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그간의 성과
‘어디서 샌 거지?’
한국으로 돌아와 앞으로의 미래를 준비하던 나는 당황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글쎄, 러시아의 대통령이 나와의 만남을 원한다는 거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당황하진 않을 거다.
미국과의 대화가 알려졌다면 충분히 만남을 청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분위기가 이상했다.
분명, 러시아가 기분 나쁠 만한 일인데도 나를 초대하는 분위기가 지극하기 그지없었다.
‘미국보다 더욱 조심스러웠고.’
심지어, 위험을 느껴 오기 꺼려진다면 대통령의 자식들까지 미국으로 보낸다고 한다.
거의, 중세 시대에서나 나올 법한 방법.
대통령의 자식 명단을 본 나는 알 수 있었다.
러시아가 나에게 진심이라고.
‘전쟁에서도 어떻게든 지켜낸 자식이다.’
러시아 대통령이 아끼는 자식 중 손에 꼽는 아이이다.
그 아이를 나의 안심을 위해 미국으로 보낸다고 하니 얼마나 큰 용기를 낸 건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고민됐다.
내가 러시아를 만나서 이야기해도 되는 건지.
일말의 불안함이 있었다면 굳이 대화하지 않았을 거다.
‘이 정도면 믿을 만하지…….’
더군다나, 이야기가 샌 게 당황스러운 거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 태도를 보면 진짜 대화를 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이 부분은 나 혼자 결론을 내리기 애매해서 상의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을 다녀오고 나서 중간 연락책이 된 샘 헤임.
그와 상의를 내려보고, 결정하면 될 것 같다.
러시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눌지 말지 말이다.
결정을 내린 나는 곧바로 샘 헤임과 만남을 청했다.
전화를 하는 건 곤란했다.
러시아가 정보를 얻은 과정이 모르는 만큼, 최대한 정보가 새 나가지 않도록 대화해야 됐다.
그건 곧 만나서 대화를 나눠야 되는 걸 의미했고.
‘샘 헤임도 궁금한가 보네.’
내가 러시아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게 궁금해서일까?
샘 헤임과의 만남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번에 대화를 원한 게 러시아와 관련된 거라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최근에 러시아 쪽에서 대화를 요청했거든요.”
“…정보가 샜나 보군요.”
“저도 그렇게 짐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원인을 찾기보다 어떻게 행동해야 되나. 그게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디서 샜는지, 어떻게 샜는지를 짚고 넘어갈 때는 지났다.
지금은 어떻게 대처할지가 더욱 중요했다.
“일단은 러시아가 강압적으로 나오진 않았습니다. 정 불안하면 대통령의 자식을 미국으로 보낸다고 하더군요.”
“…자식 사랑이 끔찍하기로 유명한데, 확실히 나쁜 의도는 없어 보이긴 합니다.”
“그래서 저는 만나보고 싶긴 합니다.”
“…….”
만나보고 싶다는 말에 샘 헤임의 눈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어쩔 수 없었다.
미국과 러시아의 사이는 최악이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
그러는 와중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내가 러시아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하니 당황스러울 법도 했다.
“회장님이 원하시면 제가 말릴 순 없죠.”
“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는 게 잘못된 판단일까요?”
“…저는 답변을 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미국 사람이니 이해합니다. 미국 입장은 어떻겠습니까?”
의외였다.
곧바로 러시아와의 대화를 말려올 줄 알았는데, 자신은 답을 할 수 없다는 대답을 건넨다.
이건, 샘이 정직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는 대답이었다.
“당연히 안 만나면 좋겠죠.”
“역시 그렇습니까?”
“하지만 저는 한 번 만나보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
샘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은 미국이 아닌 전 세계인 중 한 명으로 말하는 겁니다. 저는 미국이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그저 힘이 강하기에 질서를 지킬 수 있을 뿐, 절대 선이 아니죠. 지금 미국이 하는 건 힘을 동원해 강제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겁니다. 하지만 회장님이 러시아를 만난다면 대화를 통해 평화를 유지 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습니다.”
“이건 샘의 개인적인 발언이겠죠?”
“물론입니다. 미국이 제가 이 말 했단 걸 알면, 곧바로 해고 조치할 겁니다.”
샘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어떻게 해야 될지, 감이 잡혔다.
아무래도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
샘 말대로 미국이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힘이 강하기 때문에 선으로 여겨지는 것뿐.
당장, 러시아가 가장 강한 힘을 가진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전쟁을 일으킬 이유가 없으니까.
대신, 그 위치에서 다른 나라에 간섭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다.
다른 나라들은 힘이 부족해 감내할 뿐.
어떻게 보면 러시아도 같은 위치인 것 같았다.
이 부분은 만나봐서 대화를 통해 알아봐야겠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혹여나 러시아를 간다면 언질만 주십쇼. 아무리 그래도 회장님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니까요.”
“그렇게 하죠.”
샘과 대화를 마치고, 헤어진 나는 곧바로 러시아 정보요원한테 말을 건넸다.
대화할 생각이 있으니, 이전에 말했던 조처를 해주라고.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만큼, 안전장치 하나는 해놓기로 했다.
* * *
러시아에 도착하자, 여러 사람이 나를 반긴다.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니 일반인은 아닌 것 같다.
딱 봐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
그래도 걱정되진 않았다.
러시아에서 충분히 안전장치를 마련해줬거니와 내 주위에도 못지않은 경호원들이 포진해있으니 말이다.
“가실까요?”
“한국어가 유창하군요.”
“회장님을 모시는 데 흠을 보여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일단 가죠.”
러시아의 첫인상.
내가 너무 선입견을 품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 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러시아다 보니 솔직히 말해 안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 선입견을 깨고,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정도면 다른 나라보다 훨씬 대우해주고 있단 걸 알 수 있다.
그렇게 안내하는 분을 따라 걷다 보니 헬기가 보였고, 그걸 타고 이동하니 오두막으로 보이는 장소가 나타났다.
“이곳부터는 회장님께서만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안에는 대통령님밖에 없으니 안전은 책임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죠.”
아마, 러시아가 미치지 않는 이상 허튼 짓은 안 할 거다.
오두막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사람들.
내 심정지와 연결된 시계에서 위협을 느껴 정보를 보낸다면 곧바로 사람들이 오두막을 점령할 거다.
한 마디로 둘 다 죽기를 원하지 않는 이상 대화만 나눠야 된다는 거다.
떨리는 마음으로 오두막 안에 들어가니 한 남자가 보인다.
뉴스를 통해 자주 봤었던 러시아의 대통령.
텔레비전으로 보다가 직접 보니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반갑소, 블라디미르 퍼틴이라고 하오.”
“반갑습니다. 박제환이라고 합니다.”
나를 발견한 퍼틴이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분명, 나이가 있어 보임에도 손에서 느껴지는 악력은 결코 약해 보이지 않았다.
“대화에 앞서 차 한잔 드시겠소?”
“괜찮습니다.”
“왜, 내가 독이라도 탔을까 봐?”
“부정하진 않죠.”
“…역시 보통이 아니야. 이곳까지 온 걸 보면 그 담대함을 알 수 있겠군.”
차를 마시지 않는다는 말에 퍼틴은 자리에 앉아 대화를 이어갔다.
“러시아가 한국을 서운하게 만들었소?”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대처를 보이는 거요. 한국과는 딱히 악감정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는 행동은 완전히 원수와도 같더군.”
“이득에 움직일 뿐. 악감정은 없습니다.”
“근데 왜…….”
“허나, ‘클리어’를 만들어낸 올리아가 걱정이 많더군요.”
올리아라는 말에 움찔하는 퍼틴.
그도 알고 있나 보다.
올리아가 어느 나라 사람이었는지.
“드디어 답답한 부분이 풀리군……. 그래……. 그게 문제였어…….”
“그게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겠지…….”
“전쟁을 막기 위해서가 가장 크거든요.”
혹시나 퍼틴이 착각할까 봐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사실, 오기 전부터 결정했던 거다.
돌아가지 말고, 그냥 직접적으로 말하자고.
이제는 거리낄 것도 없고, 직접 막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눈치 보는 것보다 그와 진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걸 어떻게…….”
“이때까지의 행동이 꺼림칙한 게 많았고, 언젠가는 일어날 거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 폭력적인 방법이지 않은가. 어째서 대화를 하지 않고, 미국과 붙은 거지?”
“러시아도 폭력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똑같이 행동한 거고.”
“…….”
그리고 대화에 앞서 미국을 만났던 이유.
혹시나 당근을 줄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 전에 채찍질을 가하는 거다.
그래야 내가 제시한 제안에 감사함을 느낄 테니까.
“퍼틴한테 묻고 싶습니다. 저는 평화를 원합니다. 러시아도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고, 미국과 선의의 경쟁을 펼칠 수 있는 그런 평화 말이죠.”
“…그러기엔 이미 늦은 거 아닌가? 자네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전쟁을 펼쳐야 될 것 같네.”
“아니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미국한테도 선물을 줬지만, 완전히 준 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JH 중공업의 지분은 고작 10퍼센트가 끝이 아닙니다. 미국한테 준 10퍼센트를 제외하고, 90퍼센트가 남아 있죠.”
지금부터 내가 제시할 것.
아슬아슬한 줄타기와도 같았다.
너무 압박하면 러시아가 반대편에 서게 될 테고, 너무 배려하면 미국이 반대편에 서게 될 거다.
딱, 그 중간.
두 나라가 아쉬움은 느낄지언정, 분노를 느끼지 않을 정도.
그 정도의 줄타기가 시작된 거다.
“…아무래도 흥미로운 대답을 들은 것 같군. 아직 러시아한테 희망이 있다는 건가?”
“물론입니다. 애초에 미국 편을 든 게 아니라, 제힘을 키운 겁니다. 만약, 미국과 먼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리가 만들어졌을까요? 이렇게 평화적으로 말입니까?”
“…확실히 쉽지 않았겠어.”
“장담합니다. 지금과 같은 대화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거라고.”
내 확신은 퍼틴의 행동에서 비롯됐다…….
처음에는 억울함과 아쉬움이 담긴 대화였다면 지금은 희망을 품고 대화를 나눈다.
그저, 미국과 먼저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말이다.
만약, 미국과 대화를 먼저 나누지 않고, 퍼틴과 먼저 나눴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욕심을 부렸을 거다.
이때까지 압박을 받아온 러시아가 유일하게 미국을 넘볼 수 있는 기회였으니 말이다.
“한국에 괴물이 살고 있었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겠나? 오랜만에 흥미로움이 느껴져…….”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많습니다. 천천히 나누도록 하죠.”
아직,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가려면 한참이나 남았다.
미국과 러시아가 선의의 경쟁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 것.
퍼틴부터 설득하면 될 것 같다.
퍼틴과의 대화가 잘 통하면 그다음은 미국이다.
미국이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두가 만족한 일 처리는 불가능에 가까우니.
아마, 지금 퍼틴이 느끼는 감정을 미국도 똑같이 느껴야 될 거다.
그리고 골라야 할 거다.
내가 제시안 선의의 경쟁을 택하느냐…….
‘그게 아니면 러시아와의 경쟁에서 뒤처지느냐 말이지.’
이때까지 쌓아왔던 성과들.
이제야 빛을 발하려고 한다.