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28화 (28/230)

28. 청일 그룹에서 나왔소(1)

요즘 태수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광산 일은 물론이고, 포항 철강이 의뢰한 학교 일도 틈틈이 챙겨야지, 강남에 땅도 사야지.

태수의 손을 거치는 일이 워낙 많았다.

“청일 그룹에서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아직까진 잠잠하네.”

청일 그룹만 쏙 빼놓고 귀한 몰리브덴을 팔고 있다.

한청호 쪽에서 그걸 두 손 놓고 있을 리 없었다.

“청일 그룹에서 누가 오느냐, 어떻게 나오느냐가 기대되는군.”

이왕이면 한청호, 한일권이 왔으면 참 좋겠는데.

이 먼 강원도까지 엉덩이 무거운 사람들이 올 리 없으려나.

그때였다.

한수가 급히 달려왔다.

“형.”

“어. 무슨 일이야?”

“청일 그룹에서 사람이 왔어.”

“그러냐.”

태수는 심드렁했다.

한수는 진지하게 말했다.

“형, 하나만 먼저 물어보자.”

“뭔데?”

“청일 그룹과 일부러 척 지는 이유가 뭐야?”

“눈치챘냐?”

“당연하지. 일부러 청일 그룹만 쏙 빼고 팔잖아.”

역시 안기부 송곳, 날카롭네.

“청일 그룹은 재벌 기업이야. 재력도, 권력도, 영향력도 막강하지. 형은 두렵지 않아?”

“두려워? 뭐가?”

태수는 씩 웃었다.

“내 몰리브덴 내 맘대로 판다는데, 지들이 어쩔 거야?”

태수는 한수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한수야, 세상에 절대적인 갑은 없어. 갑과 을은 상대적인 거야. 상황에 따라, 입장에 따라, 필요에 따라.”

태수는 말했다.

“저쪽은? 당장 몰리브덴이 없으면 공장을 멈출 수밖에 없어. 우리는? 청일 그룹에 아니어도 몰리브덴 팔 곳이 넘쳐나지.”

“음······.”

“지금은 누가 갑인 것 같으냐?”

한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적당히 원한 안 질 정도로 팔자. 그게 신상에 이롭잖아. 왜 쉬운 길 두고 험한 길로 가려고 그래?”

한수가 걱정하는 마음을 이해한다.

태수가 복수심을 불태우는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저렇다.

괜히 청일 그룹과 척을 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다.

하지만 태수는 아니었다.

“갚아야 할 빚이 있어. 뼛속 깊이 새겨진 빚이.”

너를 비롯해 아버지, 어머니, 내 아내와 자식들까지 전부.

한일권, 한청호 손에 죽었거든.

이런 원수를 두고 어찌 쉬운 길로 피해 가란 말이냐.

눈만 감으면 청일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고, 귓가에 속삭이던 한일권의 이죽거림이 아직도 생생한데.

‘비겁하게 피하지 않는다. 힘이 생길 때까지 숨죽여 지낼 생각도 없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서슴지 않고 엿을 먹여줄 거다.’

그런 이유로 청일 그룹에는 일부러 몰리브덴을 팔지 않았다.

청일 그룹에 복수를 결심할 때부터 정해진 길이다.

재벌과 맞선다는 게 어찌 쉽겠는가.

그 길이 험로(險路)라는 걸 모를 리 없는 태수였다.

“한수야, 난 청일 그룹을 두고 타협할 생각 없어. 앞으로도 청일 그룹과 손잡을 일은 죽어도 없을 거야.”

청일 그룹을 산산이 박살 내겠다고 다짐했다.

죽어서도 복수한다는 맹세했다.

“청일 그룹이 재벌이라고, 굽힐 이유 없고, 눈치 보고 숨을 생각도 없다. 내 뜻대로, 내 방식대로 돌파할 거야.”

그 집안이 풍비박산 날 때까지.

“형.”

“형만 믿어.”

태수는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동생을 바라봤다.

태수의 각오가 너무도 대단하여 한수는 더 이상 설득할 생각을 접었다.

“찾아온 사람, 청일 화학 부사장이래.”

“청일 화학 부사장?”

과장이나 부장도 아니고, 부사장?

생각보다 꽤 윗선이 움직이셨는데?

‘지금 청일 화학 부사장이 누구였지? 김봉남? 홍남표? 정우식?’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난다.

게다가 태수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에 청일 화학 사장을 지냈던 인물이라면 모를 수도 있다.

‘그거야 만나보면 알 일이고.’

태수는 하던 일을 멈추고 한수를 보았다.

“그 작자, 어디 있어?”

“당연히 사장실에서 기다리고 있지.”

“사장실? 한수, 네가 들여보냈어?”

“그럴 리가. 청일 그룹에서 나왔다면 문도 열어주지 말라고 엄포 놓은 건 형이거든? 검은 양복 입은 덩치들이 어깨로 들이받아 문 따더라.”

“어쭈? 어깨를 대동하고 들이닥쳐?”

“어떡할까?”

“대놓고 시비를 걸러 온 놈을 어떡하긴 뭘 어떡해? 똑같이 맞아주면 그만이지.”

태수는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피식 웃었다.

“한수야, 광산에 가서 광부들 좀 불러와라. 곡괭이 챙겨서.”

그쪽이 힘으로 위협하는데, 이쪽도 가만히 당할 순 없지.

여긴 널린 게 광부고, 그들은 돌벽도 깨부수는 터프한 상남자들이다.

그쪽은 고작해야 몽둥이를 준비할 때, 이쪽은 곡괭이에 오함마는 기본이다.

단박에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한수는 씩 웃었다.

“알았어. 맡겨둬.”

태수는 손바닥을 탁탁 털면서 사장실로 향했다.

‘어떤 작자인지, 일단 면상 구경부터 해볼까?’

태수는 사장실로 향했다.

* * *

사장실에선 경리를 보는 여직원 하나가 쩔쩔매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검은 양복 입은 험악한 사람 여럿을 제 뒤에 병풍처럼 두르고, 마치 조폭 두목이나 된 것처럼 온갖 똥 폼을 잡고 있는 40대 중년 남자 말이다.

“아가씨가 커피를 영 못 타네. 이걸 마시라고 내놨어?”

“죄송합니다.”

분명 둘 둘 하나로 타오라고 해서 타왔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아가씨 때문에 입맛을 완전히 버렸는데, 어떻게 책임질 거야? 응?”

청일 화학 부사장은 음흉한 눈빛으로 경리의 온몸을 샅샅이 훑어내렸다.

끈적한 눈길이 닿을 때마다 기분이 더러워서 경리는 작게 몸을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거 죄송하다는 말만 하지 말고. 말 대신 다른 거로 책임져 줘야지. 좋은 얼굴, 좋은 몸매 두고 왜 어렵게 가?”

부사장의 두툼한 손이 경리의 엉덩이를 슬슬 어루만졌다.

경리는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손바닥은 여전히 엉덩이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확실히 강원도 깡촌에서 썩기 아까운 얼굴이야. 어때, 오빠랑 같이 홍콩 갈래? 비행기 태워 줄게.”

엉덩이를 거쳐 아래로, 빙 돌아 앞으로 차근차근 전진하는데.

“이, 이러지 마세요.”

“좋으면서 앙탈은.”

그때, 이미 활짝 열려진 문을 일부러 쿵 소리 나도록 걷어차는 태수.

태수가 사무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앙탈 같은 소리 하네.”

“사장님!”

경리가 반색했다.

태수는 성큼성큼 걸어와서 여직원 엉덩이에 달라붙은 손을 홱 치워냈다.

청일 화학 부사장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한창 좋을 때 눈치도 없이.”

태수가 눈썹을 와락 구겼다.

태수는 경리를 보며 물었다.

“이 작자가 이렇게 했습니까?”

갑자기 태수가 부사장의 엉덩이를 우악스럽게 주물렀다.

“지, 지금 뭐, 뭐 하는 짓이야?”

부사장은 물론, 검은 양복들까지 아연실색했다.

기겁한 건 경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수는 태연하게 물었다.

“분명 이렇게 앞으로 나갔던 것 같은데. 맞습니까?”

태수의 손이 허벅지를 타고 바지 앞섶까지 갈 때였다.

“이, 이 미친 변태 새끼가! 징그럽게 어딜 만져!”

부사장이 화들짝 놀라 태수의 손을 치워냈다.

태수는 부사장을 보며 말했다.

“좋으면서 앙탈은.”

“뭐, 뭐야?”

“댁이 그랬잖습니까. 틀립니까?”

“이런 미친 새끼가! 내가 누군지 알아? 너 이 새끼, 지금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당신보다 젊고 잘생긴 내가 대충 건드렸는데도 치를 떠시네. 우리 경리는 오죽했겠습니까? 우리 경리에게 사과하시죠. 그럼 저도 똑같이 사과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경리가 태수의 팔을 잡았다.

“사장님, 그만 하세요. 전 괜찮아요.”

태수는 경리를 돌아보았다.

경리는 활짝 웃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제 대신 시원하게 되돌려주셨으니까 전 그걸로 만족합니다. 사장님이 사과하는 게 훨씬 싫어요. 차라리 저 작자한테 사과 안 받고 말지.”

“뭐, 그럽시다. 뜻대로 하죠.”

태수는 경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 나가 있어요.”

경리는 고마운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 후다닥 달려 나갔다.

청일 화학 사장은 이내 음흉하게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아하, 아까 그 예쁜이, 설마 자네의 이거였나?”

태수는 씩 웃으며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김정남은 손가락을 흔들며 웃었다.

“성질머리 하곤. 난 청일 화학 부사장이야. 우리 형은 청일 화학 사장 김봉남이고. 이게 무슨 뜻인지 알지?”

태수는 하도 같잖아서 피식 웃었다.

김정남은 껄껄 크게 웃었다.

“알아들었으면 됐어. 고작 여자 때문에 꼴같잖게 자존심 부리지 말고. 계약서나 가져와. 내가 큰맘 먹고 도장 찍어주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

김정남은 거만하게 말했다.

태수는 청일 그룹의 대응이 영 실망스러웠다.

“귀한 시간만 낭비했군.”

“애들아.”

김정남이 눈짓하자, 검은 양복을 입은 어깨들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태수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이, 형씨, 어디가려고? 계약서 작성해야지.”

“보자 하니 귀한 분께 반말을 찍찍 뱉던데, 깡이 제법 좋으신가 봐?”

“앉아. 부사장님 말씀 아직 안 끝나셨다.”

우두둑, 우두둑.

어깨들이 일부러 손가락 관절을 꺾고, 목을 좌우로 돌리고, 어깨를 휙휙 돌리며 요란하게 위협한다.

손에는 몽둥이 하나씩 들고 있다.

김정남은 싱긋 웃었다.

“좋은 말 할 때, 몰리브덴 납품 계약서에 도장 찍어. 그리고 저 아가씨 나한테 도로 보내고. 그럼 이 무례는 눈 감아 주지.”

그때였다.

벌컥.

사장실 문이 열리면서 곡괭이와 오함마를 든 광부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한겨울에 웃통까지 까 벗고, 곡괭이질로 단련된 차돌 같은 근육을 뽐내는 상남자들이었다.

“느그들 여기서 지금 뭐 하냐? 누구한테 몽둥이를 들이밀어?”

광부들은 검은 양복에게 곡괭이를 겨누며 다가왔다.

검은 양복들은 어쩔 수 없이 뒷걸음질 쳐 태수에게서 멀어졌다.

광부들은 눈을 부라렸다.

“여가 어디라고 똥개가 짖어 싸? 금마 주댕이를 확 마!”

“우리 귀여운 경리 궁댕이를 찰흙마냥 조물딱 댔다는 새끼가 뉘시냐? 낯짝 구경부터 좀 하드라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 짝을 찰흙마냥 조물 댔으믄, 그 짝 대가리를 찰흙마냥 으깨 불면 되는 것이제.”

“뭔 말이 그리 많어야. 남자는 말 많으면 못 쓰는 법이제. 일단 조져부러. 말은 그다음에 들어도 안 늦는 법이제.”

일당백은 되어 보이는 광부들이 곡괭이와 오함마를 들고 탁탁 흔들었다.

검은 양복들은 들었던 몽둥이를 슬쩍 내렸다.

잘게 떨리는 눈으로 김정남을 바라보며 입술만 달싹인다.

“부사장님.”

김정남은 똥 씹은 얼굴이었다.

곡괭이를 들고 험악하게 눈을 부라리는 광부들 사이로, 자그마한 얼굴이 쏙 튀어나왔다.

경리였다.

“사장님, 더 불러올까요? 여기 밖에 잔뜩 대기하고 있거든요!”

그 옆에서 빼빼 마른 얼굴도 하나 더 튀어나왔다.

홀쭉이였다.

“태수야, 다들 밖에서 자긴 왜 못 들어가냐고 불만이 대단하다. 일단 양복 입은 애들을 밖으로 끌어내면 자기들이 알아서 묻겠다고 야단인데, 어떡할래?”

검은 양복 입은 자들 안색은 흙빛이 되고 말았다.

광부 하나가 씩 웃으며 곡괭이로 땅 파는 시늉 하자, 다른 광부가 손바닥으로 슬쩍 묻고 토닥토닥 묫자리 정리하는 시늉 하며 껄껄댄다.

검은 양복들이 홱 고개를 돌려 김정남 입술만 쳐다본다.

“부사장님.”

김정남이 벌떡 일어났다.

“대화로 해결합시다. 우리끼리, 단둘이, 조용히.”

홀쭉이가 코웃음 쳤다.

“대화로 해결하겠다는 분이 양복 형님들을 잔뜩 이끌고 강원도까지 오셨네? 오자마자 대뜸 우리 경리를 괴롭혔겠다?”

“······.”

김정남은 말문이 턱 막혔다.

광부들이 곡괭이를 사납게 흔들어댄다.

“일단 우리 경리 아가씨한테 사과부터 하시고.”

“우리 사장님 위협한 것도 사과하드라고.”

“그래야제.”

“그거슨 당연한 순서. 아암.”

김정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속수무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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