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달래줄 차례
“시간이 많이 남은 편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로 판단을 내릴 정도는 아닙니다. 좀 더 생각해 보시죠. 억압으로 인한 평화를 원하느냐. 선의의 경쟁을 하겠느냐 말이죠.”
고민하고 있던 퍼틴에게 어느 정도 여유를 줬다.
이 자리에서 바로 판단을 내리라는 건 어떻게 보면 욕심이었다.
그러니 천천히 생각하면 되는 거다.
어떤 선택을 내려야 러시아가 성장할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
‘답이 정해진 선택지지만.’
전생에야 천연자원과 가스로 인해 러시아가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생은 그걸 무효화 시킬 JH 중공업이 버티고 있었다.
당장은 다른 국가들이 힘들어하겠지만, 확실한 해결책이 존재한다 이거다.
만약, 그새를 못 참고 러시아를 도운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는 경제적 후폭풍을 맞게 될 거다.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투자가 들어간 JH 인베스트먼트.
자동차 산업과 전자기기 산업에 없어서는 안 될 JH 배터리.
그리고 미래를 책임져 줄 JH 중공업까지.
이 세 가지를 견뎌낼 자신이 있으면 JH 그룹을 무시해도 될 것 같다.
그런 국가는 없을 거지만 말이다.
“만약, 선의의 경쟁을 하겠다면 연락주시죠. 대신, 선택을 내렸다면 확실히 보증도 서야 될 겁니다. 약속을 어길 수 없도록 말이죠. 물론, 여기엔 미국도 피해 갈 수 없을 거고요.”
한참 동안 답이 없는 퍼틴.
어느 정도 시간을 줘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몸을 돌려 밖으로 향하려 했었다.
그 순간,
퍼틴이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듯 나를 불러세웠다.
“잠깐 기다리지.”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자네가 말한 것처럼 선의의 경쟁을 택한다면 미국은 자네가 설득하는 건가?”
“그럴 생각입니다.”
“흠…….”
퍼틴의 질문처럼 선의의 경쟁을 선택한다고 한 듯, 미국이 다른 선택을 하면 답이 없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관계가 악화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그만큼, 미국 역시 설득해야 됐고, 그 역할도 내가 할 예정이었다.
“그럼 길게 고민할 이유가 없군. 자네가 말한 대로 하겠네.”
“…좀 더 생각해 보시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어이가 없군. 이런 상황을 만들고, 고민하라니. 다른 선택을 하면 러시아가 남는 건 뭐지?”
“…잘 선택하셨습니다. 이번 선택이 후회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보죠.”
다행이다.
일단, 가장 큰 산을 넘은 셈이다.
물론, 큰 산을 넘었다 해서 앞에 장애물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번만큼은 아니지만, 그와 비견될 정도로 힘들 것 같은 미국의 설득.
여기까지 마무리해야 내 일도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자네 러시아로 올 생각 없나? 내가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지.”
“저한테 말입니까?”
“…내가 허튼소리를 했군. 자네가 욕심을 내면 아무것도 아닐 텐데……. 늙은이의 추태라고 봐주게.”
“저를 좋게 봐주셨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다음에는 웃는 얼굴로 뵙겠습니다.”
“나 역시 그랬으면 좋겠군. 나가면 요원들이 안전하게 안내해 줄 걸세.”
생각보다 좋은 결과물에 미소를 지은 나는 퍼틴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넨 후,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뭔가 희열이 넘친다.
오랜 시간 동안 걱정해 온 문제를 일차적으로라도 해결해서일까?
작품을 성공했을 때 느꼈던 기분과 유사하게 느껴졌다.
‘JH 그룹 회장으로서 이런 기분은 처음이군.’
이제 남은 건 미국을 달래는 것뿐.
괜찮다.
미국을 달래기 위해서 한 가지 더 남겨놓았으니까.
미국이 내가 내어준 당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한 번 세계의 패권을 바꾸는 것도 고민해야 되겠다.
러시아와 중국.
그 중심에 한국을 추가해서 말이다.
‘그런 일이 없기를…….’
이 경우는 진짜 최후의 최후를 대비한 수단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내야 될.
그렇다고 최악의 상황이 오면 어쩔 수 없이 써야 될 수단 말이다.
부디 미국이 내 뜻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 * *
“젠장……. 이 보고서에 적힌 게 진짜 사실이야?”
“…그렇습니다.”
“하……. 이럴 줄 알고, 러시아로 향하는 걸 무조건 막으라고 하지 않았나.”
“태도가 너무 강경해서.”
미국의 대통령은 보고서를 보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행복한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러시아를 압박하기 위해 더할 나위 없는 JH 중공업.
그게 저절로 미국의 손에 들어왔을 땐, 하루 종일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JH 그룹 회장에겐 평화를 위해 사용한다고 했지만, 어디 세상일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가.
이런 저런 일이 생기다 보면 알게 모르게 영향력이 생길 거다.
그건 곧, 성장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를 압박할 무기가 될 거고.
그렇게 행복한 상상을 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뜬금없이 러시아를 간다고 한다.
그래.
여기까지도 괜찮았다.
JH 그룹 회장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았으니까.
그런데 왜일까…….
“왜 이딴 보고서가 올라오냔 말이야…….”
“…….”
“우리가 이걸 빌미로 압박할 수 있겠나?”
“…힘들 겁니다……. 더군다나 JH 그룹 회장이 말하길, 미국과 만남 직후 러시아한테서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미국이 보안을 신경 썼다면 이런 일도 없을 거라고…….”
“너무 오랫동안 고여있었던 건가? 도대체 어떻게 정보가 샌 거지?”
“…죄송합니다. 거기까진…….”
어이가 없다.
중요한 대화였기에 장관급 인물이 아니면 존재조차 모르는 장소에서 만남을 가졌다.
도대체 어디서 정보가 샜냔 말이다.
“그걸 감안하고도 압박하면?”
“JH 그룹 회장의 입장이 바뀔 겁니다. 중국과 손잡기라도 한다면…….”
“최악이군…….”
안 그래도 급 부상하는 중국을 막기에 벅참을 느꼈다.
그렇기에 미국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도 무역 전쟁을 시작했던 거고.
그렇게 겨우 성장을 막아섰는데, JH 그룹이 중국에 붙는다?
그것만큼 최악의 경우가 없었다.
“이거 완전 나라가 잘 못 됐군. 일개 기업인한테 이렇게 휘둘려야 되다니…….”
“…외람된 말씀이지만, 지금 보면 일개 기업인 수준이 아닙니다. 이번에 일로 JH 그룹 회장의 행적을 조사해봤는데, 알고 본 건데도 감탄이 나옵니다.”
“하긴……. 미국의 전설적인 투자자도 JH 그룹 회장한테는 한 수 접고 들어가니까…….”
“그 정도가 아닙니다. JH 중공업과 JH 배터리, 그리고 JH 바이오까지 이것만 해도 대단합니다. 하지만 JH 인베스트먼트에 비하면 양호할 정도입니다.”
그는 머리가 아파져 왔다.
앞서 말 한 회사만 하더라도 하나하나가 업계를 주도할 정도로 압도적인 기업이었다.
관련 업계가 JH 그룹의 눈 밖에 벗어나면 경쟁조차 불가능할 정도인 그런 회사들이란 말이다.
그런 회사가 양호해 보일 정도라니…….
“관련 보고서는?”
“여기 있습니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올라오는 두통에 그는 보고서를 요구했다.
보좌관이 내미는 보고서를 읽기 시작한 미국의 대통령.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 있는 목록들 이전에 보고 올린 거 아니야?”
“맞습니다.”
“그때 주제가 미래를 선도할 기업들이었을 텐데?”
“…그것도 맞습니다.”
“그럼, 여기 적힌 회사가 대부분 JH 인베스트먼트의 투자를 받았다는 거야?”
“…전부 다 대주주 수준입니다.”
…….
이제는 헷갈리기까지 했다.
과연, JH 인베스트먼트는 미래 가능성이 높은 회사를 투자했던 건지, 그게 아니라 JH 인베스트먼트가 투자해서 미래 가능성이 높아졌는지 말이다.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야?”
“불가능합니다. 역대 기업 중 이 정도로 선견지명이 뛰어났던 기업이 없습니다.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로스차일드 가문 그 이상이 될 겁니다.”
“…그 가문은 몇백 년을 이어오면서 쌓아온 부일 텐데?”
“그래서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저희 미국이 함부로 못 한 이유기도 합니다.”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JH 그룹이 설립된 건 불과 10년이 채 지나지 않았다.
그에 반해, 로스차일드 가문은 몇백 년 전부터 부를 이어온 가문이란 말이다.
그런 가문을 이 짧은 시간에 넘어선다?
이 정도면 세간에 알려진 정보보다 더한 괴물이었다.
“일단은 대화를 나누는 게 중요하겠군.”
“저 역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답인 것 같습니다.”
“연락해.”
“네, 알겠습니다.”
지금 상황이 짜증 나 죽겠지만, 별수가 없었다.
무력적인 면에서 모르겠지만, 현대사회에서는 무력보다 경제의 힘이 더 강했다.
즉, JH 그룹의 뜻을 따라야 된다는 거다.
물론, 도를 넘는 행동을 하면 그에 맞는 보복을 할 수 있겠지만, 자신이 아는 JH 그룹 회장이라면 조절을 잘할 거다.
절대, 미국한테 명분을 주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끌어나갈 거란 말이다.
‘준비를 해야겠군.’
화가 나는 건 화가 나는 거고, 준비는 또 다른 문제였다.
이런 상황이 처음이나 다름없지만, 어쨌든 헤쳐 나가야 할 문제.
최대한 JH 그룹 회장이 요구할만한 것들을 검토하고, 다음 만남에서는 이런 허점을 허락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처럼 또 당할 테니까.’
* * *
“회장님, 미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대화하고 싶다 합니다. 절대 악감정이 없으니 오해하지 마시고, 아직까지 미국의 친구로 여긴다고 합니다.”
“참을성이 좋군요.”
참, 미국이란 나라가 참을성이 좋은 것 같다.
나라면 절대 못 참을만한 행동을 너그럽게 넘어가 주다니.
그러니 선물을 하나 가져가야겠다.
러시아는 계약을 통해 어느 정도 묶여있는 상태.
이제는 러시아가 아닌 미국을 달래줄 때다.
“JH 바이오에서 들려온 연락은 없습니까?”
“백신은 만들었고, 임상실험에 들어가야 된다고 합니다.”
“때마침 선물이 준비됐군요.”
“…회장님이 시기를 맞추신 거 아닙니까?”
“뭐……. 그것도 운이 따라서 된 거죠?”
사실, 비서실장님의 말이 맞았다.
이번 일을 준비하던 나는 계속해서 JH 바이오와 JH 중공업의 경과를 살펴봤고, 차근차근 준비해 왔다.
물론, JH 중공업의 성과가 빠른 건 실제로 예상외였다.
다행히도 백신에 대해 아는 게 있던 나는 조언을 건넸고, JH 바이오가 제때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이번 일만 마무리 되면 진짜 뒤로 물러나실 생각입니까?”
“그래야죠. 이제 진짜 작품에 집중하고, 서아랑 시간도 가져야 될 것 같네요. 이런 식으로 일에 집중하다 보면 서아와 결혼도 미뤄지고, 가정도 못 이룰 것 같거든요.”
“이해는 하지만 아쉽네요……. 회장님이 짧은 기간 동안 이룬 업적을 생각하면……. 워낙 말이 안 되다 보니 상상이 안 가네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합니다.”
실제로 좀 쉬고 싶었다.
전쟁을 막는다면 내가 사업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는 다 이뤘다고 봐야 된다.
이미, 상장하는 순간, 세계 1위 기업은 따놓은 당산이고, 대현 그룹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든 지 오래다.
‘잔재가 남았지만…….’
그 정도는 JH 그룹이 기침하면 날아갈 정도.
딱 그 정도였기에 이제는 관심도 안 갔다.
그러니 좀 쉬고 싶었다.
이번 일을 마치고, 서아와 결혼을 한 뒤, 가정을 이루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미국과의 대화가 중요하겠군.’
마지막 남은 일.
변수 없이 잘 마무리되길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