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인재 영입(4)
태수의 제안은 뜻밖이었다.
홀쭉이는 가만히 태수를 보았다.
“태수, 너랑 내가?”
“응.”
“동업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태수는 씩 웃었다.
“홀쭉아, 우리 같이 일하자. 동업도 좋고, 다 좋다.”
“술 취했냐?”
“싫으냐?”
홀쭉이는 말없이 술을 마셨다.
“생각 좀 해 보고.”
홀쭉이답지 않은 대답이었다.
홀쭉이는 태수가 사채업자에게 쫓겨 다닐 때도, 청일 그룹에 입사한 후에도 끝까지 태수와 함께했던 녀석이었다.
“홀쭉이 주제에 비싸게 굴기는.”
태수는 오랜만에 술이 거나하게 올랐다.
몰리브덴 떡밥을 던지러 왔다가 뜻하지 않게 학교 건설 계약도 따냈다.
원했던 것 이상으로 일이 잘 풀리자 기분도 같이 느슨하게 풀렸다.
그리고 앞에는 홀쭉이가 있고.
취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홀쭉이는 왠지 술이 썼다.
‘태수는 이제 내가 없어도 괜찮겠지. 배짱도 두둑하고, 제법 야무지게 일을 잘하고 있으니까. 깜짝 놀랐어.’
손이 많이 가던 어린아이가 훌쩍 커 버린 느낌.
홀쭉이는 그게 조금 섭섭했다.
‘박 사장도 함부로 건들지 못하던 일본인을 쥐고 흔들고, 저 거대한 건설 현장을 지휘하는 카리스마를 보고서도 박 사장에게 굽히지 않았어.’
대단했다.
너무 대단해서 거리감까지 느껴 버릴 정도였다.
‘협상은 또 어땠고. 내가 낄 여지조차 없었어. 박 사장 이상의 거물 같았어. 감히 나 같은 녀석이 친구라 말하기 어려울 만큼.’
홀쭉이는 씁쓸하게 술잔을 홀짝였다.
‘박철완이란 남자와는 부동산에 관해 대등하게 대화했지. 같은 한국말인데도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어. 태수는 오랫동안 공부해 왔던 거야.’
그래서였을까.
태수의 진가를 발견한 후로 기분이 묘하다.
‘나 혼자 뒤에 남겨진 기분이야. 버림받은 것처럼.’
태수가 훌쩍 자라 저만치 가 버린 것 같다.
친구로서 축하해 줘야 마땅한데, 왠지 외롭고 쓸쓸해졌다.
태수가 커 보였다.
거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홀쭉아, 뭐 걸리는 거 있냐?”
“나는 박철완처럼 순진하지 않아서 열심히 재고 따질 거야. 내 주제에 맞게.”
“나보다 조건 더 좋은 데가 있어? 그래도 나랑 같이 일하자. 의리가 있지.”
태수가 홀쭉이의 술잔을 채워 준다.
꼴꼴꼴.
“홀쭉아.”
“어.”
“고맙다.”
“뭐가?”
“끝까지 내 곁에 남아 있어 줘서.”
“싱겁기는.”
홀쭉이는 싱긋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나 앞만 보고 달렸었거든. 성공한다고, 은혜 갚는다고, 브레이크 고장 난 폭주 기관차처럼 달렸다. 그러다가 그대로 추락. 끝.”
한일권이 끊어 버렸지.
내 목숨을.
“추락? 갑자기 왜 그런 재수 없는 말을 하냐?”
“비유가 그렇단 소리야.”
가족들을 어찌 죽였는지 소상히 늘어놓으며 이죽이던 한일권의 얼굴이 생각난다.
태수는 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갚아야 할 빚이 있어. 너무 원통하고 분해서 오장육부가 갈가리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홀쭉이는 술을 마시다 말고 동작을 멈췄다.
태수의 눈을 보자 정말이란 걸 깨달았다.
쾅.
홀쭉이는 잔을 거칠게 내려놨다.
태수보다 더 화가 난 눈을 하고 있었다.
“미연 씨냐?”
“아니야.”
“그럼 누구냐? 그 시발 새끼가 누구야?”
“있어.”
차마 한일권이란 말은 못하겠다.
태수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어찌나 분했는지 꽉 다문 입술 사이로 피가 슬쩍 비쳤다.
그걸 본 홀쭉이도 덩달아 굳고 말았다.
“누구야? 대체 무슨 일인데?”
홀쭉이가 소매를 걷으며 화를 낸다.
“말만 해. 내가 그 새끼, 반 죽여 버린다.”
말만으로도 고마웠다.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직접 복수할 거다. 내가 당한 것 이상으로. 처절하게 밟아 놓을 생각이야.”
태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결연한 모습에 홀쭉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같이 한 힘 보태마.”
이런 의리 있는 놈 같으니라고.
이래서 내가 너를 못 버린다, 홀쭉아.
끝까지 내 곁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웠다, 친구.
태수는 아련한 눈으로 홀쭉이를 보았다.
“홀쭉아, 난 죽을 때까지 우리가 함께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거든?”
“당연한 소릴 입 아프게 하고 있어.”
태수는 그런 홀쭉이가 좋았다.
“이번에는 폭주 기관차처럼 안 달리고 너랑 같이 손잡고 천천히 가려고.”
“징그럽다, 새끼야.”
“주변에 좋은 거 있으면 구경하다 가고, 중간에 휴게소 들러서 맛있는 것도 사 먹으면서. 그렇게 즐겁게 같이 가려고.”
태수는 홀쭉이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러니까 나랑 함께 가자, 홀쭉아.”
“난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테이블 아래 있는 홀쭉이의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
태수는 그것도 모르고 활짝 웃었다.
“무슨 소리야, 너 없었으면 난 진즉에 무너졌어.”
“아냐, 넌 나 없이도 잘 해냈을 거야.”
성공을 말하는 거라면 그랬다.
돈 냄새 맡는 능력은 여전했고, 청일 그룹이라는 거대한 조직이 태수의 손발이 되어 줬으니까.
하지만 그뿐이었다.
“많이 외로웠다. 혼자 싸우니까 힘들고 지치기만 하더라. 아무도 없더라. 나랑 함께 울고 웃어 줄 사람이.”
“혼자 싸우기는. 난 늘 네 곁에 함께 있었는데.”
“그래서야. 네가 나와 함께 해 주고 있는 지금이 난 너무 좋다. 그냥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는 거, 알고 있냐?”
홀쭉이는 눈을 감았다.
“태수야, 난 많이 부족해. 잘하는 거라곤 술 마시는 것 말곤 없고. 넌 이런 내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거냐?”
“그래.”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자, 홀쭉아.”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늘 함께 있자고 약속해야 하는 걸까.
홀쭉이는 고개를 숙였다.
“못난 친구랑 함께 있다간 네 앞길에 걸림돌이 되고 만다. 2인 3각처럼, 너랑 비슷한 사람들끼리 같이 달려야 하는 거야. 난 네 발목만 붙들고 늘어지겠지.”
하하하, 태수가 크게 웃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홀쭉아. 2인 3각은 말이야, 서로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사람들끼리 함께 달리는 경기야. 100미터 달리기 속도 따윈 아무 의미도 없어.”
태수는 홀쭉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능력 있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더 필요해.”
“······.”
“내 일은 능력만 보고 아무에게나 맡길 수 있지만 내 등은 능력 따윈 상관없이 아무에게나 못 맡겨. 너 아니면 안 돼.”
“······.”
홀쭉이는 태수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홀쭉아, 나 도와줄 거지? 내 등, 지켜 줄 거지?”
“젠장.”
홀쭉이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뛴다.
진정이 안 된다.
테이블 위에 있는 소주 한 병을 물처럼 마셨다.
“크으-!”
탕.
홀쭉이가 크게 웃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넘어갈 수가 있나!
“그래, 네 등은 내가 지켜 주마!”
“고맙다.”
속이 시원해졌다.
홀쭉이는 문득 부끄러움이 몰려들었다.
‘박철완이 왜 얼굴을 붉혔는지 이해가 가네.’
그 왜소한 작자가 자꾸 얼굴을 붉히기에 속으로 혀를 찼던 홀쭉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 얼굴이 화끈대고 있으니 참 웃기지 않은가.
‘젠장, 망할 놈. 날 이렇게 꼬드기다니. 내가 이런 사탕발림에 홀랑 넘어갈 정도로 순진한 놈이 아닌데. 진짜 뭐에 홀린 것처럼.’
섭섭함은 가셨는데, 왜 그 자리를 민망함이 대신 채우나.
홀쭉이는 애써 눈을 돌렸다.
마침 저쪽 테이블에서 젊은 여자 서넛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옳거니!
“참, 나도 그거 만들어 줘.”
“뭘?”
“박철완한테 만들어 줬던 거.”
“명함?”
태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조잡한 명함이 탐났다고? 왜?
“흐흐흐, 여자들 꼬드길 때는 명함이 최고 아니냐. 나도 있어 보이는 직책으로 박아 줘.”
“······.”
그렇게 포항의 밤은 깊어 갔다.
* * *
1972년 7월 31일 월요일 오전 10시.
포항 철강 사장실.
똑똑똑.
“들어 와.”
결재 서류를 읽던 박태종은 의아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를 알아보고 더욱 그랬다.
태수와 홀쭉이였다.
“계약금을 가지러 왔나? 은행 간 직원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겸사겸사요.”
“음?”
박태종은 결재 서류를 내려놨다.
“무슨 일인가? 또 뭐가 있나?”
“지난번에 뵈었을 때 중요한 걸 하나 빠뜨렸거든요.”
“중요한 거? 뭘 놓고 갔나? 와서 가져가게.”
“감사합니다. 이리 흔쾌히 내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잘 가져가겠습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근데 가져갈 게 뭔가?”
“아드님이요.”
“···뭐?”
박태종은 황당했다.
당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갔으니까.
딸이라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아들이라니!
저벅저벅.
태수를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
왜소한 체격에 단정한 양복, 동그란 은테 안경.
부끄러운 듯, 그러나 씩씩하게 웃고 있는 남자.
분명 제 아들 박철완이 맞다.
“네가 왜 여기 왔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아까 말씀드린 중요한 거 말입니다. 소개를 빠뜨렸더라고요.”
태수가 웃으며 박철완을 제 앞에 세웠다.
“앞으로 태양 건설에서 포항 철강이 의뢰한 학교를 건설할, 시공 책임자 박철완 부사장입니다.”
박태종의 고개가 아들을 향해 홱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