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인재 영입(3)
박철완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는 똑똑한 사람이다.
그만큼 현재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전 아직 서툴고 부족합니다. 그저 막연히 상상밖에 안 해 봤고-”
“이번엔 그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일을 해 봅시다.”
박철완은 순간 넘어갈 뻔했다.
재빨리 정신을 수습했다.
“그러기엔 제가 건설 일을 해 본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 벽돌 한 장 안 날라 봤고-”
“누구는 날 때부터 건설했답니까? 경험이 없다고 건설일 하지 말란 법도 없죠.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입니다.”
또 넘어갈 뻔했다.
이 사람, 진짜 위험한 사람이네.
“아무리 그래도 건설은 밑바닥에서부터-”
“제 밑에서 일하는 거, 그렇게 싫습니까?”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태수는 두 손으로 박철완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흥분으로 마구 떨리는 박철완과 눈을 마주쳤다.
“뭐가 그렇게 겁납니까? 꿈을 펼칠 기회가 왔잖습니까. 박철완 씨, 바로 당신 눈앞에. 내가 그 기회, 주겠습니다.”
태수의 눈은 확신으로 가득했다.
조금도 떨리지 않는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박철완도 서서히 안정이 되었다.
태수의 눈빛이 뜻하는 바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강태수 씨, 당신은 나를 믿고 있군요?”
“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오래 만났다고 전부 믿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반대로 오늘 만났다고 못 믿을 이유도 없죠. 전 당신의 꿈을 믿어 보고 싶습니다.”
“내 꿈을?”
“같은 꿈을 꾸고 있다. 의기투합했다. 당신이 탐난다.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합니까?”
솔직한 돌직구가 박철완의 가슴에 스트레이트로 꽂혔다.
‘같은 꿈을 꾸고 있다. 의기투합했다. 내가 탐난다?’
태수는 물었다.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하냐고.
박철완은 그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충분합니다! 그런 이유라면 저도 좋습니다!”
태수는 빙그레 웃었다.
박철완의 눈앞에 꽉 쥔 주먹을 들어 보였다.
파이팅 포즈다.
“까짓거, 같이 한번 해 봅시다!”
“조, 좋습니다!”
분위기에 휘말려 박철완도 주먹을 쥐었다.
생전 처음 해 보는 파이팅 포즈였다.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태수는 기쁘게 활짝 웃었다.
그걸 보고 박철완은 깨달았다.
‘훌러덩 넘어가 버렸네.’
그런데 왜 이렇게 기쁜지 모르겠다.
박철완은 씩 웃었다.
태수는 품에서 작은 수첩과 펜을 꺼내 뭔가 슥슥 적었다.
그리고 찢어 낸 작은 쪽지를 박철완에게 건넸다.
“지금으로서는 드릴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군요.”
“이게 뭡니까?”
태수가 내민 쪽지를 본 박철완.
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양 건설 부사장, 박철완>
조잡한 명함이었다.
“설마, 설마··· 이거······.”
장난 같은 쪽지를 받고서, 박철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잘못 읽은 게 아니다. 다시 봐도 똑같다.
<태양 건설 부사장, 박철완>
박철완이 손가락을 파르르 떨자 쪽지 역시 같이 떨렸다.
“제 명함입니까?”
울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박철완은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태수는 씩 웃었다.
“다음에는 정식으로 제작해서 그 손에 들려 드리죠.”
“아니, 직책을 잘못 적은 것 같습니다. 부, 부사장이라뇨.”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부’ 자를 빼 드리고 싶습니다만.”
“허··· 말도 안 돼.”
여전히 조잡한 명함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박철완.
태수는 덤덤하게, 그러나 자신감 있게 말했다.
“인재를 제대로 쓰려면 능력에 어울리는 자리가 필요한 법입니다. 그런데 아직 회사가 작습니다. 당신을 담기엔 많이 작을 겁니다.”
박철완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내가 뭐라고.
“태양 건설, 앞으로 우리가 같이 크게 키웁시다. 당신이 꿈을 제대로 펼 수 있도록,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태수는 자신만만하게 씩 웃었다.
“이번엔 부사장이지만 다음엔 꼭 사장 직함을 단 명함으로 드리겠습니다.”
박철완은 몇 번이고 입술이 달싹이다 말다가 급기야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맙소사. 세상에, 당신 정말······.”
“왜요? 갑자기 멋져 보입니까?”
“또라이 같아요.”
“이런······.”
박철완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통성명 한 번 한 게 다인 사람에게 초면에 다짜고짜 부사장 자리를 내밀다니, 제정신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싫습니까?”
“하하하!”
결국 박철완은 배꼽을 잡고 크게 웃더니 대뜸 허리를 굽혔다.
“그럴 리가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장님.”
태수도 활짝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저 역시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부사장님.”
삼고초려를 각오했는데 한 방에 낚았다.
갑자기 태수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린다.
“부사장님, 7월 31일 월요일 10시까지 사장실로 나오실 수 있습니까?”
“네? 사장실이 어딘데요? 서울? 아니면 광산이 있다는 강원도?”
“아뇨, 저희 말고 포항 철강 사장실이요.”
“네?”
어리둥절한 박철완을 보며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알고 있습니까? 포항 철강 사장님께서 태양 건설에 학교 건설 하청을 의뢰하셨습니다.”
“아, 네. 들었습니다.”
“포항 철강 사장님께 태양 건설의 시공 책임자를 제대로 소개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철완은 그 뜻을 깨닫고 크게 웃었다.
“좋습니다. 31일 10시까지 포항 철강 사장실로 같이 가시죠.”
박철완 역시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하하하, 다음엔 사장 직함을 단 명함을 주신다고 약속했으니 이번 명함은 제가 직접 만들어야겠네요?”
“······.”
얘기가 그렇게 되나? 쩝.
* * *
부르릉-
박철완이 타고 온 지프차가 떠났다.
태수와 홀쭉이를 영일대 해수욕장에 데려다주고서.
“하여튼 강태수, 오늘 부자를 상대로 제대로 낚더라?”
“운이 좋았지.”
“일 따낸 거야 그렇다 쳐. 근데 아깐······.”
홀쭉이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태수는 괜스레 뒷머리를 긁적였다.
“탐나는 인재라 뺏기고 싶지 않아서 그만.”
“아까 그 사람, 조심해야겠더라.”
“왜? 뭘 조심해? 무슨 이상한 낌새라도 보였어?”
“사람이 너무 순진해. 그러니 강태수 꼬임에 홀랑 넘어간 거지. 사기 조심해야겠더라. 한 번 당했는데 두 번은 안 당할까.”
“······.”
홀쭉이가 키득댄다.
털썩.
태수는 모랫바닥에 앉았다.
7월 말, 사람들이 해수욕장에 많이도 놀러 왔다.
짠 내 머금은 바닷바람에 여유로운 휴가철 분위기까지.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에 마음이 풀어진다.
“좋다.”
“그림 좋지? 캬- 저쪽 언니 몸매 죽인다.”
홀쭉이도 태수 옆에 앉으며 눈을 떼지 못했다.
쭉 빠진 콜라병 몸매에서.
* * *
포항의 바닷가에 밤이 찾아왔다.
여관에서 샤워까지 마치고 근처 포장마차를 찾은 태수와 홀쭉이.
“약속은 지켰다, 홀쭉아.”
홀쭉이의 원대로 실컷 놀았다.
바닷가, 자연산 회, 소주, 그리고 여자까지.
그 결과가 이렇다.
“나쁜 년. 사람 마음에 바람만 실컷 불어 놓고.”
홀쭉이는 콧물을 훌쩍이며 깡소주를 들이붓는다.
상처 입은 마음에 알콜이 스며들어 촉촉하게 적셔 준다.
“역시 실연엔 술이야. 봐, 상처가 이렇게 소독되잖아. 알콜의 힘이지.”
홀쭉이는 여자한테 들이대는 족족 까였다.
“내 식스 팩에도 안 넘어가다니. 훌쩍, 보는 눈도 없는 년들.”
“그건 식스 팩이 아니라 갈비뼈다, 홀쭉아.”
태수를 홱 돌아보는 홀쭉이의 눈에 원망이 서렸다.
“태수 이놈 얼굴이 뭐가 그리 잘났다고 죄다 이쪽으로 붙느냔 말이야, 나쁜 년들. 훌쩍.”
“이 얼굴이 어디가 어때서?”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주제에.”
“이 뼈다귀가 지금 뭐래? 시끄럽다. 술이나 마셔.”
새로운 소주 한 병을 투덜대는 주둥이에 박아 줬더니 얌전해진다.
“비싼 회 남기면 죽는다.”
“아- 마음이 시리다. 이럴 땐 위스키가 딱인데.”
포항 철강 사장실에 있던 그런 위스키.
태수는 피식 웃으며 회 몇 점을 간장에 찍어 먹었다.
맛있다.
‘어머니, 아버지도 언제 모시고 여행 한번 가야 할 텐데. 이렇게 회도 사 드리고.’
여행은커녕 회 한 번을 제대로 못 사 드렸다.
그래서 그런지 맛있는 거 먹을 때면 부모님 생각이 난다.
‘과거로 돌아와서 괜히 팔자에도 없는 효자 노릇을 하는 것 같아 쑥스럽긴 해.’
환하게 웃어 주는 부모님들 생각에 절로 힘이 난다.
“태수야, 너 이제 어떡할 거야?”
“뭘?”
“몰리 어쩌고 하는 광물 팔러 왔다가 뜻하지 않게 일거리를 잔뜩 얻었잖아.”
“까짓거, 둘 다 하면 되지.”
“그게 가능하겠냐?”
“사람이 작정하고 뛰어들면 못 이룰 일이 없는 법이다.”
홀쭉아, 사실 이 형님은 건설 회사도 굴려 봤단다.
청일 그룹 총괄 비서실장으로 있으면서, 청일 건설 사장님을 족쳐 대면서.
그러니까이 정도 일 따위 못할 것도 없단다.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쩝.’
태수는 그저 웃기만 했다.
대신 가만히 날짜를 손꼽았다.
“8월 3일 되려면 아직 며칠 남았구나.”
“8월 3일? 그게 왜?”
“돈 들어올 데가 있거든.”
8.3 사채 동결 조치가 발표되면 장말동에게 돈을 받을 수 있을 거다.
‘그 사람, 신용 하나는 좋으니까.’
장말동이라면 아마 약속을 지킬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놀고 있을 수만은 없지. 돈은 그렇다 쳐도 몰리브덴 시설과 광부, 그리고 숙소까지.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
광산 문제를 알아보라고 한수를 보냈다.
지금쯤 강원도 및 충북 전역을 돌며 적당한 곳을 물색하고 있을 터.
‘휴대폰이 없는 게 아쉬워. 전화 하나 놓기가 어려울 때니.’
2020년을 살다 와서 그런지 발전된 현대 문명이 그리웠다.
차라리 몰랐다면 괜찮은데 잘 쓰다 없어지니까 이게 참 답답하다.
‘공기도 좋고, 물도 좋고, 사람도 좋고. 그런 건 다 좋은데.’
아무렴.
부모님과 한수도 멀쩡히 살아 있고, 눈앞에 이렇게 홀쭉이도 살아 있고.
‘다들 먼저 떠나고, 나 홀로 남았지. 내가 얼마나 외로움에 사무쳤었는데.’
술 한잔 같이 마실 친구가 있었나.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해장국에 깍두기를 같이 먹을 부모님이 있었나.
못마땅한 눈으로 만날 때마다 잔소리하던 동생도 먼저 가 버리고.
마누라에 자식들까지 앞세웠다.
‘그저 일, 일, 일! 성공이 뭐라고, 은혜가 뭐라고, 청일 그룹이 다 뭐라고.’
안 바꾸련다.
다시 죽는다 해도 지금과는 안 바꾼다.
‘가끔 꿈처럼 느껴져. 깰까 봐 무섭더라. 지금이 너무 좋아서.’
홀쭉이를 보는 태수의 눈이 부드러워졌다.
소주병을 들어 홀쭉이의 잔을 채워 준다.
꼴꼴꼴.
“너 술에 죽고 못 사는 꼴을 보면 간경화 올까 봐 실컷 마시라곤 못하겠다. 그렇지만 즐겁게 마시자, 홀쭉아.”
“하하하, 걱정도 팔자다.”
술 한 병이면 세상을 다 가진 듯 즐거워하는 홀쭉이.
태수는 그런 홀쭉이가 너무나 오랫동안 그리웠다.
“홀쭉아, 너도 나랑 같이 일해 보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