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0만 원의 의미(3)
강한수는 예전부터 유명했다.
‘시장바닥에서 구두나 닦는 어린놈이 애들 여럿 거느리고 해결사 노릇을 한다지? 제법 유능하고 수완도 좋다던데.’
물론 그렇다고 해도 잘나가는 사채업자인 송진구와는 그 격차가 까마득했다.
하지만 강한수 같은 놈들은 보통 나중에 할 일이 정해져 있었다.
뒷골목 왈패, 아니면 사채업자.
그래서 송진구도 강한수를 스카웃하려고 주의 깊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강한수와 같이 다니는 실력자가 또 있었다니.
심지어 정체도 제대로 모른다.
빡!
“후.”
마지막까지 속 시원하게 후려갈기다가 지쳐 허리를 펴는 놈.
태수는 오춘식이 붙들고 늘어졌던 옷을 툭툭 털었다.
“이제 알겠지? 자기가 싼 똥은 자기가 치우는 거야. 왜 애먼 우리 아버지한테 똥물을 튀겨? 이 똥물에 튀겨 죽일 새끼야.”
허리를 펴는 김에 발길질도 한 번 더 한다.
등 돌리고 이쪽으로 걸어오다가도 다시 화가 치미는지 돌아가서 또 몇 대 더 걷어차길 반복한다.
그것도 겉으로 티는 잘 안 나도 맞으면 죽도록 아픈 곳만 골라 걷어찼다.
‘진짜 독한 놈이다.’
‘웬만한 사채업자보다도 집요한데.’
결국 오춘식은 독살 맞은 개구리처럼 축 늘어져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송진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예사 놈은 아니구나. 태수라고 했던가?”
태수가 몽둥이를 들고 송진구에게 다가왔다.
“반납.”
주인 손에 도로 몽둥이를 쥐여 주는 놈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걸 예의 바르다고 해야 하나, 또라이라고 해야 하나.
“너 뭐냐니까?”
“채권자라니까. 같은 말 여러 번 물으시네.”
필요할 때마다 개구리 혓바닥처럼 나오는 저놈의 차용증.
이번엔 그걸 송진구 코앞에 들이민다.
제대로 읽을 새도 없이 콕 짚어 맨 밑을 가리킨다.
“채무자 오춘식, 지장 확인했습니까?”
이번에도 순식간에 도로 들어가는 차용증.
“채무자 오춘식. 이놈 지장 확실하죠?”
이번에도 순식간에 도로 들어가는 차용증.
“자세히 좀 보자, 새끼야.”
“귀중품 아닙니까. 간수를 잘해야죠.”
송진구는 인상을 팍 썼다.
“이봐, 애송이. 너······.”
“차용증 확인했으니까 이제 변제 시작합시다.”
송진구의 말을 뚝 자른 태수.
그러고는 구석에 서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강한수에게 턱짓한다.
“넌 아버지 모시고 먼저 가.”
“너 혼자 어쩌려고?”
“빚 문제는 해결하고 가야 할 것 아니야. 안 그래?”
태수는 품속에서 차용증을 꺼내 팔랑팔랑 흔들다 도로 품속에 집어넣었다.
“빨리 받을 거 받고 끝냅시다.”
“그거 좋지. 그래도 순서는 지켜야지. 안 그러냐?”
“먼저 챙기는 놈이 임자지 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습니까? 이런 일 하루 이틀 해 보는 것도 아닐 텐데.”
“허- 맹랑한 놈일세.”
“다 아는 선수끼리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선수?”
5년 동안 사채업자들에게 시달리다 보면 자연히 빠삭해진다.
물론 당시 태수와 가족들을 괴롭히던 사채업자들은 이놈들이 아니었다.
아마 돈 나올 구석이 보이지 않자 다른 업자놈들에게 차용증을 팔아치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채업자들은 하는 짓들이 죄다 비슷하다.
“난 명동 하이에나 송진구다. 넌 어디서 나왔나? 영등포? 마포? 종로?”
“영등포라 칩시다.”
집이야 곧 철거돼서 어디로 이사 갈지는 아직 모르지만.
태수는 송진구를 지나쳐 집 안을 훑어보며 걸어간다.
“어디 보자.”
“허- 내 앞에서 견적을 내?”
“좀 봅시다.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태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집 안을 둘러본다.
‘진짜 부잣집이네.’
가구와 가전들이 제법 잘 갖춰져 있다.
1970년대에 라디오에 전화, 텔레비전까지 있으니까.
신식 소파와 식탁, 피아노까지 있는 집 안을 둘러보자니 태수는 속이 끓어올랐다.
‘이렇게 잘 살면서 고작 10만 원을 떼먹으려고.’
이들에게 10만 원은 텔레비전 한 대 값도 안 나갈 거다.
하지만 태수네 가족에게 10만 원은 살던 집 한 채와 맞바꾼 보상금이다.
‘아, 자세히 볼수록 짜증 난다.’
태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돈 냄새가 나는 거로 고르자.’
좋은 능력 이런 때 써야지.
태수가 마음을 먹자 사방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 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맡는 돈 냄새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잠시.
‘젠장, 사방에서 돈 냄새가 나잖아.’
역시 부잣집.
하지만 돈 냄새에도 급이 있는 법.
이왕이면 왕건이를 고르기로 마음먹었다.
‘이 냄새는··· 싸구려. 이것도 싸구려.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싸구려······.’
흥미를 끌 만한 돈 냄새는 아니다.
“빨간 딱지 붙은 건 우리가 찜해 둔 것들이다.”
송진구 부하 중 둘이 후다닥 달려왔다.
그리고 품에서 빨간딱지를 꺼내 되는대로 가전제품에 붙이기 시작한다.
태수는 그들을 무심하게 지나쳤다.
“그런 건 관심 없습니다.”
“···뭐?”
송진구의 표정이 묘해졌다.
태수는 거침없이 안방까지 들어갔다.
“오.”
돈 냄새가 난다.
진하다.
엄청나게 진하다.
문득 책상 위에 따로 빼둔 문서들을 발견했다.
담배 연기를 내뱉으면서 다가온 송진구가 으르렁댔다.
“땅문서, 집문서, 전부 건들지 마. 그거 손대는 순간 피 보는 거야.”
“좀 봅시다.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거참, 유난이시네.”
태수는 땅문서와 집문서를 손에 잡히는 대로 대충 살펴보다가 하나씩 송진구 부하에게 넘겼다.
“어? 어어?”
엉겁결에 땅문서를 연거푸 받아 안게 된 송진구의 부하. 품에 억지로 떠안게 된 땅문서와 태수를 번갈아 본다.
저 새끼가 미쳤나? 하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얼굴에 드러내 놓고.
하지만 태수는 그쪽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확실히 땅문서는 먹음직스러워. 하지만 여기 어딘가에 훨씬 더 구미당기는 놈이 있어.’
태수를 보면서 송진구는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을 자꾸 흉악하게 구긴다.
“경고했다. 그건 우리가 챙길 거라고 했다.”
“그러시던가.”
“땅문서, 집문서를 그냥 넘긴다고?”
“관심 없다니까. 몇 번을 물으시나.”
“허-”
그때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찾았다.’
정확히 인지하자 돈 냄새가 강렬해진다.
달콤하고 황홀한 향기에 순간 넋이 나갈 정도였다.
바로 이거다.
“난 이걸로 하겠습니다.”
송진구는 웃음을 터뜨렸다.
“푸흐흡! 난 또 뭐라고.”
태수가 들고 있는 건 광산 권리증이었다.
“그거 나가리야. 일제 때 이미 문 닫은 폐광산. 싹 다 캐서 팔고 튀었다더라. 아무것도 없댄다.”
“폐광산?”
가슴이 마구 두근대기 시작한다.
태수의 눈동자가 흥분으로 마구 떨렸다.
‘설마 오춘식이 떼돈을 벌었다는 그 몰리브덴 광산인가?’
태수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오춘식은 몰리브덴 광산으로 떼돈을 벌어들인다.
그 돈으로 광산업 몇 개를 인수하기 시작해 10년 내에 대한민국 최고의 광산 기업으로 우뚝 섰다.
‘물론 내가 청일 그룹에 들어가서 풍비박산을 내 줬지만.’
하지만 그때는 이미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후였다.
동생 한수와 함께 부모님 묘소 앞에서 오춘식에게 복수했다며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일제 시대 폐광산을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
“허··· 그거 나가리라는 소리가 안 들린 건 아닐 텐데.”
“물론 들었죠.”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 태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난 이거로 하렵니다.”
송진구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냐?”
“믿는다니까요?”
태수는 씩 웃었다.
“그러니까, 난 이거.”
“말이 안 통하네. 야, 짝귀야.”
“예, 형님. 부르셨습니까?”
귀 한쪽이 뭉그러진 남자가 크게 대답했다.
“이 폐광산이 얼마였지?”
“저 양반이 사기당한 금액 말씀이십니까?”
“그거 말고. 실제 가격.”
“아, 그거 얼마 안 한답니다. 한 10만 원 정도?”
10만 원이라.
물가 수준을 감안해 봐도 광산 가격이라고 치기엔 터무니없을 만큼 헐값이다.
‘10만 원이라니, 가격까지 완벽하다.’
차용증에 기재된 금액도 10만 원.
더할 나위 없다.
“짝귀야, 감정 가격은 확실하냐?”
“그럼요. 하도 헐값이라 15년 넘도록 도박판에서 굴러다닌 물건이랍니다.”
“들었어?”
태수가 엄지를 척 내밀었다.
“친절한 설명, 굿입니다. 눈높이 교육에 소질 있으시네. 그렇지만 난 이거.”
그러곤 잽싸게 광산 권리증을 챙긴다.
송진구와 짝귀는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이래도 그걸 고른다고?”
“아까부터 입 아프게 몇 번을 묻습니까?”
“이봐, 애송이. 나 지금 사기 치는 거 아니다. 진짜야.”
“안다니까요? 난 이거. 끝.”
“허··· 이 또라이 새끼가 진짜.”
송진구와 짝귀는 눈을 감았다.
강한수가 참지 못하고 버럭 외쳤다.
“저놈들 말 진짜야! 그러니까 그거 내려놓고 대충 돈 될 만한 걸로 골라!”
“그래서 난 이거.”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어! 너 바보냐?”
도끼눈을 뜬 아버지가 한수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이놈의 자식이 싸가지 없이, 어디 제 친형더러 바보래?”
송진구가 피식 웃었다.
“너 강한수 형이었냐?”
“그렇습니다만.”
“동생의 어림 반 푼어 치도 안 된다는 그 못난이 형? 식충이, 민폐덩어리, 인생 낭비, 기생오라비?”
“······.”
아마도 지금 그런 별명으로 불렸었지.
철모르고 막살던 시절이라 그렇다.
“잘난 동생이 뜯어말리는데도 진짜 그걸로 가져갈 거야?”
“몇 번을 말합니까. 아, 고작 10만 원짜리 채무 변제하면서 더럽게 오래 걸리네.”
송진구가 느닷없이 귀를 판다.
“얼마?”
“10만 원이요.”
“10만 원?”
“10만 원.”
“하는 걸 보면 한 1,000만 원은 빌린 줄 알았는데, 진짜로 10만 원?”
“계속 같은 거 물어보실 겁니까?”
“······.”
“까짓 것 이자는 쿨하게 빼줍시다. 직거래니까.”
“······.”
이번에도 차용증이 순식간에 나와서 송진구 코앞에 붙었다.
금액만 보여 주고 또다시 사라지는 차용증.
진짜로 100,000원이 떡하니 적혀 있다.
“금액 확인했죠?”
송진구는 기가 찼다.
“그놈의 차용증, 자세히 좀 보자.”
“안 됩니다.”
“왜?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라면서?”
“막말로 돈줄 아닙니까? 당신은 차용증을 다른 사채업자에게 내어 줄 수 있습니까?”
못 주지. 안 주지.
송진구는 입을 다물었다.
“전 이거 먹고 떨어지겠습니다. 됐죠?”
차용증이 들어간 태수의 품속으로 광산 권리증도 뒤따라 슥 들어간다.
사채업자들은 동시에 미간을 구겼다.
‘또라이다.’
‘그것도 아주 상또라이다.’
‘고집이 말도 못해. 말이 안 통해.’
송진구는 피식 웃었다.
“그래, 맘대로 해라, 그까짓 거.”
‘됐다!’
태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송진구가 후딱 꺼지라고 손사레 쳤다.
“아버지 들으셨죠? 갑시다. 나가죠.”
태수의 손짓에 강한수가 아버지 팔을 잡고 현관문을 향했다.
“춘식이······.”
아버지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제 친구를 힐끔 보았다.
그리고 그때 멍하니 넋을 놓고 헛웃음만 짓던 오춘식이, 광산 권리증이란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 돼! 광산만은 안 돼. 그건 내 거야. 절대로 못 줘!”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오춘식이 태수에게 달려들었다.
“내놔!”
“야, 저 새끼 붙들어.”
하지만 사채업자들에게 바로 붙들렸다.
오춘식은 발버둥 치며 울부짖었다.
“네가 감히 내 광산을 날름 먹으려고? 고작 10만 원에 네가 그걸 홀랑?”
태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보시다시피 그렇게 됐습니다. 도장이나 찍으시죠.”
“누구 맘대로?”
대답은 송진구가 대신 했다.
“그야 채권자 마음대로지. 그러니까 누가 사채 쓰래? 돈 빌리래? 돈 떼먹으래? 돈 안 갚으래?”
송진구가 부하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얘들아, 얼른 도장 찍고 마무리하자.”
“예, 형님.”
“이거 놔!”
오춘식은 한사코 거부했지만 사채업자들이 억지로 지장을 찍도록 만들었다.
오춘식은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광산은 안 돼! 내가 그걸 사려고 전 재산을 털었단 말이다!”
태수는 현관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아버지를 힐끔 보았다.
“우리 아버지가 치른 값은 당신보다 훨씬 큽니다.”
10만 원.
누군가에게는 한 달 치 월급.
하지만 우리에게는 집 한 채와 바꾼 보상금.
아버지가 친구라 믿었던 사람에게 건넸지만 막돼먹은 차용증으로 돌려받은, 40년 우정의 금액.
연대 보증으로 얽혀 돌아가시게 된 아버지의 목숨 값.
“아버지와 당신의 관계, 이걸로 끝냅시다.”
보란 듯이 눈앞에서 차용증을 찢었다.
쫘악. 쫘악. 쫙.
잘게, 아주 잘게.
다시 이어 붙일 엄두조차 안 나도록.
파앗.
태수는 허공에 차용증 조각을 흩뿌렸다.
눈처럼 뿌려지는 차용증 조각을 보며 오춘식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 광산이······.”
전 재산을 걸고 꿨던 꿈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허공에 흩어진다.
‘10만 원짜리 광산, 잘 받았다.’
태수는 몸을 돌려 그 집에서 나왔다.
돈 냄새 풀풀 나는 광산 권리증을 드디어 얻었다.
‘깔끔하게 처리했으니 앞으로 사채업자들이랑은 만날 일 없겠지.’
사채업자에게 꼬투리라도 잡힐까 숨기느라 고생했다.
차용증을 알아보지도 못하게 잘게 찢었으니
‘연대 보증도 이걸로 해방이다.’
어우, 이제 속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