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인재 영입(1)
태수는 담담히 대답했다.
“학교를 짓겠습니다.”
“돈이 되는 건 병원이나 상가 건물일 텐데?”
“압니다.”
“지금이라도 바꾸시겠소?”
“됐습니다.”
박태종은 의아했다.
“이유라도 있소?”
“별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왕 맡아 짓는 일, 나라의 동량이 될 인재 양성에 보탬이 되고 싶어서 그럽니다.”
“하하하하!”
박태종은 호탕하게 너털웃음을 지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태수가 마음에 쏙 들었다.
“좋소, 아주 좋소.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내 그대에게 전부 맡기겠소.”
“감사합니다.”
박태종은 원래 학교 하나만 하청 맡길 생각이었는데, 세트로 묶어서 내주고 말았다.
눈앞의 이 청년이라면 잘해 낼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이걸로 우리의 빚은 계산 끝냅시다.”
“그러시죠.”
박태종은 시원시원하게 나오는 태수의 대답이 이번에도 마음에 들었다.
비굴하지 않은 태수의 태도는 더욱 마음에 들었고.
“그대가 세울 회사 이름이··· 태양 건설이라고 했던가?”
“맞습니다.”
“태양 건설이라. 최대한 빨리 참여하길 바라는 뜻으로 선물 하나 드리지. 잠시만.”
박태종이 전화기를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연결한다.
“포항 철강의 박태종이오. 박 차관, 내 부탁 하나만 합시다. 태양 건설이라고······.”
홀쭉이는 어리둥절했다.
‘이게 다 무슨 상황이래? 아까부터 무슨 차관이랑 계속 통화를 하네.’
태수가 뭔가를 알고 있을 것 같기에 돌아보았다.
과연 태수는 짐작하는 게 있는지 활짝 웃고 있었다.
‘박 차관이라면 건설부 차관 박광덕이겠군. ‘
태수는 말없이 위스키를 마셨다.
홀쭉이는 돌아가는 상황을 알기 위해 한껏 목을 빼고 귀를 기울였다.
“포항 철강의 직원 시설을 지어야 한단 말이오. 맞소. 각하가 그토록 소원하시는 제철소 건설이 바빠져서 그렇소. 거 빨리빨리 처리하라 말 한마디 해 주시오.”
태수의 웃음은 점점 더 진해진다.
“고맙소. 그럼 수고하시오.”
박태종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회사 설립에 관한 제반 사항은 조만간 처리될 것이오.”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일이 밀렸다고 해서 기다리는 중인데 사장님 덕분에 이렇게 해결되는군요. 선물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박태종은 씩 웃었다.
“그럼 이건 김 과장 몫으로 칩시다.”
“좋습니다.”
일본산 망종에게 개 목줄을 달아 준 빚은 건설 하청 일로 끝냈다.
이 정도 작은 편의는 김 과장을 구해 준 빚으로 제하겠다는 뜻이다.
홀쭉이는 박태종을 보면서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권력이 좋긴 좋구나. 뒷배가 대단하네.’
이어 건설 도급 하청 계약서까지 순식간에 작성되었다.
이번엔 태수가 아니라 박태종이 계약서를 적어 내려갔다.
“내일까지 계약금을 준비해 놓겠소. 나머지는 공정률에 따라 차차 지급하도록 합시다.”
“좋습니다. 다만 어음은 안 받겠습니다. 그런데 현금으로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한 달짜리 단기 어음은 어떻소?”
“보다시피 사업 초기라 자금이 부족해서요. 사정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소, 하지만 이번만이오. 대신 현금을 마련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니 며칠 말미를 주시오. 월요일에 다시 봅시다. 어떻소?”
“알겠습니다.”
박태종이 계약서를 마무리할 때 태수가 계약서 특약 사항란을 톡톡 두들겼다.
“지급 보증은 적으셔야죠. 자금이 부족하시면 소개해 드릴 곳도 있습니다만.”
“거기가 어딘가?”
“명동 큰손이라고 들어 보셨는지요?”
“하하하하, 장말동이를 알아? 자네 진짜 물건이로군!”
박태종은 크게 웃었다.
“내 장말동이의 사채를 쓰는데, 어째선지 이번엔 급히 회수하더군. 해서 며칠 전에 거래처를 바꿨네.”
장말동이 사채를 급히 회수하는 이유라면 익히 안다.
바로 태수가 말해 준 정보, 8.3 사채 동결 조치 때문일 테니까.
“그럼 최무룡의 사채를 쓰십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소만.”
“아, 다행입니다.”
태수는 씩 웃었다.
‘지금 최무룡은 8.3 사채 동결 조치를 전혀 모르고 있을 테니 많이 빌렸을수록 위험하지. 최무룡은 쪽박 차기 딱 좋겠어.’
며칠 전 발등에 불 떨어져서 파닥거리던 장말동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밑에서 뭐 빠지게 구르고 있을 명동 하이에나 송진구의 얼굴도.
“지급 보증이 싫으시다면 차용증이라도 쓰셔야죠.”
“이런, 차용증은 쓰기 싫으니 지급 보증인을 불러야겠군.”
박태종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내 지급 보증인은 아마 꽤 대단한 위인이실 텐데, 감당할 수 있겠소?”
박태종의 지급 보증인이라.
설마 그 사람인가?
아니겠지?
고작 이런 일로.
“참 똑똑한 친구야. 벌써 누군지 알고 있는 눈치로군.”
태수는 씩 웃었다.
“얼렁뚱땅 넘길 생각하지 마시고요. 직접 데려오기 전까진 못 믿습니다.”
“조만간 제련소 시찰을 나오실 거요. 때가 되면 뵐 수 있을 것이오.”
이런, 진짜로?
“각하께서도 그대를 보면 꽤 흥미로워 하실 것 같소.”
대뜸 박정환 대통령이 튀어나와 버리네.
* * *
한여름 태양이 머리 위에서 이글댄다.
포항 철강 공사 현장을 나와 얼마나 걸었을까.
저기 버스 정류소가 보인다.
털썩.
의자에 앉자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 것 같다.
아까 있었던 일을 다시 생각할수록 홀쭉이는 자꾸 헛웃음이 나왔다.
“허, 허허허. 허허허. 황당하다, 진짜.”
“뭐가?”
“그렇잖아. 서울에서 포항까지 몰리 어쩌구 하는 광물을 팔겠다고 왔거든? 근데 학교를 짓게 생겼잖아. 허허허허.”
나도 그건 뜻밖이야.
눈도장 찍으러 왔다가 진짜 계약서에 도장 찍고 왔으니까.
“대체 몰리브덴은 어떻게 생겼냐? 그쪽 사장님도 그렇지, 어째 살 물건 한 번을 안 보고 덜컥 계약하냐?”
홀쭉이는 연신 웃었다.
“허허허, 내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처음엔 꼭 간첩 보듯 했던 양반이 더 주지 못해 안달인 것처럼 막 퍼 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막 줘. 허허허.”
그건 그랬다.
태수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게,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학교 건설 일을 따낼 줄은 태수로서도 예상치 못했다.
“태수 네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나 보다.”
“사업을 마음에 든 걸로 하겠냐?”
“그렇지 않고서야 일거리를 던져 줄 리 없지. 사업도 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의외로 홀쭉이가 핵심을 꿰뚫었다.
‘맞아, 사람들은 간혹 그걸 잊곤 하지. 사업도 사람이 하는 일이란 걸.’
오죽하면 술 영업을 하고, 뇌물을 뿌리겠나.
오고 가는 마음속에 뭐 하나라도 더 가는 법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그렇다.
과거 청일 그룹에 있을 때 유일하게 태수가 못하는 일이 있었다면 뇌물을 뿌리는 일이었다.
‘뇌물 뿌리기는 한일권의 특기였지.’
여자 끼고 술 마시고, 뇌물 뿌려 매수하고, 사람 시켜 족치고.
나쁜 일, 구린 일, 더러운 일은 한일권이 참 잘하긴 했다.
회사를 제대로 못 굴려서 그렇지 어떤 의미로 그놈도 난놈은 난놈이다.
그러니 태수가 손 한번 제대로 못 써 보고 당했고.
“태수야, 너도 어쩔 수 없겠지? 다른 사람들처럼 뇌물 쓰고, 아가씨 상납하고, 비싼 술 뿌리면서 계약 따와야 하겠지?”
홀쭉이는 씁쓸한 얼굴로 태수를 돌아봤다.
홀쭉이가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청일 그룹 총괄 비서실장이었던 태수가 누구보다 잘 안다.
“필요하다면 수단과 방법은 안 가릴 거야.”
홀쭉이가 드물게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홀쭉이도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고 있기에 고개는 끄덕였다.
‘한일권을 상대해야 한다면 수단과 방법에 제약을 둬선 안 돼. 내 손발을 스스로 묶게 되니까.’
하지만 난 한일권과는 다를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다고 꼭 더러운 방법만 써야 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그렇지만 쉽게 가려고 금수만도 못한 짓을 일삼진 않을 거다.”
“응?”
“악마를 잡겠다고 악마가 되어 버리는 건 멍청한 짓이야. 이게 다 행복해지자고 하는 일인데.”
홀쭉이가 고개를 들었다.
태수는 웃고 있었다.
“지켜야 할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면서까지 성공하고 싶지 않다. 그런 짓 안 해도 성공할 수 있어. 그 정도 능력은 돼, 내가.”
돈 냄새 맡는 능력, 이번엔 청일 그룹이 아닌 우리를 위해 쓸 테니까.
태수가 똑바로 홀쭉이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 사람들을 건드리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응징하겠어. 그건 나도 못 참아.”
가족과 친구를 어떻게 죽였는지 읊조리던 한일권이 떠올랐다.
키득대면서 좋아하던 그 얼굴에 주먹 한 방이라도 먹여 줬어야 했는데.
‘이번엔 절대 내 사람들한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도록 하겠다. 덧붙여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주겠다. 기다려라, 한일권······.’
태수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홀쭉이는 괜히 가슴이 뜨거워져서 고개를 돌렸다.
“열혈 청년 나셨네.”
“왜? 갑자기 멋져 보이냐?”
태수와 홀쭉이는 동시에 킥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흐아- 덥다. 태수야, 진짜 인간적으로 너무 덥다.”
“7월 말 한낮이니까.”
팔랑팔랑.
태수가 몰리브덴 검사표라도 꺼내 부채질을 한다.
‘차가 필요해. 에어컨이 필요해. 불편해 죽겠네.’
이럴 때면 21세기 자동차에 시원한 에어컨 생각이 간절해진다.
1972년엔 자동차를 타도 에어컨 대신 창문을 열고 달렸다.
그것도 수동형 뱅뱅이 창문 내리개로.
“버스는 언제 오나.”
“태수야, 우리 바닷가에 가자. 서울에서 포항까지 온 이상 해수욕장에서 물놀이 한 번은 하고 가야지. 응?”
그렇지 않아도 박태종에게 계약금을 받고 서울에 가려고 했다.
월요일까지 며칠 여유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러던가.”
“콜! 콜콜콜! 알콜도, 콜! 히히히.”
그때였다.
부르릉, 부릉. 끼익.
어디서 튼튼한 지프차 한 대가 태수와 홀쭉이 앞에 섰다.
태수 또래의 젊은 남자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강태수 씨, 맞습니까?”
“네, 누구십니까?”
젊은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젠틀하고 지적인 느낌이라 호감이 간다.
동그란 은테 안경이 단정한 양복과 썩 잘 어울렸다.
“아버님이 배웅하라 하셨습니다.”
“아버님이라면······.”
“방금까지 같이 있었다고 하시던데요. 포항 철강 사장님입니다.”
“아.”
박태종의 아들은 씩 웃었다.
“먼저 포항 철강 식구들을 대신해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감사 인사를 받을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일본산 망종을 길들일 목줄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다들 3년 묵은 위염을 동시에 고쳤다고 난리가 아닙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박철완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 소개가 늦었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박철완입니다. 타시죠.”
“강태수라 합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어, 저는 김용식-”
홀쭉이가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벌써 두 사람은 차에 오른 후였다.
한숨을 내쉰 홀쭉이도 잽싸게 차에 올랐다.
태수는 생각날 듯 나지 않는 기억을 뒤지고 있었다.
‘박철완이라. 분명 젊을 때 귀에 못이 박이도록 자주 들었던 이름인데, 누구더라?’
태수가 입사할 때 즈음부터 몇 년간 자주 듣던 이름이었다.
하지만 몇 년 후 불의의 사고로 죽어서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던 이름이다.
‘벌써 30, 40년 전 일이니 기억이··· 아!’
그때 머릿속에 번개처럼 번뜩 스치는 인물이 있었다.
‘청일 건설의 브레인! 부동산 개발과 입지 선정의 대가!’
사람 보는 안목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한청호가 삼고초려까지 하며 어렵사리 영입했다는 남자.
그를 이곳에서 이렇게 만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