정치인도 아니고.”
“회장님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지시하셨다.”
김봉남은 착잡하게 말했다.
“전력투구로 계약을 따낸다.”
이번엔 회유다!
* * *
오늘도 태수는 사장실에서 결재 서류를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전 세계적으로 몰리브덴이 날개 돋친 듯이 팔리니, 자연히 태수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피곤하구나.’
요즘 태수는 연일 과로하고 있었다.
태수가 운영하는 광물 수출 전문 무역회사인 태양 상사는 순식간에 급성장했다.
특히 강남 대치동 땅을 본격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하면서 피로는 심각해졌다.
서울과 강원도를 오가느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를 지경이었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경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따끈하게 데워온 우유 한 잔을 태수의 책상 위에 슬쩍 올린다.
“사장님, 송진구라는 분이 찾아오셨어요.”
“송진구?”
명동 큰손 장말동 밑에서 일하는 그 사채업자?
그자가 여기까지 찾아올 일이 있나?
“지금 어디 있습니까?”
“어이, 또라이. 잘 있었나?”
송진구가 사장실 문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떼돈을 번다고 서울까지 소문이 자자하던데. 어째 사무실에는 돈을 영 안 쓴 모양이야. 이야, 이거 한 10년은 된 가구 아냐?”
사채 수금하러 다니면서 물건 감정에는 도가 튼 송진구였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요즘 강남에 땅 사러 다닌다며?”
송진구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여전히 사무실 집기가 얼마나 하는지 눈으로 훑어보면서 말이다.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저습지. 작물은 제대로 자라지 않고, 자갈과 돌만 많아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황무지.”
송진구는 씩 웃었다.
“대치동 일대를 싹쓸이하고 다닌다던데.”
장말동은 정보 상인이기도 하다.
전국에 사채 안 뿌린 지역이 없다고 일컬어지는 우리나라 최고의 지하 금융 우두머리이기도 하고.
‘장말동이 냄새를 맡았군.’
굳이 숨길 생각은 없었다.
“맞습니다. 돈이 남아돌기에 땅 좀 사놓고 있죠.”
“조금 정도가 아니던데? 그깟 황무지 아무리 헐값이라지만 2만 평 넘게 사려면 돈 꽤 들었겠어?”
2만 평으로는 아직 한참 부족하다.
대치동 청일 아파트는 대지 237,900㎡, 약 7만2천 평에 달한다.
‘가능하면 그것보다 더 많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 때 제대로 사야지.’
태수는 대치동 청일 아파트 이상으로 지을 생각이었다.
“이야, 인생은 참 알 수가 없어. 10만 원짜리 차용증과 바꾼 광산에서 몰리브덴이 터지다니. 불과 반년 만에 땅부자로 다시 태어날 줄이야. 진짜 한 치 앞을 몰라. 그 누가 알았겠어? 킬킬킬.”
“여기까지 와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어르신이 은행을 설립하셨다.”
장말동이 결국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셨군.
박정환이 8.3 사채 동결조치를 결행한 까닭에 더이상 지하금융으로는 성장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다.
“장수은행이다. 본점은 당연히 명동이지.”
“축하한다고 전해주시죠. 서울에 갈 때 들러 인사드리겠습니다.”
송진구는 이거이거, 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야, 또라이. 너 최무룡이가 은행 설립하는 건 어떻게 알았냐? 어디서 들었어?”
“어르신이 은행 설립하는 것과 같은 이유일 텐데. 굳이 설명이 필요합니까?”
송진구는 고개를 저었다.
“왜 이리 까칠한 반응이야. 어르신이 날 보낸 건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함이다.”
“감사 인사요?”
“네 덕분에 박쥐 같은 놈들을 싹 다 색출했거든.”
송진구는 살기 어린 눈빛을 번뜩였다.
태수는 대번에 짐작했다.
‘이런. 피바람 부는 배신자 숙청이 있었군. 확실히 내가 귀띔한 덕분이다.’
긴급 명령으로 발동한 사채 동결조치였다.
발표는 8월 2일 오후 11시 40분.
사채 동결조치 발효는 8월 3일 0시.
고작 20분 만에 사채를 휴짓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극단적인 조치였다.
‘장말동은 내가 열흘 전에 말해준 덕에 사채를 일부나마 회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무룡은?’
최무룡은 어떻게 사채를 회수해서 은행 세울 자금을 보유하고 있었을까?
‘나는 최무룡을 찾아가지 않았고, 대통령은 지하 금융을 완전 말살시킬 작정으로 정보를 완전히 통제했다.’
그렇기에 장말동은 생각했을 것이다.
‘장말동은 눈치챘겠지. 누군가 최무룡에게 자신의 동향을 보고하는 자가 있다고.’
그렇게 피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작심한 장말동의 눈을 피해갈 자들은 없을 테니까.
'장말동이 똑똑하긴 해. 하지만 한 가지를 몰랐어. 과거 최무룡은 사채 동결조치를 피해 초명은행을 세웠어. 최무룡에게 다른 끈이 있다는 뜻이야.'
전생에 장말동은 파산했고, 최무룡은 살아남았다.
정보 상인을 자처하는 장말동보다 최무룡의 정보가 더 빠르고 정확했다.
'그래도 장말동의 대처는 아주 훌륭하다. 턱 밑에 숨어 있는 칼만큼 위험한 것도 없으니까.'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송진구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넌 그것만 듣고도 어째 전후 사정을 다 이해한 눈치다?”
“이해 못 할 이유가 있습니까? 잘 알았습니다. 어르신이 당신을 보낸 뜻도 감사히 잘 받겠다고 전해주시죠.”
“날 보낸 뜻을 알겠다고?”
송진구는 황당해서 입을 쩍 벌렸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갔기 때문이다.
“어르신이 설명 안 해주셨습니까?”
“그걸 알면 내가 지금 이런 표정이겠냐?”
“그럼 돌아가면 어르신께 직접 물어보시죠.”
“······.”
송진구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태수는 송진구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르신이 제게 전하라고 보낸 물건이 있을 텐데요?”
“너 무당이냐? 그걸 어떻게 알았지?”
“당신을 보낸 뜻, 잘 받겠다고 했잖습니까.”
송진구는 혀를 내둘렀다.
“똑똑한 새끼. 받아라.”
송진구가 품속에서 문서 꾸러미를 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