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포항 철강 박태종(1)
1972년 7월 27일.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포항 철강 앞에서 홀쭉이는 감탄했다.
“이야, 엄청나다! 무슨 공사 현장이 이렇게 크냐? 아예 마을 하나를 짓고 있는데?”
“어, 아예 마을을 통째로 짓고 있는 거 맞다.”
“켁··· 진짜냐?”
“물론. 완공에만 몇 년이나 걸리는 대규모 공사다. 당연히 직원과 가족들이 살 마을이 필요하지.”
종합 제철소부터 근방 마을까지.
몇 년에 걸쳐 건설되고 있었다.
인부들이 달라붙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장난 아니야! 항구까지 건설하고 있어!”
“그야 배가 드나들어야 하니까. 냉연공장에 쓸 냉각수도 대량으로 필요하고.”
“태수야, 여긴 대체 무슨 공장이냐?”
“종합 제철소. 우리나라 철강 산업의 선두주자가 될 거야.”
포항 철강이 어떤 곳이던가.
장차 이 나라의 제철 산업을 이끌어 가고자 박정환 대통령이 야심 차게 준비한 중화학 공업 육성 프로젝트 중 하나다.
오죽하면 최측근이자 심복 중의 심복인 박태종을 포항까지 내려보냈을까.
이곳은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종합 제철소가 될 것이다.
“이런 거 지으려면 얼마나 들까?”
“못해도 1억 달러는 들걸?”
“헉! 그렇게나 많이 들어?”
포항 철강은 제1고로를 완성하는 데만 1,205억 원이 들었다.
70년대 현재 환율이 1달러에 330원 정도.
나머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박태종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들었다.
“끝내준다. 대체 그 1억 달러는 어디서 났을까?”
“대일청구권 자금.”
포항 철강 건설은 시작부터 잡음이 많았다.
외국 기관에서 돈을 빌려 주길 거부해 차관을 들여오지 못한 까닭이다.
한국은 후진국이라 종합 제철소를 지을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결국 박태종과 박정환 대통령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하기로 한다.
총 5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 중 농수산 지원 용도로 남겨 둔 1억 달러를 쏟아부어 포항에 종합 제철소가 지어지게 되었다.
“아, 그러고 보니 라디오에서 포항 철강에 대해 떠들어 대는 걸 들은 적 있어. 아직 용광로가 다 지어지지 않았다던데?”
“하지만 후판 공장은 완공되었어.”
“후판 공장?”
“후판(厚板). 배 만들 때 주로 쓰는 두껍고 넓적한 철판. 아마도 며칠 후면 첫 판매가 이뤄질걸?”
아마도 첫 판매처는 금산 조선소.
이 역시 박정환 대통령이 중화학 공업 육성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새로 짓고 있는 조선소였다.
“태수야, 넌 모르는 게 없구나. 그걸 다 어떻게 알았냐?”
“한수더러 미리 알아보라고 시켰다.”
“······.”
“포항까지 오는데 이 정도 준비는 기본이지.”
태수가 품속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홀쭉이에게 건넸다.
종이 뭉치를 받은 홀쭉이는 쭉 읽어 내려갔다.
“아닌데? 여기 그런 얘기는 하나도 없잖아?”
홀쭉이는 재빠르게 종이 뭉치를 넘겼다.
“순 사람 뒷조사 자료밖에 없어. 이건 뭐야? 웬 일본인 뒤를 이렇게 털었냐?”
“중요 인물이다. 너도 잘 봐둬.”
홀쭉이는 어리둥절했다.
‘포항 철강에 웬 일본인?’
“나 암기 약한 거 잘 알면서.”
“그럼 이따 만나 합석할 술친구 인적 사항이라고 생각해 보던가.”
“···어째 갑자기 술술 외워진다. 재밌는 친구네.”
“같이 술 마실 일은 아마 없겠지만.”
“흥미가 팍 식었다. 이거 도로 가져가.”
“······.”
태수는 조용히 공사 현장을 둘러봤다.
‘앞으로 1년 후면 거대한 용광로가 완성된다.’
1973년 6월 9일, 포항 철강의 용광로에서 첫 쇳물을 뽑는다.
세계가 한목소리로 ‘한국처럼 후진국에서 종합 제철소는 무슨.’이라며 무시했었다.
그랬기에 제철소 건설에 필요한 차관 지원을 거절했고,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포항 철강은 세계 철강 역사상 제철소를 가동한 첫해부터 이익을 낸 유일한 기업으로 기록된다.
73년 첫해에 무려 매출 1억 달러, 순이익 1,200만 달러(약 46억 원)!
이는 고작 공장 가동 반년 만에 이뤄 낸 성과였다.
포항 철강에 박태종이란 걸출한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태수는 지나가는 인부에게 물었다.
“실례합니다. 지금 박태종 사장님, 어디 계십니까?”
“어디서 나오셨습니까?”
제철소는 전쟁 물자를 생산할 수 있는 국가 중요 시설로, 국가 보안 시설에 속한다.
그만큼 보안도 까다롭고 출입도 엄격히 통제한다.
태수와 홀쭉이는 당연히 국가 소속도 아니고, 그에 준하는 출입 허가증도 갖고 있지 않았다.
“보아하니 드나드는 인부들이 많다고 민간인이 함부로 들어온 모양인데, 그러다가 큰일 나는 곳이 여깁니다. 잡혀가기 전에 나가시죠.”
“태수야, 이거 우리 좆된 거냐?”
홀쭉이는 불안한 듯 태수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박태종 사장님께 전해 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태수는 자신만만하게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안에서 종이 뭉치가 슬쩍 나왔다.
그때였다.
“어? 어어어? 브, 브레이크가! 위험해! 비켜!”
부아아아앙-
트럭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달려온다.
뒤에 긴 철강 파이프를 잔뜩 싣고서.
덜컹덜컹.
하필이면 오늘따라 인부가 파이프 묶음 줄을 대충 묶어 놨는지.
줄이 풀려 느슨해진 틈을 타 파이프가 제멋대로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와당탕탕! 쿠당탕탕!
트럭에서 튕겨 나간 철강 파이프가 굉음을 내며 굴러간다.
그것도 비탈길 경사로를 따라서.
“피해!”
“조심해!”
“위험해!”
인부들은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몸을 날렸다.
태수와 홀쭉이 역시 한쪽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쿠르르릉- 쿠당탕탕-
철강 파이프는 굴러가면서 구석에 쌓아 둔 자재 더미를 덮쳤다.
“안 돼!”
트럭 운전사가 가까스로 튕겨지듯 굴러 나온다.
콰앙-!
운전자가 없는 트럭은 그대로 돌진해 공장 기둥과 충돌했다.
공장 기둥이 구부러지면서 공장 벽 일부가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다.
“전부 밖으로 나와!”
“서둘러!”
공장 안에서 작업에 열중하던 인부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밖으로 뛰쳐나왔다.
“태수야!”
홀쭉이가 운전자에게 달려가는 태수를 보고 놀라 소리쳤다.
운전자는 모래 더미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태수는 미친 듯이 모래를 파내서 운전자를 꺼냈다.
“이런, 숨을 안 쉰다.”
태수는 서둘러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한참 만에 운전자의 숨통이 겨우 트였다.
태수는 그제야 식은땀을 닦았다.
“홀쭉아, 응급차 불러!”
“김 과장!”
그때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달려 나왔다.
포항 철강의 사장, 박태종이었다.
박태종은 한눈에 상황을 파악했다.
“김 과장을 병원으로 옮긴다! 차를 대기시킨다!”
“사장님, 제가 가겠습니다.”
“나도 같이 간다.”
“사장님은 이곳을 맡아 뒷수습해 주십시오. 인부들의 동요가 심합니다.”
웅성웅성.
사고를 목격한 인부들은 크게 동요했다.
다들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일이었습니다.”
“이대로 두면 사기가 크게 떨어질 겁니다, 사장님.”
부하 직원들의 염려에 박태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김 과장을 부탁한다.”
“다녀오겠습니다.”
한 명이 트럭 운전사를 업고, 다른 한 명이 차를 끌고 왔다.
그들이 떠나는 걸 확인한 박태종.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크게 외쳤다.
“누구 또 다친 사람은 없나!”
다들 수군대기만 할 뿐 다친 사람에 대한 말은 없다.
“각 작업조는 선후임을 확인해라! 조원들은 다들 무사한가!”
“무, 무사한 것 같습니다!”
“무사합니다!”
“전원 괜찮습니다!”
박태종은 더욱 크게 외쳤다.
“통째로 연락이 안 되는 작업조가 있는가!”
“없습니다!”
“없습니다!”
박태종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인부들은 굳어진 표정을 풀지 못했다.
“사장님, 기껏 지어 놨던 공장 한 축이 무너지고 자재 더미가 모조리 박살 났······.”
“됐다. 사람만 안 다쳤으면 된 일이다. 그깟 공장이야 다시 지으면 그만이고, 자재야 다시 사 오면 그뿐이다.”
하지만 술렁임이 멈추질 않는다.
“철강과 건설은 사고가 가장 많이 터지는 위험한 일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사고는 아차 하는 순간이다!”
인부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어 박태종을 바라본다.
눈에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한눈팔다가는 큰 사고가 난다. 첫째는 안전, 둘째는 튼튼, 셋째는 확실이다. 집중한다! 알았나!”
대답이 없다.
확실히 평소와는 다르다.
“왜 대답이 없나! 알았나!”
모깃소리만 한 대답이 시간차를 두어 군데군데에서 들려온다.
좀처럼 분위기가 돌아오지 않는다.
‘안 되겠군.’
박태종은 잠시 눈을 감더니 이윽고 강렬한 눈빛으로 인부들을 돌아봤다.
박태종이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했다.
“가슴을 펴라! 어깨를 펴라! 그리고 다시 연장을 들어라! 우리는 이 작업을 완수해야 한다!”
박태종은 들고 있던 삽을 쿵-하고 찍었다.
“이 제철소를 무슨 돈으로 짓는지 너희들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일본 놈들에게 받아 온 배상금이다! 국민에게 돌아가야 할 돈이다!”
쿵!
“한시라도 빨리 빚을 갚지 않으면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으랴! 죽어서 일본 놈들에게 유린당했던 조상님들을 어찌 뵐 수 있으랴!”
박태종은 사고 현장을 가리켰다.
“하루 공사가 늦어지면 한 달 빚을 갚지 못할 것이요, 한 달 공사가 늦어지면 1년 수확이 늦어질 것이다!”
인부들은 주먹을 꽉 쥐었다.
“조국과 민족, 그리고 우리 후손들을 생각해라!”
박태종은 바다를 향해 삽을 들었다.
“실패하면 역사와 국민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그때는 우리 모두 영일만 앞바다에 일제히 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첫 삽을 뜰 때 약속했던 다짐을 너희들은 모두 잊었느냐!”
“잊지 않았습니다!”
인부들의 눈에 빛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몇몇은 평소처럼 기세 좋게 크게 대답했다.
마치 군인처럼.
“우리는 이 나라의 철강 산업을 책임지고 이끌어 가야 할 막대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우리는 반드시 이를 완수해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인부들의 눈빛이 조금 전과 달라졌다.
그들은 대부분 박태종과 함께 생사고락을 나누었던 군인들이었다.
종합 제철소를 짓기 위해 군복까지 벗어던졌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애국심 하나로 삽을 들고 달려온 진정한 애국자들이었다.
“모두 집중해서 다시 작업에 열중한다! 시작!”
“시작!”
인부들이 일사불란하게 작업에 참여한다.
잘 훈련된 군인처럼 힘차게 오와 열을 맞춰서.
마치 아까의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태수야. 여기가 군대냐, 건설 현장이냐?”
“글쎄, 나도 헷갈린다.”
“이렇게 군대 같은 노가다 현장은 또 처음이네.”
“박태종은 군인 장교 출신이야. 그래서 부하 직원들을 군대처럼 휘어잡는가 보다.”
“기합 빡세게 넣고 사는구나. 여긴 절대 취직하지 말아야겠다.”
홀쭉이는 혼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깐! 거기!”
그때 박태종이 태수를 발견하고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걷는 모습마저도 잘 훈련된 군인 같다.
“아까 김 과장에게 응급조치를 한 사람, 맞소?”
“트럭 운전사 말입니까?”
박태종은 삽자루를 멀리 던져 버리고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늦었소. 그대의 신속한 조치에 대해 깊이 감사하는 바이오.”
절도 있는 동작이었다.
정중히 인사한 후 박태종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잘 벼린 칼날처럼 매서운 눈빛으로 태수와 홀쭉이를 노려봤다.
“그런데 당신들은 누구요? 왜 이곳에서 기웃거리고 있소? 이곳은 군사기밀 구역에 준하는 곳이오.”
태수는 씩 웃었다.
“강태수라 합니다. 좋은 거래 제안이 있어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