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0만 원의 의미(2)
“강태수,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동생 한수는 꼭 태수를 저렇게 성까지 붙여 부르곤 했다.
예전에는 그렇게 우애 좋은 형제였는데, 태수의 잘못으로 언제부터인가 저렇게 삐뚤어졌다.
‘한수가 저러는 것도 다 내 죄지. 제대로 바로잡았어야 했는데 내가 피하고, 외면하기 급급했으니.’
태수는 눈을 감았다.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어렸던 태수는 더 어린 한수의 손을 쥐고 놀러 나갔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돈 냄새에 홀려서 동생을 놔두고 자리를 떠 버리고 말았다.
당시에는 어려서 돈 냄새만 맡으면 정신을 못 차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잃어버린 한수는 온 가족이 찾아 나선 끝에 얼마 뒤 시장바닥에서 발견됐다.
한수는 형이 자신을 버렸다고 했다.
그때부터였다.
한수가 태수를 원수 보듯 봤던 게.
말끝마다 남처럼 강태수라 부르며 으르렁댔던 게.
태수는 죄책감에 한수를 볼 때마다 피하곤 했다.
그게 형제 관계를 더욱 악화시켜 지금에 이르렀다.
‘한수는 죽을 때까지 저랬지. 한수가 죽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이번에는 내가 바로잡겠다. 비뚤어진 우리 형제 관계를.’
한 걸음씩 다가갈 거다.
예전에 사이좋았던 형제 사이로.
태수는 결심을 굳혔다.
“강태수가 뭐냐. 형이라고 불러야지.”
처음이었다.
언제나 먼저 피하던 태수가 동생을 나무라는 건.
어그러진 사이를 바로잡아 보려고 노력하는 건.
“형이 형다워야 형 대접을 해 주지.”
“앞으론 형이라고 불러.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까.”
한수가 노골적으로 노려본다.
그 모습이 익숙해서 더 가슴이 아려 왔다.
상처받은 한수의 모습을 형이 되고서도 어루만져 주지 않고 내버려뒀기 때문에.
어렸던 한수는 지금도 저렇게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있는 것이리라.
‘지금은 차용증부터 해결해야지.’
태수는 고개를 들었다.
“안 가고 뭐해? 앞장서.”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아버지 빚 해결하러 가자는 거지. 괜히 사채업자랑 엮여서 좆 되기 전에.”
태수는 차용증을 흔들었다.
“너도 이 차용증 읽어 봐라. 오춘식 그 새끼가 연대 보증이랍시고 아버지한테 책임을 다 뒤집어씌웠어.”
“뭐?”
한수가 재빨리 차용증을 채간다.
꼼꼼히 읽어 내려갈수록 녀석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게 눈에 보인다.
“이,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이건 사기잖아! 이게 무슨 억지야!”
“그러니까 얼른 가자고. 일 커지기 전에.”
태수는 차용증을 도로 가져와 품속에 넣었다.
그러곤 한마디 덧붙였다.
“일의 경중부터 구별해. 지금 어느 게 중요한 일이야?”
한수가 입을 다문다.
“뭐해? 앞장서지 않고.”
“따라와.”
찬바람 쌩쌩 부는 얼굴을 하고서 한수가 뛰어간다.
“똥폼 잡긴.”
어째서인지 태수도 이 악물고 뛴다.
“전력질주냐?”
“착각이다.”
태수가 쌩하니 한수를 재꼈다.
착각이 아닌 것 같은데?
한수도 이를 악물고 내 달렸다.
파바바밧.
두 형제 뒤로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 * *
태수와 강한수가 떠난 집.
어머니는 치마폭에 담긴 돈을 슬며시 어루만졌다.
지폐라고 해 봐야 천 원짜리 몇 장.
대부분 동전으로 채워진 10만 원이었다.
“우리 아들 돈, 아까워서 어찌 쓰누.”
판잣집이 헐리면서 보상금으로 받은 돈 10만 원.
장남이 내놓은 돈도 10만 원.
“다 같은 10만 원이다만 어찌 우리 아들 모아 놓은 돈에 비할 수 있을까.”
안 쓰고, 안 입고, 안 먹고.
몇 년간 힘들게 모았을 돈인데.
그런 줄도 모르고 여태 한심하게 여겼다니.
“이런 돈이 있었으면 맛난 거나 사 먹을 일이지.”
차마 이 돈은 건들지 못하겠다.
하지만 당장 길바닥에 나앉게 생긴 상황이다.
“태수 말대로 해야지. 우리 장남 뜻대로.”
기운이 절로 난다.
어머니는 치마폭을 소중하게 감싸 들었다.
10만 원이 이토록 묵직하게 느껴지다니.
“이럴 때 보면 남편보다 아들이 더 낫다니까.”
눈물 젖은 눈에 흐뭇한 웃음이 번졌다.
큰아들이 이리 든든한 걸 지금껏 왜 몰랐을까.
“우리 태수, 어수룩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릇이 큰 거였어.”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간다.
태수도 아들이다.
그것도 큰아들, 장남.
어찌 믿고 싶지 않을까.
“허풍이라도 좋네. 사내가 되어서 큰 꿈을 꿔야지. 종지 그릇 같은 제 아버지를 안 닮아서 정말 다행이야. 암, 그래야지.”
말만이라도 기뻤다.
그렇게 말해 줘서 잠시나마 설렜다.
“우리 태수, 이따 돌아오면 뜨끈한 해장국부터 먹여야지. 술 많이 마신 것 같던데 밥부터 먹여 보낼 것을.”
어머니는 서둘러 부엌에 들어갔다.
해장국을 끓이는 냄새가 솔솔 나기 시작한다.
어느새 나지막하니 콧노래 소리까지 들려온다.
“조금 전까지 세상을 다 잃은 것 같더니, 참 사람 마음도 간사하지.”
어쩐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이다.
* * *
마당까지 딸린 으리으리한 2층 양옥집이 보인다.
“여기다.”
“채권자인 우리는 당장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는데, 채무자 주제에 좋은 집에서 사네.”
이런 부잣집에 살면서 뭐 주워 먹을 것 있다고 10만 원을 빌려 가고 보증을 떠넘겼나?
화가 난다.
배은망덕한 놈!
“어떤 양반인지 낯짝 구경이나 좀 해 보자.”
“동감이다.”
이쪽은 그 10만 원 때문에 집 안이 발칵 뒤집혔는데 말이다.
“그런데 먼저 온 사람들이 많네.”
양옥집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대문 근처에서 기웃대던 사람들이 물었다.
“너희도 돈 받으러 왔어?”
“그쪽도?”
끄덕끄덕.
오춘식이 이 좋은 집을 두고 야반 도주를 한 이유가 있었다.
돈을 빌린 게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늦으면 숟가락 하나 못 건지겠네.’
이럴 때는 먼저 돈 받는 게 장땡이다.
태수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먼저 온 사람들이 소매를 잡고 뜯어말렸다.
“들어가지 말고 여기 있어. 지금 안에서 왈패 놈들이 행패 부리고 있으니까.”
“무서워서 들어갈 수가 없어.”
“몽둥이찜질에 다들 쫓겨나왔어.”
“아주 악질이야. 다짜고짜 사람을 막 패더라니까.”
설마 벌써 사채업자가 떴나?
태수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연대 보증! 아버지 살해! 야산 암매장!’
사채업자만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그때 안에서 커다란 비명이 들려왔다.
“그만하게! 그만 좀 해! 사람 죽는다!”
아버지 목소리였다.
“이, 이 사람들아. 때리지 말어!”
이쪽을 돌아보는 한수와 눈이 마주쳤다.
태수는 한수보다 한발 먼저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집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악! 그만! 아파, 제발 그만해!”
험상궂게 생긴 남자들이 한 사람을 둘러싸서 때리고 있었다.
일명 다구리.
다행히도 다구리당하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사채업자 한 사람을 붙들고 사정하고 있었다.
“아이고, 이러다 사람 죽겠어. 그만 좀 하세.”
“어이, 아저씨! 말로 할 때 비켜.”
아버지는 한창 얻어맞고 있는 당신의 친구 앞을 막아섰다.
“이 사람아, 춘식이가 돈 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 돈을 지금 당장 내라고. 없잖아? 이러니 사람이 열 받아, 안 받아?”
매 맞던 오춘식이 울부짖었다.
“저 친구한테 달라고 하세요! 보증, 보증을 서 줬으니까 분명 돈을 내줄 겁니다.”
“춘식이! 보증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는 놀라 멍하니 섰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오춘식은 남자들에게 매달리느라 바빴다.
“이자 두둑하게 얹어서 꼭 돌려 드리겠습니다. 광산만 제대로 채굴하면······.”
“못 기다리겠다면 어쩔래?”
퍽.
“시발! 사채를 쓰지 말던가, 제때 갚던가.”
퍽퍽퍽.
“사채 무서운 줄 몰랐어? 우리가 핫바지로 보였디?”
“아, 아니! 광산이 제대로 돌아갈 데까지 저 친구가 대신 갚는다니까요?”
“누구? 이 아저씨?”
“연대 보증이 그래서 확실한 거 아닙니까.”
친구 말에 아버지는 그저 비통하게 “춘식이!”하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남자들은 그런 아버지를 힐끔 바라봤다.
하지만 오춘식이 빌린 돈이 얼마인가?
옷을 보니 연대 보증이고 뭐고 빚을 갚기는커녕 먹고 죽을 돈도 없어 보였다.
결국 다시 매타작이 시작됐다.
아버지는 눈을 질끈 감더니 다시 이를 악물고 사채업자 허리춤에 매달렸다.
“그만하게! 돈이 죄지 사람이 무슨 죄인가.”
“돈 없는 사람은 죄인이야. 이거 안 놔?”
“그만 때린다고 하면 놓겠네.”
“에이, 시발. 이걸 콱!”
사채업자가 몽둥이를 힘껏 휘둘렀다.
‘어엇!’
아버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앞으로 누군가가 뛰어들어 사채업자의 손목을 와락 붙들었다.
“태수야!”
앞을 막아선 아들의 등을 보고 아버지가 소리쳤다.
“한수야, 아버지 모셔라.”
“아버지, 이쪽으로.”
한수가 서둘러 아버지를 끌어당겼다.
손목을 붙들린 사채업자가 태수에게 눈을 부라린다.
“시발, 넌 뭐야?”
“채권자.”
부르르.
태수와 사채업자는 몽둥이를 두고 대치했다.
“사람 좀 가려 가며 팹시다.”
“이 새끼가?”
“이쪽은 채권자, 저쪽은 채무자. 왜 애먼 사람을 잡습니까?”
사채업자 송진구는 미간을 와락 구겼다.
안 그래도 험악하게 생긴 인상이 한껏 포악해졌다.
“눈에서 힘도 좀 풀고요. 힘이 남아도시나 보네.”
“어쭈?”
이걸 보고도 쫄지를 않네?
송진구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사채업자라면 채무자나 족치면 그만 아닙니까? 엄한 데서 시비 붙지 맙시다.”
“허, 이 새끼가 지금-”
“됐고, 저는 저쪽 채무자에게 볼일이 있어서 이만.”
아차 할 새도 없이 태수가 능숙하게 팔을 푼다.
사채업자를 한두 번 상대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참, 이거 잠깐 빌립시다.”
팟.
또 아차 하는 사이에 들고 있던 몽둥이까지 빼앗겼다.
송진구는 와락 얼굴을 구겼다.
“이 새끼가 감히 형님께!”
그걸 본 근처의 남자들이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런 그들을 향해 송진구가 손을 들어 보였다.
“잠깐 놔둬 봐. 채무자한테 볼일이 있다잖냐.”
“형님, 그래도 저 새끼가 형님께 너무 건방지잖습니까.”
“괜찮다. 왠지 이쪽 바닥에서 꽤 오랫동안 굴러다닌 놈 같단 말이지. 희한하게 익숙해.”
그야 5년이나 사채업자한테 사채 빚에 시달리느라.
그게 너희들은 아니지만, 사채업자들은 하는 짓들이 죄다 비슷하더라고.
저벅저벅.
송진구에게서 빼앗아 든 몽둥이를 들고 오춘식에게 다가가는 태수.
한 걸음, 한 걸음에 설명하기 힘든 박력과 분노가 느껴진다.
‘오춘식, 네놈 때문에 부모님이 비참하게 돌아가셨다.’
태수가 오춘식을 노려보자 박력이 대단했다.
사채업자들은 태수의 기세에 밀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태수야! 왔구나!”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있던 오춘식.
그가 태수를 보고 반색했다.
“네가 와 줄 거라 믿었다! 우리 한수도 왔구나! 다들 잘 왔다! 얼른 삼촌 좀 구해다오!”
“내가 왜?”
“응?”
오춘식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악마처럼 사악하게 웃고 있는 태수가 있었다.
“우리 아버지를 사채업자한테 팔아넘기는 거, 내가 구경 잘했고.”
“그, 그건 오해-”
“우리 집 보상금도 홀랑 쳐 드셨다고?”
“태, 태수야?”
“집이 참 좋네? 가전제품에 가구도 새것 같고. 이런 건 얼마나 하나?”
“그, 그게······.”
태수는 눈을 희번덕 떴다.
“그리고 내가 차용증을 아주 자아아아아아-알 구경했거든?”
태수는 품속에서 꺼낸 차용증을 오춘식의 눈앞에 들이밀고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품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차용증.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매끄럽게 이어졌다.
“차용증?”
“당신이 직접 작성했다며. 알아보기도 힘들게 한문으로 빼곡히도 적으셨더만. 자, 다시 자세히 봐.”
차용증은 이번에도 파리를 낚아채는 개구리 혓바닥처럼 순식간에 나왔다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사채업자들은 나직하게 감탄했다.
‘오오, 차용증 내밀기. 이 바닥 고급 기술인데.’
‘저 새끼, 뭐 하는 새끼야?’
반면 오춘식은 하얗게 질렸다.
“오, 오해다! 태수야.”
“오해? 이 단어를 보고도 오해란 소리가 나와?”
차용증은 필요할 때면 품속에서 다시 나왔다.
오춘식의 눈앞에 ‘연대 보증’ 단어를 콕 찍어 보이자마자 나왔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돌아가는 차용증.
찔리는 게 있는 오춘식이 입을 꾹 다물었다.
“오춘식 씨, 이제 뒈질 이유는 잘 알았겠지?”
“떽! 삼촌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삼촌은 무슨. 우리 아버지한테 이런 짓을 해 놓고도?”
빡!
“켁!”
“당신 덕분에 길바닥에 나앉게 되셨다며 어머니가 우셨다.”
빡!
“40년 지기가 직접 써 줬다는 차용증을 보고 흐뭇해하던 아버지도 우셨다.”
빡!
“사채는 패가망신의 근본이다! 모르냐? 남의 가정을 풍비박산 낸 이 더러운 잡놈아!”
“태수야! 이 고비만 넘기면!”
“닥쳐! 이 쳐 죽일 새끼야! 우리가 왜 너 같은 새끼 뒷감당을 해야 하는데! 당신이 뭐라고!”
태수는 화가 나서 몽둥이에 힘을 더 실었다.
매질이 어찌나 살벌한지 오춘식은 대꾸조차 못했다.
“연대 보증이 확실해?”
“우리더러 네 사채를 대신 갚으라고?”
“돈 구경 한 번 못해 본 우리 아버지가, 왜 사채업자에게 끌려가셔야 하냐!”
“야반도주를 했다고? 이렇게 좋은 집에! 비싼 가전에! 호의호식하면서!”
“우리는 당신 때문에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는데!”
“오춘식, 이러고도 네가 사람이냐?”
매타작을 지켜보던 사채업자들은 나지막하게 중얼댔다.
“형님, 저놈 보통이 아닙니다.”
“독한 놈. 골고루 야무지게도 팹니다.”
송진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못 보던 놈인데.”
송진구는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눈으로 모든 걸 지켜보는 소년이 보인다.
태수의 동생, 한수였다.
“영등포 해결사 강한수라면 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