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부자의 꿈
아들이 90도로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한다.
“인사드립니다. 태양 건설의 시공 책임자 박철완입니다.”
“허-”
박철완이 제 아버지인 박태종에게 뭔가를 건넨다.
받고 보니 명함이었다.
“태양 건설 부사장? 철완이, 네가?”
명함을 읽고서 박태종은 입을 떡 벌렸다.
항상 군인답게 근엄하신 아버지가 저리 놀라는 모습은 난생처음 본다.
박철완은 머리를 긁적였다.
“포항 철강 사장님께서 많이 놀라셨나 봅니다.”
“포항 철강 사장님? 지금 아비보고 한 말이냐?”
“공적인 자리가 아닙니까. 저희는 지금 부자지간이 아니라 도급인과 하청인의 관계입니다.”
“허······.”
박태종은 고개를 홱 돌려 태수를 보았다.
장난스런 표정을 짓고 있으리란 예상과는 달리 태수는 의외로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강 사장,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 주시오.”
“보시는 그대롭니다. 재능이 출중한 아드님을 저희 회사로 영입했죠. 앞으로 사장님께서 의뢰하신 건설 현장을 총지휘할 겁니다.”
“건설이라고는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녀석이오. 그런데 뭐라? 현장 총지휘? 그게 가능하리라 보시오?”
태수는 박태종을 똑바로 바라봤다.
“어째서 불가능하다 단정 지으십니까? 단지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러는 박 사장님께서는 경험이 있으셔서 포항 철강을 지으십니까?”
그럴 리가.
한국에 종합 제철소 지을 기술자가 없어 전 세계를 뒤져야 했다.
얼마나 힘들게 일본 정부를 설득해 종합 제철소 기술 고문을 데려왔던가.
그 때문에 무려 3년이나 그 안하무인 일본산 망종을 참고 봐야 했다.
“제철소 지어 본 경험이 없으셔서 지금 제철소를 못 짓고 계십니까? 아니잖습니까.”
“그야 제철소 기술 고문이 있기에······.”
“사장님께서 제게 약속하셨죠. 우리에게도 기술 고문을 붙여 주신다고.”
“으음.”
박태종은 입을 다물었다.
“내 아들은 경우가 다르오.”
“그럼요. 경우가 아주 다르죠.”
뜻밖에 태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태종뿐만 아니라 박철완도 태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태수는 씩 웃었다.
“사장님께서는 제철소를 지을 자본금이 부족하고, 기술 고문은 일부러 뻗대고, 제철소뿐만 아니라 항구에, 도로에, 직원들 마을까지 만드셔야 했죠.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 그런데 우리 박철완 부사장님은?”
저요? 제가 뭐 어떤데요?
박철완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는 포항 철강에서 계약금 겸 착수금을 받았고, 공정률에 따라 지급을 약속받았습니다. 자본 문제는 박 사장님께서 직접 해결해 주신다고 약속하죠.”
“아니, 그건 내가······.”
“뿐만 아니라 일본 최고의 기술 고문이 순순히, 전심전력으로 학교 건설을 도와줄 겁니다. 막말로 제철소보다 학교 짓는 게 훨씬 쉽잖아요?”
“······.”
그건 그렇지.
박태종은 말문이 턱 막혔다.
태수는 씩 웃었다.
“그뿐입니까? 이미 만들어진 도로에 이미 완성된 숙소를 이용할 겁니다.”
“허······.”
“한마디로 우리는 맨땅에서 시작한 박 사장님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이죠. 그런데도 막무가내로 반대하실 겁니까? 단지 아드님이란 이유로?”
“으음.”
박태종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굳게 다문 입매는 고집스럽게 위로 향했다.
할 말은 없지만 인정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태수는 박철완에게 눈짓했다.
박철완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커다란 종이를 펼쳤다.
2절지 크기의 종이었다.
테이블 위에 종이를 펴자 빼곡하게 설명을 첨부한 설계도가 드러났다.
“이건?”
“우리 부사장님께서 4일간 밤새 구상하고, 보완하고, 첨부한 학교 건축 도안입니다. 이미 나와 있는 기본 설계를 바탕으로 시공 시 주의할 점과 중요한 부분을 따로 뽑았다는군요.”
“이, 이걸 철완이 네가 만들었다고?”
박태종이 새삼스럽게 아들을 보았다.
박철완은 진지한 눈으로 꼼꼼히 도안을 내려다봤다.
‘오늘 이 브리핑을 위해 3일 밤을 꼬박 새웠어. 기회는 단 한 번뿐이야. 아버지를 설득해야 해. 실력으로.’
박철완은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을 찾고, 건설 현장 직원들에게 일일이 묻고 다녔다.
심지어 평소에는 마주치기도 싫어하던 우시로다 기술 고문을 찾아가기까지 했다.
덕분에 요 며칠간 우시로다는 죽을 맛이었다.
하루 종일 제철소 건설에 매달렸다가 겨우 쉬려는데, 매일 밤 박철완이 찾아온다.
새벽까지 시달릴 대로 시달린 우시로다가 ‘내 잘못은 익히 알고 있으니 제발 좀 그만 괴롭히시오! 잠 좀 잡시다! 사람 잡겠소!’하고 울면서 방 밖으로 뛰쳐나가기까지 했다.
“···수돗물과 교실 마감 자재는 아이들의 건강과 직결됩니다. 때문에 우리 태양 건설은 이 부분에 대해 특별히 보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한참을 묵묵하게 아들의 설명을 듣던 박태종.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걸 고작 3일 만에 준비했단 말인가. 그게 정녕 가능한가?’
박태종, 본인이라면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정이라면 대한민국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해 왔거늘······.’
박태종은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내 아들이 인제 보니 날 닮았군.’
흡족한 웃음이었다.
포항 철강 사장으로서, 그리고 박철완의 아버지로서.
“···이상입니다.”
30분이 넘는 박철완의 브리핑이 끝났다.
박태종은 처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 건설 부사장의 브리핑, 잘 들었소. 특히 아이들을 생각해서 보완한 점들이 매우 인상적이었소. 짧은 기간임에도 준비를 많이 하셨소.”
박철완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아버지가 내게 존대를 해? 태양 건설 부사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얼떨떨했다.
본인이 먼저 아버지를 가리켜 ‘포항 철강 사장님’이라 칭했던 건 까맣게 잊은 것처럼.
“태양 건설에 대한 내 요구는 처음과 같소. 설계대로만 지으시오. 약속대로 자재 일부와 설계도 및 기술 고문을 제공하겠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태종은 아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소, 박 부사장.”
악수를 청하는 손이었다.
“포항 철강의 아이들이 공부할 학교요. 미래의 인재들이 자라날 곳이오. 조금의 소홀함도 있어선 안 될 것이오. 우리도 최대한 협력하겠소.”
박철완은 아버지의 손, 아니 도급인이자 협력 업체 사장의 손을 꽉 잡았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박 사장님. 경험의 부족함은 노력과 꼼꼼함으로 커버해 보겠습니다.”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는 더 중요하오.”
박태종은 진지했다.
“지진이 나더라도 무너지지 않는 곳, 천재지변이 나더라도 안전한 곳. 우리 아이들은 그런 학교에서 공부해야 하오.”
“명심하겠습니다. 일본의 내진 설계는 이미 숙지해 두었습니다. 그 부분을 좀 더 중점적으로 신경 써 짓도록 하겠습니다.”
“좋소. 내 믿어 보겠소, 태양 건설 박 부사장.”
“믿고 맡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포항 철강 박 사장님.”
두 부자는 악수했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도급인과 하청인의 협력 관계로.
‘철완이가 이렇게 듬직한 녀석이었는지 모르고 있었군.’
아들의 눈빛이 제법 야무지다.
느껴지는 기백도 대단하고.
‘내 아들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이 아비인 내가 아니라 저 젊은 친구일 줄이야. 이번에도 날 놀라게 하는군.’
박태종은 부자의 악수를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는 태수를 봤다.
‘요망한 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 아들놈을 홀랑 꾀어서 데려가다니! 이것 참, 우리 부자가 한꺼번에 맹랑한 놈과 엮이고 말았어.’
태수를 보는 박태종의 눈빛에는 흐뭇함이 깃들었다.
‘내 밑에서 내 아들을 키워 보겠단 심보로군. 이건 알면서도 당해 줄 수밖에 없다. 외통수야. 하나 내 마음에 쏙 드니 이것 참, 하하하!’
그래서였을까.
박태종은 드물게 짓궂은 표정으로 태수를 돌아본다.
태수는 흠칫했다.
‘아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돈 냄새가 폴폴 풍겨. 게다가 진해!’
이 양반은 사장실에 올 때마다 자꾸 돈 냄새 나는 걸 막 퍼 준다.
사람 마음 설레게스리.
박태종은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대학교까지.”
“네?”
“포항 철강 부속 공과 대학교. 태양 건설에 내 꿈을 맡기겠소.”
포항 철강 부속 공과 대학교.
일명 포철 공대.
포항 철강이 직원의 자녀들에게 우수한 시설과 최고의 교수진을 제공하기 위해 짓기 시작한 한국 최고의 공과 대학교다.
‘대박! 이걸 우리에게 짓게 한다고? 포항 건설이 짓지 않고?’
“아마 대학교는 당장 짓기 힘들 것이오. 그에 맞는 큰 부지를 확보하고, 건설 자금을 마련하다 보면 아마 10년 후부터 본격적으로 짓게 되지 않을까 싶소.”
맞는 말이었다.
본래라면 포항 철강의 제련소가 다 지어진 이후 몇 년이 지나서야 짓기 시작한다.
그렇게 1986년 12월 3일에 개교해 우수한 공학 인재들을 연이어 배출했다는 명문 대학교.
“땅덩이 좁고, 자원도 부족한 대한민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우수한 인재들에 기대는 방법뿐이오. 이를 위해 최고의 인재들을 키워 낼 대학교를 만들고자 하오.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박태종은 이미 예전부터 대학교를 짓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10년도 더 전에 계획을 세웠고, 미리 부지와 자금을 마련하기로 작정했으니.
“나는 철강에 몰두해 이 나라에 이바지하겠소. 그대들은 건설로 조국의 미래를 밝히시오. 할 수 있겠소?”
태수는 씩 웃었다.
‘호의는 거절하는 게 아니지!’
그렇다면 냉큼 받아야 하는 법!
“물론입니다. 태양 건설도 포항 철강이 꾸는 꿈에 동참하겠습니다.”
박철완은 아버지의 말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버지는 철강으로, 나는 건설로. 전혀 다를 거라 생각했던 우리 두 부자의 꿈을 함께 이룰 수도 있군요.”
“하하하! 내 꿈을 네가 이어받는다니, 아비로서도 더할 수 없이 좋구나.”
박철완과 박태종은 마주 보며 웃었다.
태수도 옆에서 활짝 웃었다.
털썩.
그때 박철완은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자꾸만 입꼬리가 헤실댄다.
박철완은 뻑뻑한 눈을 비비다, 조용히 눈을 감고 중얼댔다.
“해냈다.”
“고생하셨습니다, 박 부사장님.”
“아버지와 함께 꿈을······.”
말을 하다 말았다.
어리둥절한 사람들이 뒷말을 기다렸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드르렁, 쿠울-.
박철완에게서 익숙한 숨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은 동시에 풉 웃음을 터뜨렸다.
잠들어 버린 것이다.
“아마 며칠 밤을 꼬박 새웠을 겁니다.”
“그랬을 테지. 준비한 것을 보니 사나흘 만에 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소.”
한참이나 잠든 아들을 뿌듯하게 보던 박태종.
박태종이 태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포철 공대. 이것으로 아들 몫의 빚도 갚은 거요.”
“그렇게 하시죠.”
어쩌다 보니 뜻하지 않게 일 하나 더 땄다!
그것도 상상조차 못했던 왕건이로!
박태종은 기분이 좋았다.
“하하하, 마침 좋은 위스키가 있는데 다들 잠시 앉겠나?”
“아뇨,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됐습니다.”
지난번과 달리 태수 뒤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던 홀쭉이가 단호하게 고개 저었다.
박태종은 의외였다.
“자네라면 상당히 반길 줄 알았는데?”
“물론 포항 철강 사장님의 위스키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됩니다.”
“이유가 있나?”
“보시다시피 근무 중이라서 말입니다.”
홀쭉이가 깡마른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에헴, 제가 경호를 소홀히 할 수가 없어서 말이죠. 충성, 충성!”
“경호? 자네가 이 친구를? 하하하! 그것참, 뭔가 바뀐 기분일세.”
“그래서 말인데요. 이왕 내어 주시기로 한 위스키, 챙겨 가도 될까요? 이따 근무 끝나고 마시려고요. 그거 향이 끝내주던데요. 쩝.”
“하하하! 그러시오. 내 기꺼이 내어 드리지. 하하하!”
박태종은 참지 못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태수는 얼굴이 조금 붉어진 채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말았다.
‘부끄러움은 왜 내 몫이냐, 젠장.’
저 새끼, 일부러 저러는 게 틀림없다.
‘포항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전부 얻었다. 기대 이상으로.’
이제 서울로 가 볼까?
한수에게서 어떤 소식이 들어왔는지 확인할 겸.
‘괜찮은 광산은 찾았을까?’
밑바닥을 샅샅이 뒤져 쓸 만한 정보를 얻어 오는 게 한수의 특기!
얼마나 괜찮은 놈으로 골라 왔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