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사채업자에게 차용증을 받아내는 자(1)
태수는 눈을 빛냈다.
“내기할까?”
“뭐?”
“내가 사채업자한테 차용증을 받아 오면 앞으로 꼬박꼬박 형님이라 부르고, 존댓말 하는 거다?”
“그러니까 일단 말이 되는 소릴 해야-”
“내기 할래, 말래?”
태수는 얄밉게도 싱글벙글 웃었다.
한수의 주먹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좋아. 대신 차용증을 못 받아 내면 내 밑에서 일하는 거야. 내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콜!”
한수는 씩 웃었다.
“당장 곡괭이질 연습부터 해라.”
“너야말로 존댓말 연습이나 해라. 다나까까지는 안 바라니까 요 자는 꼭 붙여야 한다.”
씨익.
웃고 있는 형제 사이엔 불꽃이 튀었다.
* * *
1970년대 한국은 지하 금융인 사채업이 만연했다.
선진국과 달리 은행으로 대표되는 제도권 금융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까닭이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은 연이율 40, 50%에 육박하는 사채도 울며 겨자 먹기로 쓸 수밖에 없었다.
사채업의 주요 고객이 재벌 기업일 정도였다.
명동 사채업의 큰손, 장말동의 집은 안팎으로 으리으리하다.
꼬장꼬장하게 생긴 70대 노인, 장말동은 비단 보료를 깔고 앉아 부채를 부쳤다.
20평에 달하는 큰 방 끝에는 송진구가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내 집에 네 손님이 찾아왔다지?”
“엄밀히 말하면 제 손님이 아닙니다.”
“손님이 아니면? 어떻게 내 집까지 널 찾아왔을꼬?”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에잉?”
“통성명도 제대로 안 한 사입니다.”
장말동은 눈을 빛냈다.
이 집은 송진구조차 몇 번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다.
정재계 거물들만 드나드는 집을 어찌 알고 찾아왔을꼬?
“어떤 놈이더냐?”
“한마디로 또라이 같은 놈이었습니다.”
송진구는 오춘식의 집에서 만났던 강태수에 대해 낱낱이 고했다.
광산 얘기까지 들은 장말동은 눈을 빛냈다.
‘또라이 같은 놈이라. 사람들은 보통 예상할 수 없는 자를 그렇게 부르곤 하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장말동은 한복 입은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한복 입은 남자가 자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 집까지 찾아왔으니 그놈 한번 만나 보자.”
“어르신?”
“뭐 하고 있어? 데려오라니까.”
“예.”
흔치 않은 일이었다.
장말동을 찾아와 돈을 빌리겠다는 사람들은 구름처럼 많았다.
하지만 장말동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건 극소수의 사람들뿐이었다.
또라이.
송진구가 표현했던 단어가 장말동의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드르륵. 탁.
훤칠한 젊은이 둘이 들어왔다.
장말동은 도도한 분위기의 냉미남을 발견하고 감탄했다.
과연, 누가 봐도 눈독 들일 만큼 특출나다.
매우 탐나는 인재였다.
“자네는 누군가?”
“처음 뵙겠습니다. 강한수라고 합니다.”
냉미남이 깍듯하게 인사했다.
“오, 영등포 해결사?”
“절 알고 계십니까?”
“아무렴. 외모 좋고, 수완 좋고, 능력까지 일품이라며? 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네. 직접 보니 과연 그렇구나.”
“과찬이십니다.”
행동거지, 말 한마디 버릴 것 없이 모두 장말동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 영등포 해결사가 어인 일로 날 찾아왔을꼬?”
“그쪽 대신 저랑 얘기합시다.”
냉미남 옆에 있던 놈이 손을 든다.
딱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놈인데, 범상치 않은 연륜이 비친다.
‘희한하구나. 어째 눈빛이 70 먹은 노인처럼 가라앉아 있을꼬?’
거참, 요상하다.
‘어찌 이런 놈이 튀어나왔을까?’
범인과는 느낌부터가 다르다.
젊은이의 야망과 늙은이의 연륜이 교묘히 버무려진 것 같은, 너무도 특별한 느낌이었다.
‘정녕 말로 설명할 수가 없구나.’
대한민국에서 인재 보는 안목이라면 청일 그룹 회장 한청호와 함께 명동 사채업의 큰손을 꼽는다는 말이 있다.
장말동은 태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네는 누군가?”
“강태수입니다.”
“오, 네가 바로 그 또라이란 놈이구나?”
“또라··· 뭐, 어쨌건 절 알고 계시다니 귀찮은 소개는 생략해도 되겠군요.”
태수는 방바닥에 털썩 앉았다.
너무도 거침없이 당당한 태도에 장말동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것 봐라? 이 맹랑한 놈을 보게?’
촤악.
장말동은 살살 부치던 부채를 단번에 접었다.
그걸 보고 송진구의 눈이 커졌다.
‘어르신이 부채를 접어?’
장말동이 제대로 대화하겠다는 뜻을 비쳤기 때문이다.
“송진구를 찾아왔다지?”
“투자자를 찾아왔습니다.”
“과연, 송진구에게는 눈길 한 번을 안 주는구나.”
“그깟 눈길, 나중에 시간 내서 많이 주겠습니다.”
“됐다. 혹시 일자리 안 필요하누? 내 곁에서 일 좀 배워 보지 않을 테냐?”
장말동은 은근하게 웃었다.
‘어르신이 관심을?’
이 역시 무척 흔치 않은 일인지라 이번에는 송진구뿐만 아니라 한복 입은 중년인까지 새삼스러운 눈으로 태수를 보았다.
‘장말동이가 한눈에 구미가 동했다는 뜻이렷다? 과연.’
장말동은 오랜만에 군침을 삼키며 눈을 빛냈다.
“애송아,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느냐?”
“명동의 큰손, 장말동 어르신이 아닙니까?”
“알기는 제대로 알고 찾아왔구나. 어떻게 나를 알았을까? 이 집은 또 어찌 알았고?”
남들은 모두 그를 ‘명동 사채업의 큰손’이라고만 알고 있다.
철저히 가면을 쓰고 음지에서 돈놀이를 해 왔다.
그런데 장말동이란 본명을 알고, 집까지 대뜸 찾아왔다는 것은······.
장말동은 반사적으로 송진구를 보았다.
‘저, 저 또라이 새끼가. 눈 하나 깜짝 않고 어르신과 맞먹는구나.’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걸 보니 송진구도 보통 놀란 게 아닌 듯했다.
장말동은 대번에 송진구가 정보를 흘린 게 아니란 걸 알아챘다.
“애송아, 수완이 제법 좋구나.”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애송이 배짱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어르신이라면 이게 뭔지 알고 계실 테죠?”
태수는 품속에서 문서를 꺼냈다.
광산 권리증이었다.
‘대뜸 광산 권리증을 넘기려고?’
지켜보던 한수는 속이 타서 태수를 바라봤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태수는 가타부타 말없이 의미심장하게 씩 웃어 보일 뿐이었다.
한수는 문득 태수가 신신당부하던 말이 떠올랐다.
-형만 믿어. 내가 무슨 개소리를 하던, 넌 그냥 지켜보기나 해.
-내가 오늘 사채업자한테서 차용증 꼭 받아 내고 만다.
-내기할까?
한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미 대놓고 개소리를 하겠다고 통보한 태수다.
‘좋다, 어찌 하나 일단 두고 본다.’
태수는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어르신, 저랑 동업 한번 해 보시렵니까?”
“내가 왜? 일없다.”
“이런, 아까운 기회 놓치셨습니다.”
광산 권리증을 도로 품에 넣는 놈을 보자 장말동은 황당했다.
“동업하자는 놈이 설득을 안 해? 이럴 때는 무릎걸음으로 기어 와서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는 게다.”
“들을 생각은 있으시고요?”
“······.”
맞는 말이라 말문이 막힌 장말동.
백 번을 설득해 봤자 귓등으로도 안 들었을 터다.
‘참으로 당돌하고 영리한 놈이로다.’
“동업이 싫으시면 투자를 하시죠.”
“일없다.”
수익과 권리를 같이 나누는 동업도 아니고, 이번엔 수익만 나누는 투자란다.
“어째 조건이 더 각박해지누? 흥미가 동할 만큼 좋은 조건을 내놓아라.”
“좋은 조건을 거절한 건 어르신입니다.”
당돌한 녀석.
“삼청 전자, 금산 건설, 대현 자동차까지. 전부 내 앞에서 고개를 조아린다.”
“고개 조아리면 투자하실 겁니까?”
“······.”
도로 말문이 턱 막혔다.
장말동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떨렸다.
‘확실히 보통이 아니구나.’
장말동을 앞에 두고 이렇게까지 큰소리치는 놈은 오랜만이었다.
한복 입은 남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제법. 장말동의 입을 번번이 틀어막을 줄이야.’
장말동은 고개를 저었다.
“애송아, 잘못 찾아왔다. 난 사채업자지 투자가는 아니니라.”
“좋습니다. 그럼 사채라도 씁시다.”
“얼마나 필요한가?”
“2천.”
아파트 한 채가 700~800만 원이다.
“금리는 연 50%다.”
“이율 좀 깎아 주시죠?”
“일없다. 싫으면 은행에 가던가. 괜히 고리 대금이겠느냐? 그럼 담보부터 확인해 볼까?”
“이거면 되겠습니까?”
태수는 품속에서 광산 권리증을 꺼냈다.
“일제 때 버려진 폐광산? 그건 10만 원짜리가 아니냐. 일없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광산 권리증을 잽싸게 품속으로 넣는다.
“후불은 어떻습니까?”
“후불? 담보를 아예 안 내놓겠다는 말이더냐?”
“담보가 없는 대신 제가 훗날 번듯한 은행으로 되갚겠습니다.”
“일없다지 않아. 내 사전에 담보 없는 돈놀이는 없다.”
“이런, 안타깝군요.”
말과 달리 태수는 여전히 싱글벙글이었다.
여유가 넘쳐서 장말동이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당최 감을 잡을 수가 없구나. 만만치 않은 놈이로다.’
행보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자.
경험상 이런 놈은 큰일을 해내곤 한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거침없이 해치워 버리는 자들이다.
장말동 일생에 이런 놈을 딱 5번 봤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천하를 호령했다.
장말동은 독사처럼 눈을 빛냈다.
“의미 없는 실랑이는 예까지 하자. 네놈이 노리는 게 뭣이더냐?”
태수는 씩 웃었다.
“정보를 팔려고 왔습니다.”
장말동은 기가 막혔다.
“돈 빌리러 왔다는 놈이, 이젠 하다 하다 내게서 돈까지 받아 가겠다?”
태수는 얄밉게도 씩 웃었다.
“한순간에 어르신이 전 재산을 날리느냐 마느냐, 그것을 결정지을 극비 정보입니다.”
“뭣이?!”
모두 놀라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