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9화 (9/230)

9. 사채업자에게 차용증을 받아내는 자(2)

명동 사채업자의 큰손, 장말동.

그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독립군을 지원하기 위해 정보를 사고팔아 왔다.

그게 주력이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가 정보를 사고판다는 건 극비 중에서도 극비였다.

태수 역시 먼 훗날 청일 그룹 총비서실장이 되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이놈! 누가 네 뒤에서 장난질을 치는 것이냐?”

뒷배는 무슨.

하지만 어쩔 수 있나.

가진 게 없으면 뻥카라도 쳐야지.

‘하지만 나는 미래를 알지. 보름 후 장말동은 정말 파산하고 마니까.’

미래보다 더 확실한 뒷배가 또 어디 있을까?

“정보 상인이라면서 그런 것도 모릅니까?”

“허-”

대체 오늘 장말동의 말문이 막힌 게 몇 번인가.

‘외통수다. 저 애송이는 칼자루를, 장말동이는 칼날을 잡았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한복 입은 남자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오늘 장말동이가 크게 깨지는구나. 애송이 덕분에 좋은 구경을 했어. 하하하.’

장말동은 송진구와 강한수를 향해 버럭 외쳤다.

“다들 썩 나가! 단둘이 할 말이 있으니!”

상황이 심상치 않다.

한수는 태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사채업자 우습게 보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다.”

“알아.”

“괜한 짓 하지 말고 그만 돌아가자.”

“이미 기호지세(騎虎之勢)야.”

“위험하다니까.”

태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나가 있어. 얼마 안 걸릴 테니까.”

“고집부릴 때가 아니야. 투자 문제는 내가 해결할게. 시일은 좀 걸리겠지만-”

탁.

장말동은 화가 나서 부채로 좌탁을 내려쳤다.

“뭘 꾸물대고 있어! 썩 나가지 못할까! 강제로 끌어내랴?”

한복 입은 남자가 강한수 앞에 섰다.

한수는 어쩔 수 없이 방에서 내쳐졌다.

탁.

장지문이 닫혔다.

이제 이 넓은 방에는 강태수와 장말동, 둘만 남았다.

노려보는 장말동의 눈빛은 매서웠다.

“이 장말동이를 갖고 놀 참이냐?”

독사 같은 눈이 태수를 향했다.

사채업자 특유의 압박감은 사람을 숨 막히게 한다.

하지만 태수의 눈빛에도 독기가 어렸다.

“그래서 살 겁니까, 말 겁니까?”

“감히 이 장말동이에게 협박을 하고 온전히 돌아갈 성싶으냐?”

“선불입니까, 후불입니까?”

태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참고로 후불이라면 차용증을 써 주셔야겠습니다.”

“뭣이라?”

“어음은 안 받습니다. 무조건 일시불, 현금입니다.”

장말동은 태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태수는 슬쩍 달력과 시계를 보았다.

“안 사면 그만이죠. 그럼 전 이만.”

“앉아!”

태수가 일어나려 하자 장말동은 입술을 깨물었다.

“네놈의 말은 믿을 수가 없다. 사채업자가 전 재산 날릴 일이 대체 무에 있으랴?”

“어쩝니까. 위에서 까라면 대차게 까이는 거죠.”

태수의 손가락이 하늘, 아니 천장을 가리켰다.

장말동은 부채를 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위? 설마 박정환이가 또 무슨 일을 벌이는 겐가?’

태수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일 없다 생각되면 깨끗하게 무시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니까 어르신도 저와 지금 계속 대화하고 계신 거겠죠?”

쿵.

장말동은 부들부들 떨었다.

화가 났다.

하지만 박정환이가 벌이는 일 때문에 전 재산을 날릴 수도 있다는데 안 들어 볼 수가 없다.

극비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른 누구보다 정보 상인인 장말동이 더 잘 안다.

‘그런 낌새는 없었는데. 아니야, 박정환이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들이쳐 일을 벌일 게야.’

장말동은 고민했다.

‘어찌할까? 혹여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장말동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안 된다. 잃을 것이 너무나 많다. 내 전 재산이 대체 얼만데!’

드디어 결심이 섰다.

“좋다. 그 정보, 까 봐라.”

“선불입니까, 후불입니까?”

“내가 뭘 믿고 선뜻 돈을 내주랴?”

“후불이면 차용증을 쓰셔야 합니다만?”

“에잉!”

화가 난다.

이 얄미운 놈의 대가리를 쥐어박았으면 소원이 없겠다.

마침내 장말동이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제대로 된 정보가 아니면 1원 한 푼 없을 것이다.”

“좋습니다. 차용증 쓰시죠.”

장말동은 착잡했다.

“허- 이젠 하다 하다 사채업자한테 차용증까지 받아 내겠단 소리렷다?”

“그럼 당장 돈을 주시던가요.”

“······.”

장말동은 가뜩이나 안 좋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일제 강점기는 물론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까지 전부 겪은 장말동의 인생에 이런 진상 또라이놈은 처음이었다.

맹세코.

태수는 품에서 서명날인만 비운 차용증을 꺼냈다.

미리 작성된 차용증을 읽던 장말동은 기가 막혔다.

“이미 이리될 줄 예상하고 전부 준비해 왔구나.”

태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장말동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패배다. 이 장말동이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 손에 농락당했구나.’

차용증에 사인을 하고, 도장을 찍는 장말동.

그 눈에 독기가 번뜩였다.

“그 비싼 정보, 이제 들어 보자.”

드디어 태수의 입이 열렸다.

“1972년 8월 2일, 오후 11시 40분. 박정환 대통령이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 명령’을 발표할 겁니다.”

“긴급 명령?”

“일명 ‘8.3 사채 동결 조치’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뭣이?”

“8월 3일 0시를 기해 사채가 동결될 겁니다. 채권자들은 돈의 출처를 밝혀야만 받을 수 있게 되죠. 신고 기한은 딱 일주일. 그걸로 끝입니다.”

“이런 빌어먹을!”

쿵.

장말동은 화가 나서 주먹으로 좌탁을 내려쳤다.

쿵쿵쿵.

몇 번이나 좌탁을 내려치다 보니 쥐고 있던 부채가 반으로 뚝 부러져 버렸다.

8.3 사채 동결 조치.

제도권 금융을 잠식하고 있던 사채 시장을 흡수하기 위해 박정환 대통령이 취한 극단적인 조치다.

이로 인해 사채업자들은 돈을 제대로 회수하지 못하고, 지하 금융은 몰락하게 된다.

사채업자 중에서도 큰손으로 꼽히는 장말동에게는 가장 귀한 정보였다.

하지만 사람이란 게 그렇다.

전 재산이 한순간에 날아간다는 소리를 그 누가 믿고 싶으랴.

장말동도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된다! 멀쩡한 나라에서 그게 될 법한 소리더냐?”

“지금이 멀쩡한 시국입니까?”

장말동이 좌탁을 내려치던 걸 멈췄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일어날 수도,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다.”

“제인제당, 제인모직, 대한비료, 금산전자, 대현건설, 한국항공, 효도물산. 1969년 10월 조사에서 모두 부실 기업으로 분류되었죠.”

그건 안다.

정보 상인 노릇을 하는데 그 소식을 모를까.

“그게 사채와 무슨 상관이라고.”

“대마불사로 불리는 기업들을 살리기 위해 반시장 정책을 펴는 겁니다.”

“뭣이!”

“박정환 대통령이 내건 국가 주도적 경제 성장 정책의 특징 아닙니까. 기업의 재무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내린 겁니다.”

말이 된다.

‘박정환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대기업을 살릴 겸, 은행을 키울 겸.’

장말동은 힘이 탁 풀려서 그대로 벽에 기댔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장말동은 한참이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만이 유일했다.

‘만에 하나 저 정책이 발표된다면 정말로 난 일순간에 파산하고 만다. 애송이의 말이 맞다.’

장말동의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만에 하나··· 끄응.’

생각이 복잡했다.

“확실한 정보인가?”

한참 만에 장말동이 입을 열었다.

그 짧은 사이 목소리가 탁하게 쉬어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건 알아서 하시죠.”

태수는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고쳤다.

장말동은 속이 끓어 환장할 지경이었다.

“자네, 그 차용증을 가지고 곱게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겐가?”

날 선 협박에도 태수는 여유를 잃지 않는다.

한국 재벌 서열 1위까지 오른 청일 그룹 총괄 비서실장이 태수였다.

장말동의 정보를 태수만큼 제대로 아는 이도 드물 것이다.

‘장말동의 신용은 정평이 나 있었다.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신용이 없다면 정보 상인 노릇은 불가능하다.

장말동은 그걸 목숨처럼 지켜 냈던 사람이다.

그런 장말동이 이런 협박을 꺼내는 이유?

태수는 그 속을 쉽게 짐작했다.

‘체면이 상했을 테지. 덧붙여 내 뒷배에 대한 정보를 캐낼 속셈이고.’

그래서 태수는 자신의 이득과 장말동의 체면을 동시에 챙길 방법을 택했다.

“어르신, 이 극비 정보가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태수가 갑자기 정색하며 이번에도 손가락으로 하늘, 아니 천장을 가리켰다.

자연스레 장말동도 태수의 손가락을 따라 위를 보았다.

태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무슨 수로 이런 극비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을까요? 정보 상인이신 어르신도 모르는 일을.”

“으음.”

맞는 말이다.

“당연히 위에 있는 누군가가 제게 일러 어르신께 몰래 전한 거죠.”

정보 상인이라는 장말동이 일반인인 태수보다 극비 정보를 모른다?

이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대통령과 긴밀한 윗선에서 태수를 시켜 장말동에게 정보를 보냈다?

이건 장말동이 오히려 태수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덧붙여 윗선이라는 뒷배의 눈치를 보느라 장말동이 태수를 해코지할 위험도 줄어들고.

“그가 누구신가?”

“머잖아 알게 되실 겁니다. 명색이 정보 상인이신데.”

“끄응-”

“이것만 알아 두시면 됩니다. 이런 극비 정보를 미리 빼 올 수 있는 자가 어르신의 차용증을 원한다. 그럼 이 차용증은?”

태수가 장말동의 눈앞에서 차용증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끄응-”

급기야 장말동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그래, 가져가라. 썩 꺼지거라! 이 징그러운 놈아!”

“그럼 다음에 뵙죠.”

태수가 등을 돌렸을 때 장말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일 이 일이 진짜라면, 내 그 은혜는 잊지 않으마.”

“좋죠.”

어찌 된 게 괜찮다는 빈말 한 번을 않는다.

은혜는 넙죽 받겠다는 태수.

장말동은 독사 같은 눈으로 이를 갈았다.

“반대로 이 일이 거짓이었을 땐, 너와 네 가족은 뼛가루 한 조각 이 땅에 못 남길 줄 알아라.”

태수는 무시무시한 협박에도 피식 웃는다.

손까지 바이바이 흔들며.

“명동 큰손은 어떻게 은혜를 갚나,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하죠.”

태수는 유유히 장말동의 방을 빠져나왔다.

호언장담한 대로 사채업자에게 차용증까지 받아 내고서.

탁.

태수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장말동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중얼대는 말소리에도 힘이 없다.

“징글징글한 놈, 독한 놈, 배짱 좋은 놈, 맹랑한 놈.”

빠드득.

오늘 늙은이 이빨을 대체 몇 번이나 가는지 모르겠다.

“천하에 너 같은 또라이는 진짜 장말동의 인생에서 처음이다, 처음이야!”

장말동은 헛웃음을 지었다.

“대단한 뒷배를 가진 녀석이었군.”

어디 내가 그 뒷배를 못 찾아낼 줄 아느냐?

장말동은 이를 갈았다.

“왕소금이 어디 있더라?”

우선 소금부터 뿌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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