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7월의 달밤
날이 저물어 주위가 컴컴했다.
달동네의 허름한 판잣집 창문으로 불빛이 새어 나온다.
그리운 모습에 태수는 저도 모르게 활짝 웃고 있었다.
“어머니, 저희 왔어요.”
어머니가 제일 먼저 달려 나왔다.
“아이고, 우리 아들들 왔구나. 고생했다, 고생했어. 갔던 일은 잘됐고?”
태수는 오는 길에 사 온 과자 몇 봉지를 어머니께 내밀었다.
“뭐 이런 걸 다 사 왔니?”
“출출할 때 드시라고요.”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그 돈이면 맛있는 거나 사 먹지 않고.”
“어머니 간식 사 드릴 돈은 있어요.”
어머니는 과자나 사탕 같은 간식을 무척 좋아하셨다.
다만 비싸다고, 아깝다고, 그 돈이면 자식들 맛있는 거 먹이신다면 안 드시고 참으셨을 뿐이다.
어머니께 간식 한 번 제대로 챙겨 드린 적 없다는 사실이 오랫동안 태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어머니는 간식 봉지를 다시 열어 보며 활짝 웃으셨다.
이게 뭐라고 저리 좋아하실까?
이렇게 좋아하실 줄 알았다면 진작 챙겨 드릴걸.
“출출하지? 우리 태수 좋아하는 전 좀 부칠까?”
“좋죠.”
“김치전 좋아하지?”
절로 군침이 돈다.
어머니 요리 솜씨는 마을 최고였으니까.
무려 40년 만에 먹어 보는 어머니표 김치전이다.
“우리 한수가 좋아하는 파전도 부쳐 주랴?”
“좋죠.”
어머니가 부엌으로 간다.
아버지도 나오셔서 태수를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태수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뭔가를 건넸다.
청자 담배 다섯 갑이었다.
아버지는 입이 귀에 걸렸다.
“아이고, 뭘 내 것까지. 청자는 비싼 놈인데.”
“건강을 생각해서 안 사려고 했습니다만 아버지가 매번 친구들에게 얻어 피우신 게 걸려서요. 나눠 주세요.”
“걱정 마라. 내 다 알아서 하마.”
보물이라도 얻은 것처럼 좋아하시는 아버지.
아버지는 주머니를 뒤적여서 반쯤 피웠다 불을 끈, 아껴 두셨던 담배꽁초를 꺼냈다.
버릴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다 눈 딱 감고 휙 버리신다.
“우리 아들이 사 온 담배 맛 좀 보자.”
“아버지, 담배 자주 피우세요?”
“아냐, 이게 다 돈인데.”
“얼마나 피우시는데요?”
“하루에 한 개비 피우려나?”
막일하다 보면 인부들끼리 식후 땡이라고 한 모금씩 빠실 터.
그 틈에 껴서 눈치 보며 담배를 피우실 아버지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돈 많이 벌면 순한 양담배로 사 드릴게요.”
“양담배? 그게 얼마나 비싼데. 아서라, 청자도 비싸.”
손을 내젓는 아버지는 새 담뱃갑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태수는 처음으로 아버지 담뱃불을 놓아 드렸다.
성냥 불빛이 아버지 얼굴 위로 일렁이는데, 아버지가 환하게 웃는 것 같았다.
곧 독한 담배 연기가 허공에 하얗게 번졌다.
“광산에선 뭐가 좀 있더냐?”
“몰리브덴이요. 전쟁 광물이라고 하더군요.”
“금이 아니고?”
아버지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춘식이가 거기 금맥이 묻혀 있다고 그리 울더니만.”
“금은 없더라고요. 사기당한 거예요.”
“그랬구나, 그랬어.”
아버지의 눈에 착잡함이 어린다.
오춘식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40년 지기 친구였다.
그놈은 잠깐 욕심에 눈이 멀어서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지만.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냐?”
“어쩌긴요. 몰리브덴이 나왔으니 캐서 팔아야죠.”
“돈이 제법 많이 들 텐데.”
“돈 문제는 곧 해결될 겁니다.”
아버지가 이내 고개를 푹 떨군다.
“부모가 못나서 돈 한 푼을 못 보태 주는구나. 미안하다.”
“빚만 없어도 다행이죠. 괜찮습니다.”
아버지가 의젓한 큰아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대견함이 입가에 어렸다.
“애썼다. 고생했어.”
태수는 그 한마디에 피로가 눈 녹듯이 풀리는 것 같았다.
* * *
방문이 열리고, 씻고 온 강한수가 들어왔다.
한수가 재빨리 태수의 이부자리까지 편다.
뜻밖의 서비스에 태수가 어안이 벙벙할 정도다.
“이야, 내 이부자리까지 챙겨 주고. 고맙다.”
“뭐 이깟 일로 고마워해? 다른 형제들도 이 정도는 하고 살아.”
다른 집 형제들은 어떻게 사는지 몰라.
하지만 난 그냥 지금이 고맙고, 기쁘다.
태수는 씩 웃었다.
“그럼 동생이 펴 준 이부자리에 한번 누워 볼까?”
태수는 이부자리 위에 발라당 누웠다.
“좋네. 흐흐흐.”
“이게 그렇게까지 좋아할 일이야?”
“그럼, 당연히 좋지. 동생이 형을 위해서 수고를 마다않은 일인데 왜 안 좋아? 매일 해 주면 소원이 없겠네.”
태수가 싱글벙글 웃고 있으니 이거 구박도 제대로 못하겠다.
한수도 그냥 피식 웃어 버렸다.
“한수야, 네가 며칠 광산 전역을 돌며 내가 말하는 조건에 해당하는 곳을 찾아 줘.”
“조건?”
첫째, 몰리브덴을 제련할 수 있는 설비를 보유하고 있을 것.
둘째, 경영 상태가 나쁠 것.
셋째, 숙련된 광부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을 것.
한수는 의아했다.
“왜 굳이 이런 곳을 찾는 건데? 돈 문제가 해결됐으니까 몰리브덴 캐서 파는 일만 남았잖아.”
“망해 가는 광산이라면 통째로 인수하려고. 귀찮은 문제들, 한 방에 해치워 버리자.”
태수는 씩 웃었다.
“어차피 마련해야 할 것들인데 헐값에 인수하면 대박이잖아. 안 그래?”
한수는 곰곰이 생각했다.
태수가 말하는 조건이라면 몰리브덴 시설과 광부 문제 따위를 헐값에 전부 해결할 수 있다.
‘그럼 2천만 원까지도 안 들겠는데? 더구나 광산까지 통째로 들어오면······.’
해 볼 만하다!
인수하면 대박이다!
“알았어. 내가 애들 풀어서 광산 싹 뒤져 볼게.”
한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우린 밑바닥부터 시작이니까 한꺼번에 마련하면 좋지.”
시장에서 구두를 닦으면서도 밑에 애들 여럿 거느리고 해결사 노릇을 하는 한수다.
정보 수집은 특기요, 수완도 상당하다.
태수는 한수를 믿었다.
“그래. 당분간 광산 쪽은 한수, 네가 전적으로 맡아 줘야겠다. 8월 3일이 지나면 돈이 들어올 거야. 그 돈을 예산으로 잡아서 돌아 봐.”
“형은? 같이 안 가?”
“난 몰리브덴을 팔 판로를 찾아봐야겠어.”
“설마 포항? 나한테 미리 부탁했던 그거?”
“그래.”
제일 먼저 포항부터 가 볼 생각이다.
‘포항 철강 박태종, 청일 그룹 한청호와 앙숙인 자.’
또한 박정환 대통령의 심복.
그를 만나러 간다. 몰리브덴을 제대로 팔아먹으러.
“불 끈다.”
이번엔 태수가 전등줄에 달린 스위치를 껐다.
불을 끄자마자 한수가 베개를 휘둘렀다.
파바바밧.
“어쭈? 피해?”
“형도 제법인데?”
오늘도 어둠 속에서 형제의 투닥거림이 시작됐다.
* * *
막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다.
밖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태수야!”
밖에 나가 보니 훤한 달빛 아래 홀쭉이가 웃고 있었다. 막걸리 한 주전자를 들고.
저 술 좋아하는 놈은 하나도 안 변했다.
“이 시간에 네가 여긴 웬일이야?”
“더운데 잠은 안 오고, 술 생각이 나서.”
7월 말.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때다.
태수도 입맛을 다셨다.
“통금 시간 한참 전에 지났잖아.”
“담 몇 개만 넘으면 우리 집인데, 뭘.”
평상에 걸터앉는 홀쭉이.
주전자 코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잘도 마신다.
크- 소리와 함께 이번엔 주전자를 이쪽으로 건넨다.
태수 역시 주전자를 기울였다.
이 노란색 양은 주전자도 참 오랜만이었다.
“어때? 죽이지?”
“크- 기가 막힌다. 진짜 죽이네. 이거 누구네 막걸리냐?”
“요 앞 국밥집 아줌마네.”
어머니가 허드렛일 하는 국밥집이다.
그 국밥집 아줌마는 음식 더럽게 못한다.
“이 아줌마가 진짜. 또 우리 어머니더러 막걸리 담으라고 한 거야? 종 부리듯 별걸 다 부려 먹네.”
“너희 어머니 음식 솜씨야 이 근방 제일이잖냐. 덕분에 국밥집 아줌마만 아주 노 났더라.”
태수는 막걸리 주전자를 홀쭉이에게 넘겼다.
홀쭉이는 얼씨구나 좋다, 주전자를 받아 마시면서 중얼거렸다.
“갑자기 왜? 꼭 술맛 떨어진 사람처럼. 막걸리 진짜 맛있는데.”
“입에는 착착 감긴다만 마음은 영 착잡하네. 우리 어머니 손이 다 부르트셨던데.”
“어이구, 우리 태수가 철들었다. 얼른 성공해서 효도해야겠다.”
“그럴 생각이다.”
“오, 진짜 결심했구나?”
“그래.”
평상에 나란히 앉자 어디선가 더운 바람에 불었다.
태수는 지금 이 시간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친구 덕분에 한잔하고, 좋네.”
“그렇지? 안주가 없어서 아쉽다.”
“안 그래도 아까 어머니가 전 부치셨는데. 남은 전이 몇 장 있을 거야.”
태수가 부엌을 뒤져 식은 김치전과 파전을 내왔다.
홀쭉이는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크- 입에 짝짝 붙는다! 막걸리엔 역시 파전이지!”
“맛있냐?”
“그럼, 누구 솜씬데! 이야- 어째 식어도 맛있냐. 너희 어머니 솜씨는 인정!”
엄지를 치켜든 홀쭉이가 허겁지겁 전을 집어먹는다.
하도 싱글벙글, 기분이 좋아 보여서 태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넌 맨날 이렇게 많이 처먹는데 살은 왜 안 찌냐? 빼빼 말라 가지고서는.”
“형님 근육이 어디 보통 돌 근육이냐? 이거 유지하는 것도 일이다, 일.”
“근육은 무슨. 뼈 밖에 없구만. 전 모자랄 것 같은데 라면이라도 끓여 줄까?”
“라면?”
홀쭉이가 눈을 번뜩이며 군침을 삼킨다.
그러다가 이내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아냐, 막걸리엔 파전이지. 라면은 소주 안주고.”
“라면이 무슨 안줏거리야. 식사 대용이지.”
“모르는 소리는 하지를 마. 생라면은 맥주 안주.”
“됐다. 전이나 먹어라.”
홀쭉이와 태수는 주거니 받거니 한여름 마당 위 평상에서 술판을 벌였다.
“듣자 하니 너 광산을 얻었다며?”
“어.”
“진짜 할 거냐?”
“해야지.”
“힘들 텐데. 괜찮겠냐?”
“도와줄래?”
“내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됐다.”
막걸리 한 주전자는 금세 동났다.
홀쭉이가 태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우리 막걸리 한 주전자 더 할까?”
“꺼져, 이 술주정뱅이야.”
“아직 안주도 남았는데.”
“늦었다. 그만 가라.”
태수가 먼저 평상에서 일어섰다.
접시를 치우고, 자리를 정리한다.
홀쭉이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막걸리 주전자만 노려봤다.
“딱 한 주전자만 더 하자니까.”
“지금 딱 좋다.”
“내가 네 주량을 몰라? 진짜 이러기야? 너 이젠 쌀 배달도 안 나간다며? 실컷 마시고 늦잠 퍼질러 자도 괜찮잖아?”
“내일 일찍 일어나서 가야 할 데가 있어. 광산에서 나온 몰리브덴 팔러 간다. 너도 같이 갈래? 그럼 더 마시고.”
“쳇, 내가 거길 왜 가? 알았다, 쉬어라.”
빈 주전자를 들고 터덜터덜 대문을 나서는 홀쭉이.
축 처진 어깨를 하고서 하염없이 막걸리 주전자만 보고 있다.
태수는 그런 친구의 익숙한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홀쭉이랑 같이 일할 때가 좋았지. 저놈만큼 믿을 만한 놈도 없는데.’
“홀쭉아, 내일 나랑 같이 포항 안 내려갈래?”
“됐다. 내가 거길 왜 가냐?”
“바닷가 앞 자연산 회에 소주, 어때? 과메기는 있으려 나 몰라.”
“콜!”
저것 봐라.
술 얘기만 나오면 눈에서 광선 나오는 거.
빈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홀쭉이가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평상에 앉은 태수는 가만히 종이 뭉치를 만지작거렸다.
미리 한수에게 부탁한 거였다.
‘안기부 송곳이라더니, 진짜 한 놈만 집요하게 파고들어 구린 거 조사하는 건 타고났다니까.’
한수에게 넌지시 조사 대상과 방향을 정해 줬지만 이렇게까지 해낼 줄은 몰랐다.
‘그럼 포항 철강 사장님을 낚을 미끼도 준비됐고.’
벌써부터 내일이 기대되는 태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