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광산 인수(3)
태수는 바닥에 쓰러져 울고 있는 광산주를 일으켰다.
바닥에 잘 앉히고,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준다.
“크흐흑. 내 석회 광산과 시멘트 공장을 이렇게 빼앗기다니.”
“가족들은 무사합니까?”
“다행히 가족들을 무사합니다. 하지만 광산과 공장, 집까지 빼앗겼습니다. 당장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군요. 크흐흑.”
“가족들만 안 다쳤으면 됐습니다. 남은 빚이 많습니까?”
“아뇨. 이걸로 모든 채무 정산했습니다.”
다행이다.
태수 네와 달리 빚 때문에 도망 다녀야 할 상황은 안 생길 테니까.
'장말동이 급히 사채 회수한다고 적당히 봐준 모양이군. 지금은 시간이 돈이니까.'
태수는 광산주의 어깨를 두드렸다.
광산주는 능력 있는 자다.
석회 광산과 시멘트 공장만 봐도 그가 얼마나 광산 경영에 유능한 자인지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태수는 그를 이대로 놓치기 싫었다.
“다른 생각하지 마시고 3일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3일이요?”
“제가 한 번 사채업자를 만나보겠습니다.”
절망했던 광산주에게 희망이 생겼다.
“제 광산과 공장을 돌려주신다는?”
광산주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니지, 그건 불가능한 일이고. 우리 직원들과 인부들, 전부 성실하고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겐 여기가 일터이고, 희망입니다.”
광산주가 태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
“부탁드립니다. 저는 어떻게 돼도 좋습니다. 우리 직원들 뿔뿔이 흩어지지만 않게 해주세요. 한꺼번에 인수할 좋은 분을 찾아 어떻게 연결해주시면 안될까요?”
딸린 직원들을 생각하는 사장의 마음이 느껴진다.
아주 간절했다.
그때였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사장님! 걱정했습니다!”
사채업자가 떠나는 것을 보고, 직원들이 시멘트 공장안으로 달려들었다.
‘제법 직원들과 사이가 끈끈해 보이네.’
건실한 석회 광산에 시멘트 공장이라고 했다.
과연 사장과 직원들 사이엔 똘똘 뭉쳐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다.
직원들과 이토록 끈끈한 유대 관계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태수는 그를 더욱 높이 샀다.
"3일 후에 다시 봅시다. 사장님이 기운 차리셔서 직원들을 다독여 주셔야 합니다. 그때까지 어디 가시지 마시고요."
"크흐흑, 제가 너무 섣불린 금광 개발을 한다고 우긴 탓이죠. 제가 죄인입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다 잘 될 겁니다. 재기하셔야죠."
"크흑, 고, 고맙습니다. 말만이라도 정말 고맙습니다."
광산주는 태수가 고마웠다.
직원들을 서로 얼싸안고 오열하는 광산주를 뒤로하고, 태수와 한수는 공장을 나섰다.
“형, 어쩌지? 우리가 한 발 늦었어. 다른 광산을 알아봐야 하나?”
한수는 아쉬워했다.
조건이 이처럼 딱 들어맞는 광산은 없었기 때문이다.
“망했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었는데. 아깝다.”
한수와 달리 태수는 별로 아까운 기색이 아니었다.
한수는 그게 의아했다.
“형은 아깝지 않아? 실망한 표정이 아닌데?”
“아직 실망하긴 이르니까.”
태수는 시멘트 공장을 다시 보았다.
"장말동을 찾아갈 거야."
"뭐? 왜 또?"
"여기 광산과 공장, 인수해보려고."
한수는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생각하고 보니 말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한수, 너는 여기 남아 있어."
"난 왜?"
"저 능력 있는 광산주가 탐나서. 어디 도망 못 가게 꽉 붙들어 매."
"........"
"여기 기웃대는 놈들도 쫓아버리고. 알았지?"
"맡겨둬."
태수는 몸을 돌렸다.
“그럼, 난 잠깐 서울에 다녀오마.”
공장과 광산을 헐값에 인수하러!
내가 제대로, 확실히, 후려쳐서 사온다!
* * *
1972년 8월 2일 오후 11시 30분. 명동 장말동의 집.
깊은 밤에도 장말동의 집은 환하게 밝았다.
사채를 회수하는 부하들이 들락날락하느라 그렇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문턱이 닳도록, 하루에도 열두 번씩 부하들이 드나들었다.
열흘 동안 장말동은 찾아오는 사람들은 죄다 거절하고, 사채 회수에만 몰두했다.
째깍째깍.
벌써 11시 30분이다.
애송이가 말한 시각이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장말동은 버럭 소리쳤다.
“서두르지 않고 다들 뭐하는 게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지 않아! 아직 사채 회수 못한 놈이 송진구 말고 또 있느냐?”
전국 각지로 흩어졌던 놈들 중에 아직 몇몇이 도착하지 않았다.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감감무소식이다.
장말동은 발만 동동 굴렀다.
“송진구가 막 도착했다 합니다.”
“그놈보고 당장 들어오라 일러라!”
한복 입은 남자가 밖으로 나갔다.
널찍한 방안에 홀로 남은 장말동은 연신 부채질을 했다.
속이 타들어 가서 냉수만 벌컥벌컥 마셨다.
가뜩이나 마른 몸, 열흘 동안 반쪽이 된 장말동이다.
드르륵. 탁.
한복 입은 남자가 송진구와 함께 들어왔다.
장말동은 한복 입은 남자에게 물었다.
“사채는 어느 정도 회수했느냐?”
“시간이 워낙 촉박하여 60%정도 회수했을까 싶습니다.”
60%라.
채 반도 건지지 못할 것은 진즉 각오한 터였다.
그나마 다행인 소식이었다.
“어르신, 저 왔습니다.”
송진구는 얌전히 무릎 꿇고서 수거해온 돈과 문서들을 장말동에게 바쳤다.
“전국의 굵직한 기업들은 제가 직접 회수했습니다. 그밖에 자잘한 놈들은 따로 해결사와 건달들을 붙여 거둬들였고요.”
“수고했다.”
“당장 돈이 될 만한 것들로 추려왔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만족할 만큼 긁어오진 못했습니다.”
“고생했다.”
장말동은 돈과 문서를 따로 분류하며 금액을 살폈다.
마침 눈에 띄는 문서가 있었다.
“엥? 대양 중석과 대양 시멘트? 여긴 제법 건실한 곳인데? 광산과 공장을 통째로 가져왔구나.”
"금광 개발에 나섰다가 말아먹었습니다."
"오호라-, 그것 참 잘 되었구나. 평소라면 이건 제법 비싼 값에 팔아먹을 수 있었을 것을. 아깝구나. 하여간에 수고했다."
“참, 그곳에서 또라이를 만났습니다.”
“또라이?”
“왜 일전에 제 이름을 팔고 어르신과 만났던 그 또라이 있잖습니까.”
사채업자한테서 기어이 차용증을 받아 챙긴 놈!
뒷배 운운하며 이 모든 사단을 만들어낸 놈!
'정보가 거짓이기만 해보라지! 내 이 모든 손해를 전부 되갚아줄 것이야! 네놈, 곱게 죽진 못할 것이다!'
태수만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이를 갈게 되는 장말동이었다.
“그 애송이 또라이가 거길 왜 가?”
“광산주에게 볼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무슨 볼일?”
“사채 회수가 급한 나머지 그것까지는 잘······.”
송진구가 머쓱해하며 뒷머리를 긁었다.
장말동은 송진구가 가져온 문서를 다시 한 번 보았다.
‘그 또라이 놈이 무슨 볼일이 있었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장말동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걸 궁금해 할 때가 아니야. 사채를 회수해 왔으면 됐다. 신경 끄자.’
장말동은 들고 있던 문서를 잘 챙겨 금고에 넣어두었다.
한복 입은 남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시간 다 됐습니다.”
시계는 오후 11시 40분을 가리킨다.
송진구는 서둘러 라디오를 켰다.
치직. 치직-.
장말동은 입안이 바싹 타들어가서, 혀로 마른 입술을 핥았다.
송진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모두 귀를 기울여 방송에 집중했다.
-······한 이유로, 이를 간과할 수 없기에 정부는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 명령’을 발표한다. ······따라서 8월 3일 0시를 기해 모든 사채는 동결된다.
벌떡.
장말동이 비단 보료를 박차고 일어섰다.
눈을 찢어지도록 부릅뜬 채로.
“저, 저, 정말이다! 정말로 박정환이 사채 동결 조치를 발표했어!”
한복을 입은 남자 역시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 애송이가······. 진짜 뒷배가 있었단 말인가. 나조차도 짐작하지 못할 뒷배라니.’
송진구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 듣는 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사채가 동결되다니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차용증이 휴지조각이 된다는 말은 아니겠죠?”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장말동과 한복 입은 남자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8.3 사채 동결 조치.
정책의 주요 골자는 모두 세 가지였다.
첫째, 사채와 연관된 모든 채무관계는 72년 8월 3일을 기준으로 전부 무효화한다.
둘째, 정부가 2000억을 마련하여 기업이 은행에서 대출한 대출금 일부를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으로 전환토록 지원한다.
셋째, 평균 월 3.84%, 연 46%에 달하는 사채 이율을 월 1.35%, 연 16.2%로 낮춘다.
장말동은 눈을 감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일 그 애송이가 아니었다면, 난 정말로 파산하고 말았다.’
애송이가 자신만만하게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명동 큰손은 어떻게 은혜를 갚나,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하죠.
‘징글징글한 놈, 독한 놈, 배짱 좋은 놈, 맹랑한 놈. 정말로 이 장말동이가 애송이에게 은혜를 갚게 생겼군.’
덧붙여 차용증에 도장을 찍던 것도 기억났다.
무려 2천만 원짜리 차용증!
‘내가 덕분에 건진 재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정말로 그것까지 토해놓게 생겼구나.’
어쩔 수 있나.
장말동이가 제 입으로 한 약속을 어길 수도 없고.
“하하하핫! 그놈은 정말로 또라이다, 이 장말동의 인생에 최고로 손꼽히는 또라이야!”
사람들은 예측할 수 없는 자를 보통 또라이라고 부른다.
좋은 뜻이던 나쁜 뜻이던 간에.
그때였다.
누군가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짝귀였다.
“또, 또라이가 찾아왔습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태수가 장말동의 집 대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드르륵. 탁.
태수가 방에 들어섰다.
장말동은 여느 때처럼 비단 보료에 앉아 부채를 살랑이고 있었다.
한복 입은 남자 역시 한쪽에 서 있었고.
태수는 성큼성큼 걸어와 냉큼 방바닥에 앉았다.
“정부 발표는 잘 들으셨습니까?”
“그래. 네 말이 맞더구나.”
태수는 씩 웃었다.
“지난번처럼 단계 밟아가며 잡설을 늘어놓을까요, 아니면 단번에 본론으로 직행할까요?”
거침없이 훅 들어오는 태수.
장말동은 안 그래도 이래저래 신경 쓰느라 기력이 쇠할 대로 쇠한 터였다.
불확실한 정보를 믿는 것도 일이요, 그 가운데 열흘이나 사람들 채근해가며 사채 회수하는 것도 일이었다.
장말동은 습관처럼 부채를 탁 접었다.
“밤이 깊었다. 후딱 끝내버리자. 그래, 오밤중에 예까진 어인 일인고?”
“차용증 처리하러 왔죠.”
태수의 품속에서 차용증이 나왔다.
예상하던 터였기에 장말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금, 일시불로 달라고 했었지?”
“어르신, 다른 것과 바꾸고 싶습니다.”
“다른 것과? 무엇과 바꾸고 싶었을꼬?”
장말동은 눈을 빛냈다.
송진구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곳에서 또라이를 만났습니다.
-광산주에게 볼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장말동은 음흉하게 웃었다.
“대양 중석과 대양 시멘트를 말하는 것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